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87화 (88/527)

제18장. 가진 것이 많아서 (1)

- 쌔애액!

삽시간에 만들어진 얼음창이 쏘아져 나갔다.

아르센과 상대의 거리는 불과 세 걸음 남짓.

때문에 아르센의 얼음창은 생성과 동시에 상대방의 가슴팍에 도달했다.

- 카앙!

하지만 상대는 그것을 막아냈다.

단단한 대리석 바닥에 내리쳐진 얼음이 산산히 부서졌다.

눈으로 보고 움직이면, 죽는다.

소리를 듣고 움직이면, 반드시 죽는다.

그것이 아르센의 얼음이었다. 그만큼 빨랐다.

그럼에도 상대는 그 얼음의 첨예한 끝이 몸에 닿기 전에 쳐내거나 혹은 회피하고 있었다.

아르센은 이제 몇 번째 공격이 막힌 것인지 세는 것도 포기했다. 어디에서 어느 방향으로 얼음창을 날려도 죄다 막혀버리고 있었던 탓이다.

그들의 주변을 멀찍이 둘러싼 이들의 시선이 땅에 떨어진 얼음 조각에 가 닿았을 무렵, 아르센의 손을 따라 연달아 세 번의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 쌔액! 쌔애액! 쌕!

심장과 뒷목 그리고 정수리를 노린 세 개의 얼음창이 동시에 공기를 갈랐다. 달라진 공격 패턴에 상대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검을 쥔 그의 몸이 잔상을 남기며 빠르게 움직였다.

- 카아앙! 타당!

심장으로 날아오던 얼음을 손쉽게 날려버린 그가 곧바로 몸을 비틀듯 돌아서며 검을 뻗고 회수했다. 뻗어나간 검에 머리 위로 떨어지던 얼음이, 회수되어 돌아오는 검에는 뒤에서 날아오던 얼음이 가로막혔다.

- 투둑, 투두둑!

바닥에 떨어진 얼음들은 어김없이 조각조각 흩어졌다. 단순히 쳐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얼음에 그만큼의 충격을 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르센은 멈추지 않고 공격했다.

- 쌔액!

- 카아앙!

사납게 달려든 얼음창이 또 다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아르센이 약한 것이 아니었다. 상대가 강했다.

이 얼음창 한 번에 브리센의 기사들이 한 명씩 죽어나갔던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아르센을 상대하고 있는 이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얼추 가늠이 되리라.

- 쉬이이익!

아르센의 손 끝에서 얼음 줄기가 쏟아져 나갔다.

바늘같이 가늘고 날카롭게 응집된 얼음이 언뜻 보기에도 십수 개는 넘는다.

그 수를 확인한 상대의 손에서 검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기 보다는 순식간에 형태를 바꾸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날카로운 예기를 발하던 검은 어느새 둥글고 넓적한 방패가 되어 있었으니까.

- 타다다다당!

새롭게 만들어 낸 방패로 공격을 막은 상대가 땅을 박찼다.

공격을 막기만 하던 그가 당장 코 앞까지 달려드는 것을 본 아르센이 지체없이 마력을 운용했다. 시동어 없이 사라진 그의 모습이 상대의 뒤에서 나타났다.

목표가 사라졌으나 상대는 당황하지 않았다.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등 뒤를 향해 방패를 휘둘렀다.

- 부웅!

순간 낭패한 얼굴이 된 아르센의 몸이 다시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그가 있던 곳의 허공을 가르게 된 방패가 금세 검의 형상을 취했다.

다만 이번에는 장검이 아닌 단검이다.

동시에 아르센이 상대방으로부터 조금 먼 곳에서 나타났다.

- 쉬이익!

그 생각과 움직임을 이미 읽었다는 듯, 아르센이 나타난 곳으로 상대방의 단검이 날아왔다.

"이크!"

깜짝 놀란 아르센이 재빨리 실드를 발현했다. 그렇게 몸을 보호하며 다시 텔레포트를 하려던 그 때.

- 카가각!

불길한 소리와 함께 날아온 단검이 실드를 관통했다.

브리센의 기사들이 몇 차례나 공격하고도 멀쩡했던 실드가 단검 하나에 뚫려버린 것이다. 잠시 희게 빛나던 실드가 허무하게 사라졌다.

곧 유리 조각 같은 칼날이 그대로 아르센의 목으로 짓쳐들었다. 아르센이 자신의 실드가 파괴된 것을 인지하고 아주 잠시 멈칫한 사이의 일이었다.

지켜보던 모두가 위험을 느낀 그때.

당장이라도 목을 뚫어낼 기세를 보이던 단검이 마치 누가 붙들기라도 한 것처럼 우뚝 멈췄다. 그리고 공기중에 흩어지는 듯한 모양새로 형태를 잃고 사라졌다.

아르센의 목에 작은 상처를 낸 뒤였다.

- 꿀꺽.

피부가 살짝 따끔거리는 것을 느낀 아르센이 마른 침을 삼켰다. 만약 단검이 멈추고 사라지지 않았다면 지금쯤 아르센의 목에는 딱 단검만한 구멍이 났을 것이다.

그러니 아르센의 패배였다.

아르센은 양 손을 들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졌습니다, 왕자님."

오랜만에 불쑥 찾아와 아르센과 대련을 했던 상대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습니다, 헤르츠 경."

그 말에 숨도 쉬지 못하고 둘의 대련을 지켜보던 하얀 로브의 마법사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모두의 입에서 환호성이 절로 튀어나왔다.

"우와아아!"

"멋집니다!"

아무리 오러를 쓰지 않았다지만 그래도 소드마스터가 아닌가? 그런 칼리안과 아르센이 공방을 주고 받는 것을 눈 앞에서 보았으니 꽤 괜찮은 눈요기가 되었을 터였다.

훈련장을 뒤흔드는 함성 소리에 잠깐 웃은 칼리안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아르센에게 건넸다.

한 방울씩 흘러내리는 피 때문이었다.

"놀랐습니다. 이제 시동어 없이 텔레포트도 하는 겁니까."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레이스 경의 도움이 컸습니다."

이동 마법의 대가인 레이첼 그레이스에게 공을 돌리는 겸손한 대답이었다.

곧 둘은 나란히 서서 훈련장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칼리안이 아르센을 보며 물었다.

"헌데 굳이 검을 든 이에게 근접하여 공격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조금 전에도 그랬지만 베른의 마지막을 기억해보아도 그랬다. 아르센은 코앞까지 다가와 베른의 검을 막고 파괴했다.

아르센이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상대방과 떨어져 있으면 싸우는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칼리안이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아르센을 쳐다봤다.

아무리 텔레포트가 있다지만 마법사들은 검을 든 이들보다 몸이 느릴 수 밖에 없다. 방금 전 아르센 역시 실드가 깨진 뒤 이렇다 할 행동을 못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인 공격 전문 마법사는 검사와 코앞에서 공방을 주고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방금 죽을 뻔 했으면서."

때문에 칼리안이 이렇게 말하자 아르센이 씩 웃었다.

그저 재밌다는 이유로 위험을 무릅쓰고 사는 아르센을 보며 칼리안은 더 참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베른도 잡아낸 아르센이었다.

물론 팔도 하나 없었고 사흘을 넘게 잠을 자지 못해 집중력도 개똥이었던데다 몸에는 화살이 열댓개 쯤 박혀있었고 출혈도 많아서 제대로 몸을 가누기도 어려웠지만.

그래도 아무튼 소드마스터를 이겼던 마법사니까.

뭐 알아서 잘 하겠지.

"다른 대원들에게 그리 하라 가르치지는 마세요."

"물론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정중하게 대답한 아르센이 목덜미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런데 왕자님께서 검을 집어던지실 때에는 많이 놀라긴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거리를 두고 싸울 의미도 없겠습니다. 마력의 검을 손에서 떼낸 뒤에도 유지하시게 되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진심어린 감탄의 말이었다.

칼리안은 아직 멀었다는 듯 대답했다.

"잠깐 던질 정도로는 유지할 수 있는데, 그 이상은 어렵습니다."

그리고는 굉장히 무심한 말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한 번 던지면 컨트롤도 못하고 회수도 안 돼서."

"······ 네?"

잠깐만요.

컨트롤도 안되고 회수도 안된다뇨.

우뚝 발을 멈춘 아르센이 묘한 얼굴이 되어 다시 물었다.

"그것을 알면서 던지신 것은 뭡니까."

칼리안이 웃었다.

"경의 실력에 대한 믿음."

믿음 같은 소리 한다!

그냥 운이 좋아서 목 앞에서 사라졌다는 소리가 아닌가.

아르센이 굉장히 할 말이 많은 얼굴을 했다.

이런 아르센의 마음을 알 리 없을 마법사들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이제 50여 명으로 늘어난 발칸의 대원들이었다.

자칫했으면 방금 전에 꽃잎 타고 세뉴 강을 건너갈 뻔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르센이 혼잣말을 하듯 칼리안을 욕했다.

오랜만에 눈호강을 하게 된 마법사들이 신나게 떠드는 통에 아르센이 내뱉은 욕은 아마 칼리안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터였다.

키리에가 다 들었다.

* * *

곧 아르센은 훈련장 안으로 마법사들을 불러들인 뒤 방금 전 오간 공방에서 배울 점들에 대한 교육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훈련장 밖에 놓인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어떻습니까."

혼잣말은 아니었다. 바로 옆에 앉아있던 플란츠를 향한 질문이었다. 세상사에 관심 없다는 눈으로 앉아 있던 플란츠가 물었다.

"뭐가."

칼리안이 굳이 이 좋은 봄날에 밖에 나와 아르센과 한 판을 벌인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플란츠 때문이다.

물론 플란츠와 사이좋게 소풍이나 온 것도 아니었다.

마법사단 발칸.

단순히 마법사들을 바글바글 모아놓고 불덩이만 내쏘는 집단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악마라는 악명까지 붙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거 발칸은 르메인이 창단했지만 플란츠가 썼다.

그러니 누가 저들을 '악마'로 만들었겠는가.

"저 마법사들, 훈련시켜 볼 생각 없습니까."

바로 플란츠였다.

나라 운영은 전부 다 실리케에게 맡겨두고 발칸의 육성에만 몰두했었다는 것을 칼리안은 안다.

물론 플란츠는 아직 어리다. 과거와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플란츠가 그 나이의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도 칼리안은 안다.

"또 짖네."

검이나 좀 휘두르던 플란츠에게 갑자기 마법사들을 훈련시키라 하니 플란츠의 입에서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말이 나왔다. 어차피 하루 한 번은 듣는 말이니 칼리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

"검을 가르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군사훈련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칼리안은 욕심이 생겼다. 어차피 놀고 있는 원 주인이 바로 옆에 있는데 뭐하러 다른 이에게 일을 맡기겠느냐는 생각이 든 것이다.

칼리안의 말을 들은 플란츠가 실소하며 말했다.

"아우님도 잘 하실 수 있는 일에 굳이 왜 나를 불러내는지 모르겠는데."

그 말에 칼리안이 마주 웃으며 말했다.

"제가 아는 건 이 나라 것이 아니라서요. 들킵니다."

그렇다. 이제는 플란츠도 칼리안의 비밀을 적당히 알고 있었다. 칼리안은 르메인에게 했던 이야기를 플란츠에게도 똑같이 했다.

물론 왕제이자 기사였던 베른이 카이리스의 전략전술을 어찌 모르겠냐만은. 발칸의 일에 직접 관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저는 안 그래도 가진 것이 많아서 발칸까지 제가 관리하게 되면 귀찮은 일이 많이 생길 겁니다."

발칸의 힘이 우습지 않다는 것을 이제 브리센과 란델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때문에 발칸은 아직 칼리안의 것이 되어서는 안됐다. 브리센 혹은 란델이 혼자 남을 때까지는 힘의 균형을 유지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플란츠가 발칸과 관여되어야 할 큰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하고 제 그늘에 있으면 형님 죽습니다."

칼리안이 진지한 얼굴로 플란츠를 향해 말했다.

브리센 후작가의 대문이 열렸다. 에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리였다.

"형님과 제가 손을 잡았고, 그런데 형님은 제대로 된 세력이 없지 않습니까. 브리센 후작은 분명 제일 먼저 형님부터 없애려 들 겁니다."

플란츠가 말 없이 훈련장을 바라봤다. 고민하는 중인 듯 했으므로 칼리안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런 그들의 뒤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안 왕자님."

고개를 돌리니 얀이 서 있었다. 정말 전하기 싫지만 전해야 할 말이 있다는 그런 표정을 한 채였다.

"무슨 일이야?"

"에반 브리센 후작이 지금 만나뵙기를 청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 꿍꿍이를 알 만 했으므로 칼리안의 입에 웃음이 걸렸다.

"내 오러가 보이는지 그걸 확인하러 오셨나."

재밌는 일이다.

에반은 지금 칼리안보다 자신이 약하다 여기고 있을 테니까.

그동안 놀고만 있지는 않았던 칼리안이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라고 해. 갈 테니까."

"네, 왕자님."

다시 발칸 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칼리안이 플란츠를 향해 말했다.

"보십시오. 바로 티를 내지 않습니까. 얀은 분명 제가 형님과 함께 이 곳에 있다 했을 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저를 지목해 만나기를 청했다는 것은, 브리센 후작 시선에 더 이상 형님이 없다는 뜻입니다."

플란츠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같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발칸, 한번 맡아보시죠."

"······ 그래."

원하던 대답을 들은 칼리안이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훈련장 밖으로 나갔다.

늙은 사자 이빨이 얼마나 더 날카로워졌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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