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90화 (91/527)

제18장. 가진 것이 많아서 (4)

칼리안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건드렸다.

생각할 거리가 있을 때 보이는 두 번째 버릇이다.

주변에 꽤 많은 이들이 있었으나 그렇다 하여 소란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칼리안은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손 끝에서 소리가 나지 않게 신경을 썼다.

중앙 귀족의 정기 회의가 진행되는 회의장.

성인식을 치르고 난 뒤 칼리안도 참석하고 있는 자리에서, 커다란 원탁에 둘러앉은 귀족들 중 가장 젊어 보이는 이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올 초에 있던 큰 비로 텐실의 피해가 크다 합니다."

- 그해 봄, 텐실에 유례없는 수해가 발생했다.

- 텐실의 신관들은 세렌티를 경배하는 마음이 부족한 탓이라 했으나 다른 이들은 그것이 운하 건설을 위해 물길을 막아서 생긴 일이라 했다.

사실 칼리안은 회의에 드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시간을 거슬렀다는 이유로 칼리안 혼자만 알고 있는 내용이 언급되면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수해가 생기면 가장 부족한 것은 식량이 아니겠습니까."

- 카이리스에서 이를 돕기 위해 식량을 지원했으나 텐실에서는 거절했다.

- 이 일로 양국의 사이가 한동안 좋지 않았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카이리스에서 지금 언급되는 '식량'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는 것은 칼리안 뿐이었다.

때문에 고민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양국의 우호 관계 유지를 위해 밀을 지원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저 음흉한 놈의 입을 틀어 막을지, 떠들도록 그냥 둘지.

카이리스와 텐실은 밀 수확 시기가 달랐다.

수해가 있다 해도 1월에 마지막 수확이 끝난 텐실의 밀은 각 영지의 저장고에 안전하게 잘 쌓여 있었다. 정작 부족한 것은 따로 있었음에도 넘쳐나는 밀을 지원했으니 거절하는 쪽이나 거절 당한 쪽이나 서로 기분이 상할 수 밖에.

즉, 이것은 양국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여 란델의 입지를 좁히려 한 브리센의 수작이었다.

칼리안의 기억과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보니 브리센은 아직 란델의 편에 설 생각은 없는 듯 했다. 플란츠를 염두에 두었거나 칼리안에게 여전히 마음이 있는 것이리라.

"결정을 해주시면 담당자를 정하겠습니다, 전하."

아무튼 란델의 입지만 좁아지고 말 일이면 저 입을 그냥 둘 텐데 칼리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칼리안의 금고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폴룬 상단이 텐실과 다이아몬드 거래를 하고 있지 않은가.

'나서야 되나. 그냥 둬야 되나.'

앨런과 키리에, 그리고 멜피르를 제 옆에 둔 것과 마법사단을 만든 것. 칼리안이 아는 정보를 활용해서 벌인 일은 이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도 미래가 꽤 많이 바뀌고 있는데 상단 수익을 위해 양국 관계에 영향을 미칠 일에 내가 직접 간섭을 해도 될지.'

고민이 깊어진 칼리안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런데 그때 예상 외의 말이 들려왔다.

"필요치 않다."

르메인이었다.

이어진 르메인의 말은 칼리안이 생각한 것과 거의 같았다. 왜 밀이 필요하지 않은지 르메인은 이미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칼리안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그 손가락은 테이블 위에 작은 곡선을 그렸다.

얼굴에 띄우지 못할 웃음을 손 끝으로 만들어냈다.

'과거의 전하께서는 저 의견이 잘못됐음을 알면서도 반박하지 못하신 거였군.'

그러니 결국은 칼리안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많은 것을 바꾼 셈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만약 지원을 한다면."

지금껏 조용히 앉아만 있던 3왕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자 장내의 모든 이들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리고 칼리안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정답을 말했다.

"소금을 보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만. 지금 텐실은 염전과 소금 저장소가 모두 물에 잠겼을 테니."

르메인이 칼리안을 보며 살짝 웃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안되겠군.'

그리고 그런 모습을 지켜본 에반 브리센 후작이 마뜩치 않은 것이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의도했든 아니든 저 놈이 브리센의 일을 또 방해한 셈이 아닌가. 저 놈과 손을 잡는 것은 안되겠어.'

결국 에반은 란델의 손을 잡기 위해 일단 플란츠를 만나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플란츠가 아이샤에 대한 일을 알고 있는지, 아닌지를 떠보기 위해서.

* * *

중앙 귀족 회의가 끝난 후.

플란츠에게 만남을 청한 에반은 귀족들과 적당히 끝인사를 나눈 뒤 약속 장소로 발을 옮겼다. 다른 이들과 따로 인사를 나눌 필요가 없는 플란츠는 이미 에반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사실 에반이 플란츠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여러모로 실리케를 많이 닮았다는 것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칼리안과 손을 잡았다는 것.

그런 이유로 플란츠와는 절대로 손 잡을 일이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회의 중 있던 일 때문에 란델 쪽으로 마음이 많이 기운 상태였다.

그런데 에반은 세뉴 관의 응접실에 앉아 자신을 쳐다보는 플란츠를 본 직후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구나.'

플란츠의 얼굴 어디에서도 에반에 대한 악감정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저는 왕자님께서 제 얼굴 보기를 꺼려하실 줄 알았습니다."

"내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

물론 플란츠는 에반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지닐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실리케를 축출해야 한다 마음을 먹은 것이 플란츠 자신이었으니 그 일에 도움을 주었다 해서 에반을 멀리 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플란츠가 무엇 때문에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는 모를 에반은 지금 자신을 대하는 플란츠를 보며 한가지 잘못된 가정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플란츠가 실리케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고 때문에 칼리안과 잠시 손을 잡고 실리케를 몰아낸 것인가.'

라고.

그리하여 에반은 이런 생각의 끝에 마음을 살짝 바꿨다.

'칼리안보다 이 놈을 먼저 만났어야 했구나. 이 놈이 정말로 나에 대한 적의가 없다면 칼리안도 란델도 아닌 이 놈과 손을 잡는 것이 가장 나을 테지.'

에반은 괜히 칼리안을 먼저 찾아가서 그런 취급이나 받은 것을 잠시 후회했다. 그리고 플란츠에게 걸어가 간단한 예를 보인 뒤 맞은편에 앉아 말을 건넸다.

"그간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플란츠의 앞으로 걸어가는 그 잠시동안 고민을 마친 결과로 나온 소리였다.

에반의 첫 말을 들은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플란츠는 플란츠대로 에반이 자신을 '써먹기 좋은 호구'로 보았다는 것을 파악했으니까.

똑똑한 플란츠는 그 때부터 에반을 '적당히' 상대해주기 시작했다.

* * *

칼리안은 웃음을 참는 것이 역력한 표정이 되었다.

에반이 플란츠를 들춰보고만 갈 줄 알았다.

아이샤에 대한 비밀을 칼리안이 알고 있다면 계속 칼리안에게 손을 뻗을 것이고 아닌 것 같아 보인다면 란델에게 가리라고 그렇게 생각을 했다.

실리케로 인해 서로 껄끄러울 것이 분명한 플란츠를 제 편으로 만들 생각은 안하겠지, 라고.

그런데 브리센은 플란츠를 선택했다.

"형님의 좋은 머리에 감사드립니다."

플란츠는 자신이 왕이 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꿍꿍이 모를 란델을 왕으로 세울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때문에 플란츠는 에반이 란델에게 가지 못하도록 그 마음을 붙들어놨다.

적당히 자존심을 세워줘 가며 에반과 손을 잡은 것이다.

또 건방진 소리를 하는 칼리안을 향해 피식 웃은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발칸의 일. 내일부터 맡도록 하지."

"네. 그렇게 하면 에반과 손을 잡은 뒤 일부러 발칸의 일을 맡은 것처럼 보일 테니. 발칸의 힘까지 브리센의 손에 들어온다 생각할 브리센 후작이 얼마나 좋아할지 궁금하네요."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럼 그 후에 형님과 제 사이가 적당히 나빠져야 할텐데요."

"언제는 좋았던 것처럼 들리는데."

그 말에 칼리안이 씩 웃었다.

"아무튼 며칠 안에 제가 브리센과 사이 나빠질 일을 하나 하겠습니다. 기껏 도와드린 둘째 형님이 브리센과 손 잡은 것에 대한 화를 냈다 보여질 만한 것으로요."

"그래."

플란츠는 그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알아서 잘 하리라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칼리안 역시 플란츠가 발칸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았다. 알아서 잘 할 테니까.

그저 미친 왕이라 불렸던 이를 상관으로 맞이하게 될 아르센만 고생길에 오를 뿐.

물론 칼리안이 신경쓸 바는 아니었다.

* * *

과거 언젠가 앨런이 키리에를 보며 물은 적이 있었다.

'자네는 여섯 번째 검이 될 생각인가?'

이런 뜬금 없는 질문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하루 18시간.

키리에가 칼리안의 수련실에 틀어박혀 검술을 수련하는 시간이다. 칼리안에게 배우든 칼리안과 대련을 하든 혹은 홀로 연습을 하든. 키리에는 그 시간을 채우고 나서야 하루를 마무리했다.

칼리안이 시킨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그리 하고 있었다.

'왕자님께서 하나 줄여 놓은 소드마스터의 수를 다시 늘려놓고 싶은지 궁금해서 그러네.'

그리고는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검을 쥔 그 누구라도 그것을 바랄테니 괜한 질문을 한 셈이 아닌가 하고.

그런데 예상 외로 키리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작지만 결코 자신 없지 않은 목소리가 대답을 내어놓았다.

'아닙니다. 저는 왕자님께서 쓰실만한 검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왕자님께서 쓰실만한 검이라. 사실 그것이 더 어려운 일 아니겠나.'

이미 칼리안은 그 스스로 강자였으니까.

'네. 왕자님께서 쓰실만한 검이 되려면 검의 길에 오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까요.'

눈치 빠른 앨런이지만, 앨런조차 그런 키리에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얀이야 어차피 오래 전부터 칼리안을 모셔왔었고 아르센은 어쩌다보니 칼리안에게 코가 꿰였다. 물론 앨런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칼리안을 돕는지 스스로 잘 알았다.

칼리안이야 베른으로서의 과거가 있으니 키리에를 아낀다지만 키리에에게 그런 과거를 모두 알려주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키리에가 왜 자신을 따랐는지, 키리에의 과거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이 과묵한 소년이 대체 칼리안의 무엇을 보고 칼리안에게 제 생을 바치기로 했는지 그것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쓸만한 검이라니. 그것 참 어려운 것을 하겠다고 나서는구나.'

다만 앨런은 앨런이었으므로 굳이 키리에의 속마음을 캐묻지 않고 이렇게만 대꾸했었다.

"키리에."

그리고 그 쓸만한 검을 칼리안이 불렀다.

그 후에는 '브리센과 사이가 나빠질 일' 하나를 지시하며 물었다.

"할 수 있겠어?"

언젠가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이었다.

키리에는 만약 '할 수 없다'는 대답을 하더라도 칼리안이 자신을 탓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곧바로 대답했다.

"네."

칼리안은 이번에도 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키리에 역시 간단한 인사만 마친 뒤 곧바로 칼리안의 방에서 나갔다.

그리고 그날 밤.

한 마리의 갈색 말이 왕궁에서 나왔다.

말이 향한 곳은 퍽 이상한 이름의 술집이었다.

- 시스파니안의 깊은 술냄새

혈혈단신으로 그 곳에 찾아간 키리에는 칼리안이 건넸던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일행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묻던 점원의 눈이 키리에의 손에 들린 검에 가 닿았다.

그가 경계의 눈빛을 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키리에는 다른 말 없이 손가락을 세워 아랫층을 가리켜보였다.

"문만 열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점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달려가 비밀 문이 있는 방을 열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방에 들어선 키리에는 칼리안이 알려준대로 비밀 통로를 열었다. 그리고 3층을 지나쳐 4층부터 찾아갔다.

욕설과 고함 환호성이 가득한 곳.

그 곳에 도착한 키리에가 손에 쥔 검을 다잡았다.

그리고 오래 전 칼리안이 키리에를 꺼내오기 위해 들어섰던 사무실을 향해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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