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91화 (92/527)

제18장. 가진 것이 많아서 (5)

차 한잔을 내려놓은 시종장 라울이 창문을 열며 말했다.

"잠시 쉬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바람이 좋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작년 이맘때만 같았어도 그런 말을 절대 듣지 않았을 르메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지."

곧 르메인이 찻잔을 손에 들고 창가로 가 섰다.

그 모습을 보는 라울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밖으로 나갔다.

어느 날부터인가 더는 강박적으로 일에 몰두하지 않게 된 르메인은 이제 아르피아 궁이 아닌 카밀리아 궁에서 잠을 잤다. 집무 공간과 거주 공간을 오가는 시간조차 아끼던 습관을 버린 것이다.

르메인 역시 자신이 많이 변했으며 그 변화에 칼리안과 앨런의 공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시작점이 바로 작년의 국왕 탄신 기념일 축제라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작년의 축제에서 벌어진 일이 참으로 많았다.

성대하게 벌어지는 축제인 만큼 매 해 말도 많고 탈도 많기는 했지만 어디 작년만 했을까.

"이번에는 좀 조용하려나 했더니."

때문에 올해의 축제는 작년에 비하면 조용히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어찌됐건 실리케와 관련된 일이 마무리가 되었으니 말이다.

르메인이 책상으로 다시 걸어가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전서응을 통해 도착한 편지 한 장이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제대로 된 편지로 전달해야 하나 방문자 선정에 시간이 지체되어 부득이하게 새를 이용한다는 설명이 편지 내용의 8할이었다.

격식에서 어긋난 편지를 받은 르메인이 불편해할까 눈치를 보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편지의 내용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딱 두 줄이었다.

먼저, 누가 오는지에 대한 설명.

그리고 안전을 위해 그들이 카이리스 왕궁에 도착하기 전까지 방문자 정보를 비밀에 부쳐달라는 부탁이 적혀 있었다.

그것을 보니 왜 그렇게 회신이 늦었으며 또 왜 그렇게 눈치를 보는 내용으로 도배를 했는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격에 맞지 않는 편지를 받아 심기가 불편해진 르메인이 방문자에게 해를 입히지는 않을까 우려한 것이다.

'대체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걱정을 하는지.'

르메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곧 다시 창 밖을 보며 혼잣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시끌시끌하겠군."

* * *

키리에가 큰 숨을 들이쉰 뒤 내뱉었다.

점원은 건드리지 않는다.

손님은 아쉽지만 보낸다.

철창 속 '투견'들은 놔준다.

그리고 '그들'은 전부 죽인다.

'할 수 있겠어?'

'네.'

키리에로서는 당연한 대답이었다.

키리에에게 있어 이 도박장은 언젠가 반드시 왔어야 할 곳이었다. 그 언젠가가 오늘이 되었을 뿐.

칼리안은 다른 목적으로 이 일을 계획했겠지만 키리에는 참아 온 복수에 대한 허락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 서걱!

입장료를 받던 사내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사내의 몸이 허물어졌다. 입장료 2 플로린, 손가락 두 개를 펼친 채였다.

사내의 죽음을 시작으로 키리에의 검이 도박장에 있는 이들의 생과 사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실수도 없었고 두 번의 검격도 없었다.

마치 아르센의 얼음창처럼, 키리에의 검이 한 번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생명이 떨어졌다.

"으아아악!"

'생'을 허락받은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앞다투어 계단을 올라갔다. 4층의 소란을 느낀 무사들이 더 들이닥치겠지만 상관 없었다.

- 촤악!

- 서걱!

그렇게 거침 없이 도박장의 사람들을 베고 찌르며 앞을 향해 가던 키리에가 잠시 발을 멈췄다.

도박장 한 가운데 설치된 철창.

무수한 '투견'들이 서로 싸우며 유흥거리를 주었던 바로 그 곳. 그 철창의 그늘에 한 남자가 숨어 있었다. 키리에는 주저없이 그를 향해 걸어갔다.

사회자였다.

그가 키리에의 얼굴을 쳐다봤다.

잊기 어려운 서로 다른 색의 두 눈이 사회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 나는 아무 것도 안했어!"

언제나 유쾌한 목소리로 '괴물 눈알'을 소개하던 입에서 두려움에 가득 찬 말이 터져 나왔다.

'이런.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종종 있는 일입니다.'

손님들 앞에서 키리에의 동료 한 명이 죽었을 때 사회자는 그렇게 말했었다. 문득 그 날이 생각난 키리에가 낮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했습니다."

- 촤아악!

사회자의 피가 철창 안으로 흩뿌려졌다.

창살을 타고 뚝뚝 흘러내리는 피를 바라보던 키리에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사이 4층의 소란을 알고 십여 명의 사내들이 더 내려왔다. 그래서 모두 죽였다.

그렇게 이어진 키리에의 복수가 사무실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네 명의 사내가 예리한 검을 든 채 키리에를 막아서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들은 키리에도 아는 이들이었다.

바로 사무실의 남자를 지키던 네 명의 검사였다.

"이 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가장 덩치 큰 사내가 이런 말과 함께 검을 뻗자 나머지 셋의 검도 키리에에게 내리떨어졌다.

그런데 이제껏 무표정하던 키리에의 얼굴에 작게 웃음이 띄워졌다.

'느리다.'

처음 이 곳에 붙들려 왔을 때는 저들이 그리도 무서웠는데.

- 카캉!

검을 한 번 떨쳐내는 것으로 그들의 공격을 빗겨낸 키리에가 다시 팔을 움직였다. 한 번의 베기에 두 명의 목에서 피분수가 터졌다.

남은 둘 역시 오래 살아있지 못했다.

비명을 지르던 머리가 먼저 떨어졌고 도망치던 마지막 사내의 머리가 철창 앞까지 굴러갔다.

키리에는 그 머리가 어디까지 가는지 보지 않은 채 사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발을 멈칫했다.

사무실 안이 비어 있었다.

칼리안과 키리에의 몸값을 놓고 흥정을 하던 남자는 그 곳에 없었다. 대신 남자가 늘 앉아 있던 곳 뒤편의 거대한 금고 안에서 숨 죽인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선 채로 검을 쥔 손목을 빙글 빙글 돌리던 키리에가 조용히 걸어가 금고 문을 열었다.

- 쉬이익!

기다렸다는 듯, 한 자루의 단검이 날아왔다.

키리에가 검을 들어 그것을 쉬이 막아냈다.

- 카앙!

단검은 튕겨나가지도 않았다. 그대로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아르센의 얼음에 비한다면 우스운 속도다.

칼리안이 던진 단검이었다면 검과 목을 같이 꿰뚫었을 것이다.

키리에가 금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자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와 함께 남자의 고함 소리가 금고 속을 윙윙 울렸다.

"오지 마! 더 오면 죽여버린다!"

독기가 잔뜩 오른 남자가 여자 한 명을 방패 삼은 채 키리에에게 소리를 질렀다. 남자의 손에 들린 나이프가 여자의 목에 닿아 있었다.

'저 자가 마지막.'

키리에가 한 걸음을 앞으로 걸었다.

남자의 나이프가 여자의 목에 가는 상처를 냈다.

"꺄아아악!"

"오지 말라고, 괴물 새끼야!"

키리에의 발이 잠시 멈췄다.

키리에는 누구인지도 모를 여자를 인질로 잡은 남자와 붙들린 여자를 한 번씩 봤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키리에가 다시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숨을 죽인 소리는 둘이었다. 겁에 질려 흐느끼는 소리는 없었다.

때문에 키리에는 거칠 것 없이 검을 뻗었다.

서늘한 날이 겹쳐 서 있는 이들의 심장을 향해 내리꽂혔다.

- 콰직!

살과 근육 뼈가 끊기는 소리가 금고 안을 잠시 울렸다.

여전히 이름을 알지 못하는 이 곳의 관리자와, 함께 금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여자의 숨이 같이 끊겼다.

정적이 찾아들었다.

키리에의 물색 머리를 타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모두 다른 이들의 피였다. 도박장의 모든 이들을 제 손으로 죽여 없앤 키리에는 한동안 말 없이 서 있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난 뒤, 키리에는 주변을 뒤져 나갔다. 그 후 금고 안에 쌓인 장부들 중 적당해보이는 것들을 꺼내들고 밖으로 나갔다.

1층의 술집이 텅 비어 있었다.

점원도 손님도 모두 도망친 듯 했다. 덕분에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온 키리에는 말 안장의 가방에 장부들을 챙겨 넣은 뒤 속삭이듯 말했다.

"돌아가 있어."

레이븐의 형제 말은 레이븐 만큼은 아니었지만, 엘프의 피가 흐르는 소년의 말을 알아들을 만큼은 똑똑했다. 따라서 키리에가 매어 준 가방을 등에 진 채로 왕궁을 향해 다각 다각 돌아가기 시작했다.

점점 작아지는 말 발굽 소리를 듣다 온 몸에 밴 피 냄새에 코 끝을 찌푸렸을 때 쯤, 수도 치안대가 도착했다.

얼굴조차 식별되지 않을 만큼 온 몸이 피에 젖은 소년이 검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본 치안대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무기를 내려놓거라!"

키리에는 그들이 오기까지 한참을 기다렸다는 말 대신 순순히 검을 내려놓고 손을 들어올렸다.

그 뒤에는 그들을 보며 침착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칼리안 왕자님의 시종입니다."

* * *

아르센이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발칸의 임시 군단장이기도 한 앨런이 그런 아르센을 어르고 달래듯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생각해보게. 저 분을 자네 아랫사람으로 두는 것은 아무래도 안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내가 물러나고 저 분을 군단장으로 두자니 그도 안 될 일이 아닌가? 그러니 부군단장이 둘이 된 것이라네."

그 말에, 아르센이 오해하지 말라는 것처럼 곧장 대꾸했다.

"제가 지금 부군단장이 한 명 더 늘어나는 게 싫어서 이러겠습니까. 왜 반대하는지 군단장님께서도 잘 아시면서 이러십니까."

아르센의 얼굴과 말투가 평소와 달리 매우 격양되어 있었다.

아무리 혈연 지연이 우선시되는 왕궁이지만 그래도 칼리안은 능력을 중시하고 공정한 인재 편성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나.

"오시는 것이 칼리안 왕자님이셨으면 제가 당장 제 자리라도 내어드렸을 겁니다. 그런데 아니지 않습니까."

아르센은 지금 상황이 영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칼리안의 결정이라 하면 두 말 없이 따르던 아르센이 생각 외로 심하게 반발하자 앨런이 혀를 쯧 찼다. 아르센이 당사자를 코앞에 둔 채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앨런으로서도 상당히 난감했던 것이다.

아르센은 그런 앨런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뜬금없이 부군단장에 임명됐다는 2왕자를 보며 뚱한 얼굴로 물었다.

"마법사셨습니까?"

마법사도 아닌 놈이 무슨 발칸 부군단장을 하느냔 말이었다.

당연히 그 의미를 잘 알아 들은 플란츠는 매우 여유있는 자의 얼굴을 한 채 한 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리고 짧게 답했다.

"왕자다."

능력이 왕자다.

특기가 왕자다.

할 줄 아는 바, 왕자다.

그러니 그깟 마법사 나부랭이가 아니어도 발칸 부군단장 쯤은 할 수 있지 않겠나.

재수없다. 세상사 참 더럽고 치사하다.

플란츠가 요 며칠 계속 빌헬름 관을 왔다갔다 하며 발칸 대원들이 훈련을 받는 양을 지켜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어딘가 계속 뒷맛이 찝찝하더니 결국은 일이 이렇게 됐다.

아르센이 불만을 채 지우지 않은 목소리를 다시 냈다.

"왜 플란츠 왕자님께서 발칸의 영역에 손을 대십니까."

아르센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몰래 욕을 했으면 했지 앞에서 대놓고 이런 식으로 직언을 했던 적은 없었다. 그만큼 불만이 큰 것이다.

물론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플란츠 왕자님께서는 브리센 후작과 같은 길을 가기로 하셨다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발칸이 아니라 카렌이나 라온으로 가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도 제 형이라고 칼리안이 숨긴 것까지 내놓으면서 기껏 살려주고 지켜줘가며 지금까지 목숨줄 연명시켜 놨더니 에반 브리센과 손을 잡았단다. 그러니 아르센의 입에서 고운 소리가 나올 리 만무했다.

플란츠가 아르센에게서 시선을 떼어 앨런을 쳐다봤다.

"마법사들 말버릇은 다 이따위인가."

그 '마법사들'에 앨런 본인도 포함된다는 것을 앨런 역시 잘 알았다. 오래 전 플란츠에게 '미친 짓'을 운운했던 일 때문에 하는 소리일 터였다.

앨런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발칸의 마법사들은 다 이모양이지요. 제일 윗 줄 입이 이러니 다른 것을 보고 배울 수 있겠습니까."

앨런의 말에도 가시가 가득했다.

"아아."

이제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플란츠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내 아우님이 말을 안 했군."

칼리안은 플란츠에게 많은 신경을 쓰는 듯 하면서도 의외로 그리 섬세하질 못했다. 앨런에게 말하여 발칸의 부군단장 자리를 만들어 플란츠를 넣어주는 것까지는 해놓고 플란츠가 에반과 실제로 손을 잡지는 않았다는 중요한 말을 잊은 것이다.

다만 앨런은 칼리안이 말을 하지는 않았어도 대강의 사정을 눈치는 채고 있었다. 그저 어여쁜 제자가 손해를 보아가며 플란츠를 도왔으니 그에 대한 앙금을 털어낸 것 뿐이었다.

물론 이런 눈치 면에서는 거의 얀과 비슷한 수준인 아르센은 그냥 몰랐다.

둘을 잠시 지켜보던 플란츠가 소파 깊숙이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치켜들었다. 그렇게 참으로 왕자다우면서도 왕자답지 않은 자세를 한 뒤에는 나른한 눈으로 둘을 쳐다봤다.

"늙은 마법사는 알면서 저러고. 젊은 마법사는 몰라서 저러고. 가관이군."

반대로 속을 들킨 앨런이 슬쩍 웃었고 아르센이 다시 화가 난 얼굴을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점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플란츠가 앨런과 아르센의 빈정거림을 두고 이들이 왕자를 모욕했다며 처벌을 할 성격은 아니었다는 것.

"저는 도저히······!"

- 끼익.

그리고 또 하나는 화가 난 아르센이 발칸의 부군단장을 때려치겠다는 말을 하기 직전에 칼리안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셋이 모여 있는 것을 본 칼리안이 조금 의외라는 표정이 되었다. 다만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듯 플란츠를 보며 말했다.

"형님. 제가 이전에 말씀드렸던 일을 지금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일부터 저와 사이 나쁘게 지내주시면 됩니다. 후작이 화를 많이 낼 테니 잘 달래주세요."

"그래."

이 대화에 어딘가 조금 잘못된 것이 있음을 안 아르센의 표정이 묘하게 바뀔 때 쯤.

칼리안의 시선이 이번에는 앨런을 향했다.

"그리고 스승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앨런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칼리안을 쳐다봤고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오늘 스승님 이름을 좀 써야 합니다."

바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말이었다.

곧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에 대한 칼리안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제야 비로소 '플란츠가 에반과 거짓으로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알게 된 아르센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됐다.

그런 것을 알 리 없을 칼리안은 시종일관 진지한 얼굴로 말을 마친 뒤 나갔고 앨런 역시 칼리안이 부탁한 일을 하기 위해 서둘러 사라졌다.

조용한 방에, 이제 플란츠와 아르센만 남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