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86화 (87/527)

제17장. 그 걸음 (6)

사실 칼리안은 거짓말을 잘 못했다.

정말이다.

덕분에 칼리안의 몸을 가지게 된 지 1년도 안 된 지금 칼리안의 과거를 완전히 알고 있는 이가 벌써 두 명이었다. 물론 앨런과 키리에다.

게다가 슬레이만은 칼리안이 말하지 않았음에도 비밀을 꿰뚫어봤고 플란츠는 진실에 거의 접근해가고 있으며 아르센 역시 정확히는 아니지만 칼리안에게 남다른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것까지는 눈치를 채고 있었다.

이들이 칼리안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은 이제 그리 큰 문제가 되질 않았다. 그래서 칼리안도 극구 부인하는 것을 그냥 포기해버렸다.

하지만 르메인의 경우는 달랐다.

이 세상에 칼리안의 비밀을 알면 안 되는 단 한명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바로 르메인이니까.

때문에 검의 길에 어떻게 올랐는지에 대한 적당한 핑계거리를 찾는데 일주일이 넘게 걸린 칼리안이었다.

"그러니까 시스파니안의 둥지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그 뒤에 슬레이만과 대련을 하며 검의 길을 깨우쳤다. 그렇게 얘기를 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앨런의 질문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러자 앨런이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얼굴이 되더니 툭 내뱉었다.

"한번 가서 말씀해보시지요. 그 입에서 욕이 나오는 것을 저도 좀 보고 싶으니."

호신술 배우다 깨우침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놈이나.

드래곤에게 검의 이치를 배웠다고 말하겠다는 놈이나.

칼리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무엇이라 설명을 해야 합니까."

아무튼 플란츠가 깨어난지도 벌써 사흘이다.

더는 플란츠의 방에 머물기도 힘들었다. 눈만 뜨면 나가라고 성화를 부렸으니.

결국 칼리안은 아무 대비도 하지 못한 채 앨런과 함께 아르피아 궁으로 갔다.

칼리안이 찾아왔다는 것을 들은 르메인은 조찬을 서둘러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 얼굴이 상당히 수척해져 있었기 때문에 칼리안은 굉장히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자신의 변명거리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플란츠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사흘이나 숨기게 된 것이 아닌가.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칼리안의 인사에 르메인이 어서 앉으라는 듯 손짓을 했다. 칼리안이 르메인의 맞은편에 앉은 뒤 시종장 라울이 들어와 차와 과일을 내려놨다. 그 후 라울이 나가며 집무실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르메인의 입이 열렸다.

"네가 요즘 고생이 많다 들었다."

플란츠를 간호하느라 그 방에 있는 줄로 알고 있으니 하는 소리였다. 그야말로 칼리안의 양심을 쿡쿡 찌르는 말이라서, 칼리안이 서둘러 대답했다.

"플란츠 형님은 잘 깨어났습니다. 무탈합니다."

그 말에 르메인이 아주 기뻐하는 얼굴을 하더니 이내 다시 걱정하는 눈빛을 보였다.

"괜찮은 것이냐?"

방금 전에 몸이 다 나았다 했으니 이번에는 다른 것에 대한 질문일 터였다. 실리케의 비수가 길고도 깊은 상처를 낸 것이 비단 몸만은 아니었으니까.

"다행히 다른 생각은 없는 듯 합니다. 그래도 완전히 괜찮아지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당장 실리케 뒤를 따라가겠다는 생각은 없는 것 같았으니 그것 하나는 다행이었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상처가 좀 아물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할 터였다.

"그래. 네가 신경을 써 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아닙니다, 전하."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칼리안 스스로도 자신이 이렇게까지 플란츠를 돕게 되리라고는 단 한순간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플란츠에 대한 시름을 내려놓은 르메인은 이제 다음 시름거리를 꺼내놓기 위해 잠시 말을 골랐다. 칼리안은 그런 르메인의 말이 이어지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그 일이 있던 날 네가 보여준 것에 대해 왕궁 안팎으로 오가는 말이 많구나.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 물론 나도 그렇고."

칼리안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서 지그프리드의 그 아이에게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만."

"죄송합니다."

칼리안이 얼른 사과의 말을 꺼냈다. 얀이 르메인에게 얹어준 시름에 대한 것이었다.

세상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둘째 치고 그런 생각을 고스란히 르메인에게까지 전할 줄은 칼리안도 몰랐다.

"제가 다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르메인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보인 뒤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마력의 덩어리를 만들어 보였다.

언제나와 같이 투명한 유리조각이 뭉친 모양의 구체가 손바닥 위에 놓였다.

"허."

그날 잠시 보았던 것이 이렇게 눈 앞에 나타나자 르메인이 다시 한번 놀란 눈을 하며 짧은 감탄을 냈다.

칼리안은 그것을 무딘 날의 작은 칼로 만들어보인 뒤 오러를 불어넣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흩어냈다. 아무래도 국왕의 앞이었으니 무기를 오랫동안 보이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마력과 오러를 함께 사용할 수 있다보니 이런 재주가 생겼습니다."

고작 재주라니.

칼리안의 말에 르메인이 웃었다.

칼리안이 그런 르메인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죽어 사라진 검사의 기억을 가지게 되었다는 설명을 했다.

그것은 사실이라 하기에도 그렇다고 거짓이라 하기에도 어려운 말이었다.

"지그프리드 공작과 검을 맞대 본 적이 있습니다. 공작의 말로는 제가 사용하는 검술이 세크리티아 기사의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너무 허황된 소리임을 칼리안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빙성을 주기 위해 슬레이만의 이름도 적당히 섞어 덧붙였다.

칼리안이 대체 언제 세크리티아 기사를 만나보았겠는가. 그러니 그들의 검술을 칼리안이 쓸 줄 안다 하면 믿지 않기도 어려울 터였다.

"언제부터 그런 힘을 지니게 되었느냐?"

"기억을 가지게 된 것은 전하의 탄신 기념일 조금 전의 일입니다. 그리고 방금 보여드린 그것은 지그프리드 공작령에 도착한 뒤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르메인이 갑자기 짧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목이 간당간당한 것이 네가 아니라 나일 것이라 하더니. 마나실 경은 이 일을 알고 있었던 것이구나."

"미리 말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르메인이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창 밖에 보여지는 왕궁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네가 있는 곳이 왕궁이 아니었다면 숨길 이유가 없었으리라는 것을 안다. 숨긴 것에 대해서 질책할 생각은 없으니 미안해하지 말거라."

그렇게 말한 르메인이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쳐다봤다.

"호신술이나 배우다 깨우친 것은 아니라 하니 다행이다."

"······ 죄송합니다."

칼리안의 머리가 절로 숙여졌다. 얀은 정말이지 얀이다.

"아니다. 다만 힘을 얻게 된 과정에 대해서까지 모두에게 알리기는 어렵겠구나."

과정을 빼고 칼리안의 검의 길에 올랐다는 것만 알리겠다는 소리였다. 아직 그레이가 어떤 상태인지는 모를테니 칼리안이 여섯 번째 검이 되었다는 소식이 퍼져나갈 터였다.

"발칸의 창단식 자리에서 내가 알리도록 하마."

실리케의 일로 발칸의 창단식이 조금 미뤄졌다. 얀을 통해 일주일 쯤 뒤에 진행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칼리안은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많은 이들 앞에서 힘을 보였으니 이미 세작들을 통해 대륙의 모든 나라로 칼리안의 이야기가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니 막을 수도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훈련할 길이 생겼음을 반겨할 수 밖에.

"그리고 일전에 네가 말했던 이동 마법진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았다."

공간이동 마법진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칼리안이 눈을 빛내며 르메인을 쳐다봤다. 대답을 꽤 기다리고 있던 듯한 모습이었으므로 르메인이 살짝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수락하마. 그 역시 원하는대로 해보려무나."

본래 르메인은 아무래도 어렵겠다며 거절을 하고자 했다.

그런데 칼리안이 검의 길에 올랐다는 이야기가 퍼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에반 브리센 후작이 경계를 하기 시작할 것은 분명했다. 따라서 지그프리드와 카이리시스를 연결시킨다면 브리센에서 허튼 생각을 할 일이 적어지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 르메인이었다.

더불어 란델에 대해서도.

당연히 르메인은 란델이 신관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플란츠가 쓰러졌을 그 당시 칼리안과 란델이 보인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칼리안은 플란츠에게로 달려갔고 란델은 밖으로 나갔다.

- 칼리안 왕자님이 저 궁을 비워내기 전까지 란델은 얌전할 겁니다. 란델의 속은 그때 가면 들여다 보실 수 있겠지요.

앨런의 말을 잠시 떠올린 르메인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졌다.

그날 란델은 제 속내를 드러낸 것이나 다름 없었다. 칼리안과 플란츠를 제 형제이기 이전에 경쟁자로 보겠다는 소리였다. 그런 란델이 왕위에 오른다면 칼리안이나 플란츠를 어떻게 처분할지는 보지 않아도 분명한 사실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래."

칼리안에게 주어진 저 힘이 과연 득이 될지.

혹은 또 다른 독이 될지.

르메인의 눈에 채 씻어내지 못한 걱정의 빛이 어렸다.

* * *

카이리스 왕궁에서는 실리케와 연관된 모든 것을 지워냈다.

'지그문트 칸 시스파니안'이라는 위대한 이름으로 시작되는 카이리스 역대 왕비의 목록에서 실리케 브리센이라는 글자 위에 두 줄의 선이 그어졌다. 실리케가 만들었던 온실은 완전히 해체하여 치워냈으며 사고가 있었던 곳에 대해서도 보수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실리케와 연관된 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처분이 있었다. 죄의 유무와 경중을 따져 죄가 있는 이들은 감옥에 가게 되었다. 죄가 없다 하더라도 왕궁에 둘 수는 없었으므로 모두 왕궁 밖으로 내보냈다.

그로 인해 플란츠의 시종과 시녀들이 모두 왕궁 밖으로 내쳐지게 되었다. 단 한 명도 빠짐 없이 모두가 실리케의 수족이었던 까닭이다. 그리하여 왕궁의 내정 담당관은 새로운 시종과 시녀를 직접 뽑을 생각인지 혹은 왕궁에서 배정해야 할지를 묻는 서신을 플란츠에게 보냈다.

본래대로라면 플란츠가 그것을 결정하기 전까지 임시로 보필할 이들을 먼저 보내야 했으나 칼리안이 플란츠를 대신해 거절했다. 자신의 시종과 시녀들이 돌아가며 플란츠를 살피기로 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덕분에 플란츠는 새로운 시종도 배정받지 못한 채 칼리안의 시종과 시녀들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멀쩡히 일어난 뒤에도 '여전히 혼수상태'인 척을 하며 아직 내정 담당의 서신에 대해 답을 하지 못한 채였다.

칼리안이 안나갔으니까.

도무지 나갈 생각을 하질 않았으니까!

'형님 때문에 다 망했으니까 이 정도는 이해해주십시오.'

정작 플란츠는 제대로 보지도 못한 그 힘을 사람들에게 들킨 이유가 바로 플란츠 때문이라 하니 플란츠는 창문으로 3층과 4층을 오가며 눌러앉아 있는 칼리안을 더 내치지도 못하고 그저 꾹꾹 참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내 동생이 맞기는 하느냐는 그 질문도 꺼내지 못한 채로 꾹꾹 참았다.

아무튼 그런 일들의 결과로.

"애옹!"

고양이가 계속 찾아왔다.

칼리안이 르메인을 만나겠다며 드디어 밖으로 나간 뒤였다.

혼자 남아 창 밖으로 언뜻 보이는 헤이시아 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저 고양이가 침대 위로 폴짝 올라왔다. 청소를 하는 히나를 몇 번 따라다니더니 플란츠의 방을 그것도 침대를 제 영역으로 삼은 것이다.

"애오옹!"

처음 봤을 때는 손바닥만하던 것이 벌써 한 배 반은 자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방문 아래 난 틈으로 참 자유롭게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고양이를 보고서야 알았다.

닫힌 문의 틈이 그렇게나 컸다는 것을.

'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목걸이에 써둔 글자를 쳐다보던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방문을 잠시 쳐다봤다. 곧 노크소리가 들리겠거니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 똑똑.

아니나 다를까, 오래지 않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혼수상태'인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고 곧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며 히나가 들어왔다.

그리고는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로 플란츠를 향해 수어를 했다.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청소를 하겠습니다,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등등.

플란츠는 몇가지 수어를 배우게 되었다. 매번 수첩에 적어 보여주는 것이 신경쓰여서 그냥 배웠다.

아무튼 히나의 말은 고양이가 또 들어왔으니 하는 사과였고 플란츠는 짧게 대답했다.

"둬."

발치에 고양이 한 마리 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 감사합니다, 좋은, 왕자님.

플란츠는 감사하다는 말만 알아들었고 히나는 웃었다.

언제나처럼 마음에 가득 찬 그림자는 전부 지워내주는 그런 웃음이었다.

어느새 플란츠는 헤이시아 궁을 보던 것도 잊고 발치의 고양이만 바라보고 있었다.

* * *

시간은 다시 흘렀다.

빌헬름 관에서 벌어진 일을 지우려는 것처럼 발칸은 같은 자리에서 더 성대한 창단식을 치뤄냈다.

플란츠는 잘 회복해나가고 있었다.

사고가 있던 빌헬름 관에 칼리안과 함께 입장함으로서 자신이 건재함과 함께 두 왕자가 완전히 손을 잡았음을 알렸다. 그리하여 란델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새로 맞췄던 화려한 옷을 대신해 평소 입던 차림을 한 앨런 마나실은 최근에 주인을 잃은 라트란 영지를 하사받으며 백작위에 봉해졌다.

때문에 그 곳은 이제 마나실 영지가 되어야 했으나 그런 것은 딱 질색인 앨런은 영지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아르센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그것이 발칸의 부군단장에 정식으로 위임된 감격 때문일지 다시 시작된 야근으로 인한 피로 때문일지는 아르센과 앨런만 알았다.

반 브리센 세력의 기사들을 이끌게 된 아이즌 에이프린은 기사 양성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와 뜻을 함께 하기로 한 열 개의 기사 가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브리센 후작가는 잠시 대문을 닫았다.

에반은 사고가 있던 그 날 칼리안의 오러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음을 생각하며 수련에 임했다. 물론 그것은 칼리안이 마법으로 지워냈기 때문이었으나 에반은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발칸의 창단식을 마친 이후 르메인은 카이리스에 여섯 번째 검이 탄생했음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사람들은 시스파니안을 닮은 3왕자가 검의 길에 올랐음에 환호했다.

- 카이리스에 세렌티의 영광 있으라!

겨울이 왔고, 지나갔다.

고요한 세뉴 강을 꽁꽁 얼려두었던 얼음이 녹자 봄의 시작을 알리는 프레디아 꽃의 향기가 온 사방에 퍼져나갔다.

그렇게 르니에리 향기는 지워지고 새로운 봄이 왔다.

브리센 후작가의 대문이 다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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