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89화 (90/527)

제18장. 가진 것이 많아서 (3)

"아주 자알 하셨습니다."

혼났다.

"한 겨울 잘 보내고는 반 나절도 안 되어 에반 브리센 후작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란델 왕자와는 완벽하게 척을 지셨습니다. 그것도 그렇게나 성질을 부려가며 그리 만드셨으니 참 자알 하셨습니다."

하루아침에 일을 다 틀어버렸으니 앨런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하시는 김에 란델 왕자와 브리센 후작을 한 자리에 불러다놓고 서로 통성명이나 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이 참에 둘이 잘 지내봐라 했으면 딱 좋았겠습니다."

에반의 검술 실력까지 칼리안보다 좋을지는 알 수 없지만 오러를 쌓아 온 시간의 간극을 좁히는 것이 쉽지는 않았음을 다시 확인했다. 결국 앨런에게도 더는 숨기지 않고 이 내용을 알렸다.

게다가 란델이 칼리안을 동등한 관계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도 명확히 알게 되었다. 간혹 도와주기도 하고 말을 받아주기도 했던 그 모든 행동들이 칼리안이 '그럭저럭 쓸 만한 도구'로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때문에 거부했고 이것도 앨런에게 말했다.

그래서 혼났다. 아니, 혼나고 있었다.

"후작 쪽이야 그간 쌓인 것이 많으셨겠지요. 저도 압니다. 그래도 아직은 브리센이 꼬리를 말고 있으니 오러 차이가 나든 말든 한번 쯤 화내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앨런은 속이 답답해 안되겠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테라스 문이 활짝 열리며 찬 바람이 훅 들어왔다.

좀 살겠다는 표정이 된 앨런의 시선이 다시 칼리안에게로 닿았다.

"브리센은 그렇다 치더라도 란델 왕자의 속알맹이가 하루 이틀 의뭉스러운 것도 아니었는데 그걸 굳이 들쑤셔서 불씨를 만들다니. 왕자님답지 않게 왜 그리 날을 세우고 오셨습니까. 평소였다면 어떻게 대응할지 결정할 때까지 적절히 몸을 사렸을 분께서요."

충분히 귀 기울이며 앨런의 말을 다 들은 칼리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초콜릿 맛있네요."

신나게 얘기했더니 이러고 있다.

"이런 어여쁜 제자가 또 어디에 있을는지."

앨런에게서 피어가 조금 새어나왔다.

태연한 얼굴로 스승이 흘린 공포감을 떨쳐 낸 칼리안이 초콜릿 안의 귤 향을 한껏 느끼며 조금 전 란델과의 일을 떠올렸다.

'아쉬운 일이구나.'

발 아래 서지 않겠다 한 칼리안의 말에, 란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말 없이 자리를 떴다.

"생각없이 날만 세우고 온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이상 어떤 걱정을 하지 말라 하십니까."

"란델 형님은 제가 브리센과 등진 것을 확신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브리센 후작 쪽은 아직까지는 몸을 사릴 테니 그 쪽도 걱정할 필요 없고요."

"란델 왕자 쪽은 그렇다 하더라도, 브리센 후작 쪽은 어찌 그리 보십니까. 실리케도 사라졌으니 당장 세 왕자 중 한 명을 붙들어야 살 판 아닙니까."

"제가 플란츠 형님과 한 배를 탔으니까요."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거리는 머리카락을 잠깐 쓸어넘긴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형님이 실리케의 비밀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고 있는 비밀이 있으면 그걸 저에게 말했는지,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를 테고. 그러니 불안할 것 아닙니까."

"실리케의 비밀이라면, 전 왕비 아이샤에 대한 말씀이십니까."

"네. 하다못해 독이라도 구해다 주었을 테니 브리센 후작이 그 일에 관여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그리고 아이샤의 독살 사실을 제가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 할 겁니다. 다만 플란츠 형님이 그 일을 알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의심은 할 테고요."

플란츠와 실리케가 얼마나 가까웠는지 에반은 모른다. 그러니 에반은, 실리케가 아이샤를 독살했다는 사실을 칼리안은 모르더라도 플란츠는 알고 있지 않을까 걱정하리라는 말이었다.

"브리센 후작이 란델 형님과 손을 잡을 생각을 하더라도 우선은 플란츠 형님을 떠올릴 수 밖에 없을 겁니다. '혹시 플란츠 왕자가 아이샤에 대한 일을 알고 있는가. 안다면 그것을 칼리안에게 전했는가.' 하고요."

앨런이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제가 그 이야기를 전해듣고 텐실에 알린다면 텐실 왕가에서 브리센을 노릴 테니, 예전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섣불리 란델 형님에게 손 내밀지 못할 겁니다.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요."

결국 란델은 플란츠와 브리센 쪽을, 브리센은 란델과 텐실 쪽을 신경쓰느라 당장의 칼리안을 견제하지는 못하리라는 뜻이었다.

그런 이유로 마음 놓고 성질을 한 번 부려 본 칼리안이 초콜릿 하나를 더 집어 입에 넣었다.

달았다.

그리운 곳의 향이 입 안에 퍼진다.

* * *

잠결에 손을 뻗으니 희고 보드라운 것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부드럽게 뭉클거리는 느낌이 나쁘지 않아서 잠시 가만히 있던 플란츠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것이 결코 기분만 좋고 넘어갈 일이 아님을 깨닫고는 몸을 확 일으켰다.

언뜻 보면 쿠션 같기도 한 둥글납작한 것이 플란츠의 옆에서 단잠에 빠져 있었다.

당연히 칼리안의 고양이였다.

"또 왔네."

정작 칼리안의 방에는 제 발로 간 적 없다는 이 놈의 고양이는 여전히 틈이 날 때마다 찾아왔다. 세상 모르고 잠을 자고 있는 놈 덕에 잠이 깬 플란츠는 더 잘 생각도 들지 않아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한번 움직임을 멈췄다.

침실 커튼 너머 소파 위에 고양이 주인이 앉아있는 것을 본 탓이다.

이렇게 올 일은 더 없을 것이라 해놓고 칼리안이 또 왔다.

두 번은 못하겠다던 앨런이 한번 더 수고를 해주고 간 덕분이었다.

"뭐야."

"어떻게 깨워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다행이네요."

꽤 깊이 잠이 들었던 탓이었는지 아니면 칼리안이 조금 더 조용히 움직일 수 있게 된 까닭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이번에는 고양이와 고양이 주인이 들어온 것을 전부 다 눈치채지 못했다.

"제가 아침부터 어딜 좀 가야해서 조찬에 못 갑니다."

"그런데."

"아. 조찬에 못 간다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조찬에 못 가니 드릴 말씀도 못 드릴 것 같아서 왔습니다."

높낮이 없는 목소리에, 플란츠는 대답 없이 칼리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근시일 내에 브리센 후작이 형님을 찾을 겁니다. 빠르면 오늘일 수도 있고요."

"······ 그래."

"상대하기 불편하시겠습니까."

실리케의 일에 에반이 꽤 크게 관여를 했기 때문에 플란츠가 에반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칼리안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묻는 말이었다.

사실 에반과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지내기에는 썩 보들보들한 사이가 아닌 것은 맞았다. 하지만 얼굴 보는 것이 꺼려질 만큼도 아니었다. 따라서 플란츠는 별 것 아니라는 말투로 대답했다.

"상관없어."

커튼 때문에 플란츠는 칼리안의 얼굴을 볼 수 있지만 칼리안은 플란츠의 표정을 살필 수가 없었다. 때문에 저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는 어려웠으나 칼리안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플란츠가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잘 대접해서 보내면 되나."

칼리안이 에반에게 얼마나 큰 무안을 주고 되돌려 보냈는지는 플란츠도 알았다. 그러니 에반이 그 다음으로 란델이나 자신을 찾아오리라는 것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 처신을 어찌 해야 하나 아직 결론을 못내렸는데 칼리안이 그 문제를 대신 풀어 준 셈이었다.

"잘 하실 필요까지는 없고 적당히만 대접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입을 열었다.

끄덕여 봐야 안 보일 테니까.

"알겠으니, 가."

"그리고 아침부터 드릴 말로 적절하지는 않겠지만."

"또 뭐."

칼리안은 자리에서 일어서는 대신 말을 한번 더 골랐다. 조금 꺼내기 어려운 말 하나를 더 전해야 했다. 덕분에 한동안 말이 이어지지 않자 플란츠가 잠깐 고개를 돌려 헤이시아 궁 쪽을 쳐다봤다.

"내 어머니와 관련된 일인가."

정말 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네. 맞습니다."

"말해."

"브리센 후작이 형님께서 뭔가를 알고 있는지를 떠보려 할 수 있습니다. 미리 알고 계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알고 계신다는 티도 내시고 저에게 말했다는 티도 내셔야 합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주의하라는 듯 말을 이었다.

"비밀은 아는데 저한테는 말 안했다는 것처럼 보이면 형님 죽습니다."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요즘 죽을 일 참 많아졌다 싶어서였다.

"무슨 일인데."

"아이샤 전 왕비는 독살됐습니다."

커튼 너머에서 한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대답 대신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잘 알아들었다는 뜻일테니 칼리안은 더 이상의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간단히 고개를 숙여보인 뒤 제 방으로 돌아갔다.

* * *

에우리아 세이렌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에서 나왔다.

본래는 폴룬 마법학원으로 가서 교장 에우리아가 되어야 하는 날이었으나 그 날은 달랐다. 카이리스 마법사 협회 건물로 간 것이다.

마차가 협회 건물 앞에 다다를 때 쯤 무언가를 발견한 에우리아는 낭패한 듯한 얼굴이 되었다.

"레이븐이 벌써······. 큰일났네."

이제 카이리시스 사람들이 모두 알아보는 오른쪽 발목에만 하얀 털이 난 검은 말이 마굿간에 있었기 때문이다.

약속 시간보다 30분을 빨리 왔는데 칼리안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서둘러 마차에서 내린 에우리아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에 유난히 사람들이 많았다. 에우리아를 만나러 온 칼리안을 보기 위해 몰린 것이다. 하여튼 호기심 많은 마법사들이 건네오는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에우리아는 마법사들 사이를 헤치며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이미 차를 반쯤 마신 칼리안이 이제 막 들어온 에우리아를 보며 웃었다. 딱 봐도 허겁지겁 달려온 티가 난다.

"내가 일찍 온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칼리안에게 예를 보인 에우리아가 곧바로 책상으로 걸어가 편지 한 장을 들고 왔다.

"여기, 아이즌 에이프린 백작으로부터 온 소식입니다. 어제 저녁에 도착했습니다."

기사 세력의 준비가 어느정도 되어 가는지 적혀 있었는 서신.

한 달에 한 번씩 아이즌은 이렇게 에우리아를 통해 칼리안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칼리안은 이렇게 보고받은 내용에 대한 지시사항과 지원금을 다시 에우리아를 통해 그들에게 보내고 있었다.

편지를 읽던 칼리안이 잠시 침음을 냈다. 그간 문제 없이 준비가 되어 가고 있다는 내용만 적혀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전염병이라니."

"네. 기사 가문 중 한 곳의 영지에서 전염병이 돌았다고 합니다. 영지민과 기사들 중 열에 한 명이 죽는 피해가 있었다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추위가 가시면서 문제가 생긴 듯 합니다."

"이젠 카이리스에 치유사들도 없으니 많이 어려웠겠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소강을 보이고 있다 하니 다행이네요. 전하께서도 아시는 일인지 말씀을 드려봐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잠깐 뒤를 봤고, 얀이 다가와 수표 한 장을 내려놓았다.

본래 생각했던 것보다 금액을 더 높게 쓴 칼리안이 그것을 에우리아에게 전하며 말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이것 뿐이군요. 폴룬 남작 통해서 필요한 물품을 함께 보내세요. 인근의 다른 영지들도 피해가 있다면 그 곳들도."

"네 왕자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곧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런 칼리안을 배웅하려던 에우리아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수표에는 평소 지급하던 금액보다 '0'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

"영지 복구가 아니라 영지 구매가 가능할 돈을 주셨네."

에우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왕자에게 지급되는 용돈이 아니라 칼리안의 사비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 * *

청년은 지닌 성격만큼이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에는 얼마 전 카이리스로부터 도착한 초대장이 들려 있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기사가 걱정 가득한 눈을 하며 물었다.

"정말 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위험할 수 있습니다."

청년은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실 경을 좀 만나야 해서. 바쁘다 하니 내가 가야지."

청년의 고집을 잘 아는 기사는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본 청년이 작게 웃었다.

바람이 불었다.

청년의 긴 청은발이 잠시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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