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가진 것이 많아서 (2)
칼리안이 조금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걸 왜 지금 말해."
키리에는 세뉴 관을 둘러싼 산책로를 지날 때가 되어서야 아르센이 욕을 하더라는 말을 전해줬다. 때문에 이렇게 묻는 칼리안에게 키리에가 조용하지만 명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헤르츠 경은 능력있는 자입니다, 왕자님."
"내가 아까운 인재 한 명을 정말 세뉴 강 건너편으로 보내버릴까봐 그 자리에서 일러바치지 못했다는 소리야?"
"네. 맞습니다."
"좀 억울하네. 집어 던진 검을 회수하지 못할 뿐이지 언제 사라지는지를 모르는 것이 아닌데."
칼리안으로서는 억울할 일이었다.
"내가 어련히 알아서 던졌을까."
실드를 맹신하는 듯한 아르센에게 적절한 경각심을 줄 만큼의 거리를 정확히 확인하고 공격했던 칼리안이 이렇게 툴툴거렸다.
그런데 그때,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걷고 있던 얀이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참. 오늘 란델 왕자님의 일정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시간이 좀 애매해서 오고 가는 길에 두 분이 마주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의 발이 잠시 멈추었다.
칼리안이 볼을 긁적이며 얀을 향해 말했다.
"넌 또 왜 그걸 지금 말해."
그러자 얀은 미안하기는 하지만 나도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얼굴이 되었다. 그래서 그 이유가 뭐냐는 눈으로 쳐다보니 얀은 참으로 얀 같은 대답을 당당하게 내어 놓았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있었어야죠. 헤르츠 경과 그렇게 험하게 훈련을 하시는 것을 보고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그러다 진짜 다치시면 어떡하시려고요."
"키리에 말대로면 내가 진짜로 다치는 것은 둘째치고 내가 진짜로 헤르츠 경을 죽여버리는 게 아닌지를 걱정해야 하는 것 아냐?"
정말. 이 놈이나 저 놈이나.
한 놈은 나를 너무 험하게 보고, 한 놈은 나를 너무 무르게 보니 이를 어찌하나.
아무튼 놀라서 잊었다 하는데 다른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일단 알겠어. 마주치지만 않으면 되지."
결국 칼리안은 키리에에게도 얀에게도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이렇게만 대답했다.
'란델 형님이라.'
실리케가 그렇게 된 이후 란델은 조찬에 단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 플란츠가 다쳤던 그 자리에서 제 속내가 드러났다는 것과 칼리안이 플란츠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굉장히 불편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때문에 체르밀 궁에서는 우연히도 마주치지 않았다.
평소 란델이 밖에 나올 일이라 해봐야 장미 정원에 가는 것 뿐이었으니 그냥 칼리안이 피했다. 다른 행사에 함께 나간 자리에서는 한 마디 말도 섞지 않았었다. 본인이 불편하다는데 굳이 가까이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 날 그냥 그렇게 가버리신 것에 대해서 정작 플란츠 왕자님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오히려 란델 왕자님이 왜 그러시는지."
그리하여 칼리안의 앞에서는 특별히 다른 왕자들의 험담을 하지 않는 얀이 이런 말을 할 정도였다.
"세상만사 귀찮으신 플란츠 형님은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거야."
칼리안이 그렇게 대답하며 에반이 기다리고 있을 세뉴 관으로 들어섰다.
* * *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은 대륙의 세 번째 검이었다.
에반 브리센 후작은 그보다 먼저 검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니 적어도 세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는 시기에 소드마스터가 된 에반이 눈을 치켜떴다. 지금 막 들어서는 칼리안을 본 뒤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에반은 대문까지 닫고 겨울 내내 수련만 했다.
이쯤 했으면 됐겠지 싶어 문을 열고 나온 터였다.
그런데 칼리안에게서 오러의 힘이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검의 길에 오른지 아직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애송이인데 겉보기로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일 뿐이었다. 슬레이만의 말마따나 칼 근처에도 못 가본 얌전한 왕자 꼴이었으니까.
단단히 각오하고 왔음에도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지 않도록 막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에반의 속내는 모조리 칼리안에게 까발려지고 있었다. 의도했던 상황이었으므로 칼리안은 우스워하지 않고 조용히 에반의 앞 쪽으로 걸어와 섰다.
에반은 그 때까지도 생각에 깊이 잠겨 있었다. 때문에 칼리안의 뒤에 서 있던 얀이 입을 열었다.
"브리센 후작. 일어나 예를 보이십시오."
집안 내력임이 틀림 없다.
먼저 예의를 차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렇게 엎드려 절 받는 식으로 에반의 인사를 상대한 칼리안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에반이 맞은편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내 형님이 아니라 나를 만나고자 청했습니까."
차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꺼내든 그 말에 에반의 눈썹이 꿈틀했다.
칼리안과 에반은 지금 처음 만난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일전에 실리케를 축출하는 과정에서 아르센을 매개로 접점을 한번 가졌었다. 때문에 에반은 그 일을 빌미로 칼리안과 브리센이 손을 잡는 것에 대해 얘기를 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왕궁을 찾아온 상태였다.
그런데 칼리안은 시간이 아깝다는 티를 풀풀 풍겨대고 있었다.
다만 앞에 있는 이는 앨런처럼 멋대로 성질을 부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때문에 에반은 떨떠름한 얼굴을 지우며 말했다.
"검의 길에 오르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왕자님."
"고맙습니다."
칼리안이 짧게 대답했다.
그러더니 에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칼리안 역시 여전히 에반의 오러를 느끼지 못해서 그리 보는 것이었으나 에반이 그것을 어찌 알겠는가. 그저 다음 말을 빨리 꺼내고 헤어지자는 종용의 뜻으로 밖에는 받아들여지질 않았다.
'내가 이 곳에 괜히 왔구나.'
결국 에반은 꺼내봐야 손해일 것이 분명한 '칼리안과 브리센의 동맹' 이야기는 일단 접어두고 그럴싸한 방문 사유를 입 밖에 냈다.
"사실은 플란츠 왕자님께서 잘 지내고 계신지를 확인하고 싶어 왔습니다. 아무래도 저를 직접 보는 것은 꺼려하실 듯 해서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짧은 웃음 소리를 냈다.
대놓고 비웃음을 보인 것이다.
그것을 본 에반의 눈썹이 다시 꿈틀했고 칼리안이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계절 얼었다 녹은 강물 소리는 내 귀에도 들립니다."
세뉴 강이 얼었다 녹을 만큼 시간이 지난 뒤에야 플란츠의 안부를 묻느냐는 질책이기도 했고 에반의 꿍꿍이 가득한 행보를 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어찌됐건 그 속내를 다 들킨 것은 분명했으니 에반의 얼굴이 한 겨울의 세뉴 강처럼 꽁꽁 얼었다.
* * *
같은 시간.
새로 추가 된 20명의 발칸 대원에 대한 평가 결과 보고를 위해 르메인을 찾은 앨런이 편지 한 장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이것이 왕궁에서 나와서 라트란을 들렀다가 다시 왕궁으로 왔더군요. 아무래도 사람이 남아나는 모양입니다."
앨런에게 줄 편지가 굳이 라트란 백작령을 거쳐 다시 왕궁으로 돌아온 뒤에야 받게 되어 하는 말이었다.
앨런이 건네준 보고서를 보고 있던 르메인이 고개를 들어 편지를 보았다. 그리고는 카이리스에서 일을 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려주는 것보다는 조금 더 나을 대답을 했다.
"발송이 다 끝난 모양이군. 백작에게까지 도착한 것을 보니."
새로운 호칭이 이제 조금 익숙해진 앨런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편지를 다시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초대장이라니. 지나가는 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감회가 새롭습니다."
금박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편지에는 르메인의 서른 아홉 번째 탄신 기념일 축제에 초대한다는 내용이 온갖 미사여구와 함께 적혀 있었다.
르메인의 생일은 5월이었다. 때문에 세크리티아와 리베른 텐실에 보내는 초대장은 새해 초에 이미 발송되었다. 그 다음으로는 먼 곳에 거주하는 카이리스의 귀족들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이리시스 인근에 머무는 귀족들에게 보내졌다.
그러니 앨런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발송된 초대장을 받은 것이라 보아도 될 터였다.
"이번에는 작년처럼 버리지는 말도록."
괜한 트집을 잡으려 들었던 일을 꼬집는 말에 앨런의 입가에 웃음이 들었다. 새 초대장 달라는 앨런을 스승님으로 삼아버렸던 칼리안의 당돌한 모습이 생각난 까닭이다.
"걱정 마시지요. 제가 받은 초대장은 시스파니안이 와서 버리라고 하셔도 못 버립니다."
그렇게 말한 앨런이 테이블에 놓여 있던 상자에서 초콜릿 하나를 집어들어 입에 넣었다. 그러자 낯설면서 친숙한 새콤달콤한 맛이 입 안에 퍼졌다.
"귤 잼이 들었나 봅니다. 카이리시스에서는 귤을 접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을 터인데. 리베른의 것입니까?"
"세크리티아."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한 르메인이 초콜릿 상자를 앨런 쪽으로 밀었다.
"단 것은 백작이 좋아하니 가져다 먹게. 새로 봉해진 남작이 세크리티아에서 구했다며 보내왔는데 손이 잘 가질 않는군."
그 말을 들은 앨런이 르메인에게 보이지 않을 묘한 미소를 지었다.
세크리티아의 귤이라니.
앨런보다 몇 배는 좋아할 사람이 딱 한 명 있지 않은가.
르메인이야 칼리안이 세크리티아 기사의 기억만 가지게 된 것으로 알고 있으니 떠올리지 못했겠지만 앨런은 아니었다. 때문에 앨런은 더 먹지 않고 그의 어여쁜 제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줄 요량으로 상자를 집어들며 물었다.
"혹시 전하의 탄신일 축제에 세크리티아에서는 누가 오는지 회신이 있었습니까?"
"아직. 답이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지."
칼리안에게 있어 귤만큼 반가운 사람이 오게 될지.
퍽 기대되는 눈을 한 앨런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 * *
꺼려하던 이를 마주치는 것만큼 곤욕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에반과의 짧은 대화를 마치고 체르밀로 돌아오는 길에 결국은 란델을 마주치고 말았다.
체르밀로 들어가는 세 개의 계단을 사이에 두고 칼리안이 계단 위에 선 란델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란델 형님을 뵙습니다."
예전 같았다면 '그래' 라는 말과 함께 지나갔을 란델은 발을 멈추고 칼리안을 내려다봤다.
플란츠였다면 인사는 건넸고 할 말은 없으니 먼저 가겠다며 자리를 떴을 것이다. 하지만 차마 그런 것을 따라할 수는 없던 칼리안은 속을 알 수 없을 이 첫째 왕자가 빨리 자신에게서 관심을 접고 가던 길을 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 날 네게 응하지 않아서 미안하구나."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란델은 여전히 계단 위에 선 채로 이런 말을 건네왔다.
매사 무관심한 란델이 '그 날'이라 기억하며 지칭할만한 날은 딱 하루다. 마지막으로 란델을 마주쳤던 날. 실리케를 몰아냈던 바로 그 날이다.
란델은 자신이 치유력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칼리안이 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플란츠가 피를 쏟아내던 그 상황에서 치유사를 찾다 말고 란델을 불렀으니 눈치를 못 채면 그야말로 얀이다.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히나가 오기 전, 치유사를 찾던 칼리안과 눈을 마주친 뒤 일어나 나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날의 도움 요청에 응하지 않은 것을 이제와 사과하는 중이라는 것도 알아들었다.
다만 칼리안은 그 일로 인해 마음이 편치 않아 그런 표정을 지은 것이 아니었다.
'계단 위에서······ 결례인데.'
같은 서열의 왕자를 계단 위에 선 채로 내려다본다는 것은, 아무리 란델이 장자라 하더라도 칼리안에게 취해서는 안될 행동이었으니까.
칼리안은 입으로는 사과를 말하면서도 정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첫째 형을 슬쩍 올려다봤다. 란델은 여전한 얼굴과 표정으로 칼리안을 보고 있었다.
푸른 눈이 여전히 깊고 어둡다.
그리하여 마치 푸른 짐승의 아가리 속에 고개를 처넣는 기분이 든 칼리안이 웃었다.
"고작 세 칸짜리 계단으로 속마음을 보이십니까."
여전히 아래에 선 칼리안이 란델을 고스란히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 뒤 천천히 계단을 밟고 올라섰다. 조용한 체르밀 궁에 계단 밟는 소리와 칼리안의 목소리가 함께 울렸다.
"오래도록 피어 있었다던 그 작은 장미. 그것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제야 이해를 했습니다."
"그것을 보았더냐."
- 타박, 타박.
"네. 보았습니다. 다만 왜 그렇게 꺼내두셨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말라 비틀어지고 시들어있지 말고 보기 좋게 제대로 피어 있으라는 뜻이었나 봅니다. 보기 좋게, 다만."
- 타박.
"······ 란델 형님의 발 밑에서."
마지막 계단을 올라간 칼리안이 같은 높이에 있는 란델의 눈을 쳐다봤다. 란델이 칼리안의 시선을 마주 바라봤다.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그래. 그런 생각이었지."
"저는."
칼리안의 입에서 적개심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싫습니다."
능력있고 말 잘 듣는 착한 동생은 베른이 이미 한 번 했다.
그러니 칼리안은, 안 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