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85화 (86/527)

제17장. 그 걸음 (5)

내가 널 어떤 마음으로 살려뒀는데.

저딴 칼에 네가 죽으면 내 생은 뭐가 되냐고.

진짜 미친 새끼 같으니.

* * *

칼리안의 손에서 검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플란츠가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뒤에야 행사장은 비로소 혼란에 휩싸였다. 지금 놀라야 할 일이 칼리안이 푸른 빛무리를 발현했다는 것만은 아니었음을 깨달은 까닭이다.

왕비가 왕자에게 칼을 휘둘렀으니까!

제 아들이 흘리는 피를 또 보게 된 르메인이 플란츠에게로 다가가던 걸음을 휘청였다.

"플란츠."

그런 르메인을 붙든 앨런은 칼리안을 보며 혀를 쯧 찼다. 모두의 앞에서 힘을 들켜버렸으니 그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다만 지금 당장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잘 알았으므로 앨런은 다시 르메인을 보며 말했다.

"우선 이 곳을 벗어나 계시지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더 지체하지 않고 르메인을 보호하며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와 함께 카에라의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일부는 앨런과 함께 르메인을 호위했고 또 일부는 실리케를 포박해 끌고 나갔다. 그리고 남은 이들은 귀족들도 모두 내보내며 주변을 통제했다.

발칸의 마법사들은 빌헬름 관에 누군가 더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분위기에 휩쓸려 발생될지 모를 또 다른 공격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혼란의 한 가운데 있던 칼리안은 이 모든 일들을 지켜보지 못했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하는 것이 맞을 터였다.

칼리안은 조금 전 그 많은 이들 앞에서 오러를 썼음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르메인과 얀 란델과 에반까지 모두 다 칼리안이 숨긴 것을 보았다는 걱정도 모조리 미뤄뒀다.

칼리안이 입술을 깨물며 플란츠의 상처를 내리눌렀다.

머릿속을 맴돌던 욕지거리가 기어이 입 밖으로 나왔다.

"미친 새끼."

플란츠는 이미 정신을 놓았다.

실리케의 비수는 사정 없는 상처를 남겼다. 상처가 길고 또 깊었다. 심장이 뛸 때마다 피가 솟구쳤다. 검붉은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축복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자손이 정말로 특별하기를 바랐다면 축복의 힘도 더 강했어야 했다. 하지만 시스파니안은 그 정도의 힘을 남겨주지는 않았다.

그녀는 정말이지 빌어먹게도 사려깊었으니까.

이대로는 진짜 죽는다.

멈추지 않는 피를 보던 칼리안이 채근하듯 입을 열었다.

"치유사를, 빨리."

"이미 부르러 갔습니다. 히나가 오는 것이 빠를 것 같아서 공자님은 체르밀 궁으로 갔습니다."

소란스러운 와중에 칼리안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은 키리에가 다가오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칼리안과 함께 플란츠의 상처를 지혈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무언가를 떠올린 칼리안의 고개가 휙 들렸다.

바로 이 곳에 치유사가 있지 않은가.

란델이 있지 않은가?

"란······."

때문에 란델을 부르며 고개를 들었던 칼리안의 입이 하려던 말을 멈추고 서서히 닫혔다.

란델은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로 계속하여 칼리안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든 칼리안과 앉아있던 란델의 시선이 곧바로 맞닿았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칼리안이 보게 되었다.

지독하리만치 이성적인, 란델의 밑바닥을.

란델은 칼리안과 달랐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으로 나갔다.

숨긴 모습을 풀어놓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길게 웃었다.

칼리안은 그런 란델을 원망하는 대신 상처를 누른 손에 힘을 주었다. 악다문 이 사이로 다시 한번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오래지 않아 히나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 * *

가만히 앉아 있던 실리케가 고개를 들었다.

느리지도,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은 발소리가 어두운 복도에 울렸다. 그 걸음 소리만으로도 누가 온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곧 소리가 멈추고 잠시동안 정적이 흘렀다.

말 없이 선 채로 쇠창살 너머의 실리케를 지켜보던 이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아주 깊이 잠긴 목소리였다.

"나를 찾았다고요."

피 묻은 옷, 오른손이 있어야 할 곳에 감긴 붕대, 창백해진 얼굴까지. 실리케의 모습은 아침과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했다. 여전히 아름답고 여전히 독기어린 모습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불렀단다."

그렇게 말하던 실리케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 눈이 오른 손에 가 있는 것을 보니 잘린 곳이 아픈 듯 했다. 칼리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잠시동안 말을 멈추고 있던 실리케가 입을 열었다.

"너."

그렇게 칼리안을 부른 실리케의 눈이 칼리안의 면면을 훑어내려갔다. 칼리안은 묵묵히 실리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숨기는 것이 있지?"

칼리안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예상했던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작 그것을 물으려 이 곳까지 불러낸 것인가.

칼리안이 숨긴 것에 대해 뭐가 그리 궁금해서. 이제와서 이런 질문이나 한단 말인가.

곧 칼리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실리케의 눈빛이 달라졌음을 느끼며 칼리안이 설명을 덧붙였다.

"숨기는 것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와서 그의 비밀을 실리케에게 알려 줄 이유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실리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칼리안은 그에 대해 더 이상 말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때문에 실리케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온 김에 나도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실리케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칼리안은 긍정으로 들었다.

"아이샤 전 왕비. 당신이 죽인 것이 맞습니까."

란델의 친모이기도 한 전 왕비의 죽음에 실리케가 정말 연관이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아이샤······."

그렇게 말한 후 한동안 기억을 더듬는 척을 하던 실리케가 떠오른 것이 있다는 표정을 만들어보였다.

어린아이가 보여줄 듯한 순수하면서도 잔인한 웃음을 지은 실리케가 칼리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그 일을 어떻게 잊겠니. 내 손으로 처음 건넨 독이었는데."

아이샤도 죽였다.

지금 그것을 저렇게 추억거리 꺼내놓듯 말하는 모습에 할 말을 잃은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르메인을 이제까지 살려둬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 판이었다.

실리케의 부드러운 음성이 복도를 울렸다.

"나는 이렇게 솔직하게 말했는데. 넌 아니구나."

그렇게 말한 실리케는 다른 말 없이 칼리안이 있는 쪽을 보고 있었다. 뭐라 대답을 해주기를 바라는 듯 했으나 칼리안은 더 이상 실리케와 나누고 싶은 말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만 발을 돌릴까 하던 칼리안은 곧 걸음을 멈추고 잠시동안 실리케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조용히 큰 숨을 들이킨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실리케의 말에 대한 대답이 아닌 새로운 질문이었다.

"나를 보자마자 물어볼 줄 알았는데. 안 물어보네요. 당신의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제 손으로 아들에게 칼을 휘둘러놓고도 실리케는 이제껏 단 하나도 묻지를 않는 것이다.

칼리안의 말에 실리케가 냉랭한 목소리를 냈다.

"······ 끝까지 나를 방해했잖니."

지독하리만치 잔혹한 오해. 그리고, 외면.

살짝 내리 뜬 눈으로 바닥을 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더 말하고 싶지도 않지만. 나도 화가 좀 나 있어서."

칼리안이 손을 들어 심장이 있는 곳을 가리켜보였다.

"당신의 그 서툴고 작은 칼에 어떻게 그런 심각한 상처가 났을지. 그걸 좀 생각해봤으면 하는데."

다시 반말이 나왔으나 실리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다만 하나 남은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말아 쥐었을 뿐이었다. 실리케의 눈이 드레스에 묻은 붉은 핏자국을 향했다. 누구의 피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천천히 허리를 숙여 실리케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느린 속도로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보통, 지키려는 쪽으로 뛰어듭니다."

실리케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같은 표정을 한 채 드레스 자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칼리안이 마지막 말을 전했다.

"그러니 당신이 걷던 그 걸음. 한 번만 돌려보지 그랬습니까."

말을 마친 칼리안이 뒤돌아 걸어나갔다.

마지막을 알리는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그 곳에 또 한번의 정적이 찾아왔다.

곧 가느다란 흐느낌 소리가 복도에 퍼져나갔다.

그것이 뒤늦은 후회일지, 더 나은 길을 만들 방법을 놓쳤음에 대한 아쉬움일지.

혹은 또 다른 말을 담은 소리였을지.

이제 와 그것을 신경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실리케 스스로도.

* * *

실리케에 대한 형 집행은 빠르게 진행됐다.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말했던 것처럼 광장에 레니시타 잎을 깔지는 않았다. 다만 아주 길고 고통스럽게 숨을 멎게 한다는 독이 전달됐다. 르메인의 결정이었다.

도무지 깨어날 생각을 않는 플란츠를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그토록 많은 이들을 독살했던 것에 대한 똑같은 죗값이라 여긴 것이었는지는 르메인만 알 수 있을 일이었다.

그리고 그 날의 세뉴 강에는.

그 어떤 꽃잎도 떠내려가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실리케를 위한 안네루시아를 준비하지 않았다.

* * *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고요한 세뉴 강처럼 지나갔다.

좋지 않은 기억을 빠르게 지워내고자 했으므로 실리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곧 사라져갔다. 그 대신 칼리안을 언급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졌다.

그 날 실리케에게 가려졌던 또 다른 사건이 있었으니까.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귀족들과 기사들이 보았다.

칼리안이 손에 들었던 그것은 분명히 오러였다.

'왕자님께서는 이제 고작 열 다섯이십니다. 지금껏 그 나이에 소드마스터가 된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뿐만입니까? 마법도 사용하신다 하지 않습니까.'

흉한 일을 겪었으니 이제 좋은 일을 공표해야 할 때가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들이 르메인에게 계속 전달됐다.

하지만 르메인은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고 있었다. 아니 할 만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칼리안을 일단 만나봐야 무슨 말이라도 할 것이 아닌가?

그 날 칼리안은 실리케를 마지막으로 만나고 온 뒤 곧바로 플란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일주일 째 그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깨어나지 못하는 플란츠 옆을 계속 지키고 있는 것이었으니 아무리 르메인이라 해도 차마 강제로 불러내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용히 입을 연 르메인이 이마를 감싸쥐었다.

속은 시끄러운데 앞에 앉은 새끼 코끼리가 자꾸 이상한 말을 하고 있었던 탓이다.

"자네 말은, 칼리안이 호위에게 호신술을 배우다가 검의 길에 올랐다는 것인가."

일 평생을 오롯이 검술 수련에 바치며 살아온 슬레이만이 거품 물고 쓰러질 소리를 한 얀은 정말로 진지했다. 심지어 얀은 칼리안의 성취를 매우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깊이 잠든 듯 일어나지 않는다는 플란츠만으로도 걱정이 태산인데 칼리안의 일까지 더해져 르메인을 괴롭히고 있었다.

하필 이런 때 앨런도 없었다.

얀을 불러 물어보겠다 했을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말하고 나간 뒤로 돌아오질 않는 것이다.

"그래. 알겠으니 가보도록."

결국 르메인은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한 채 얀을 돌려보냈다.

그저 하루 빨리 플란츠가 깨어나서 칼리안이 밖으로 나오기만을 바라는 르메인의 한숨이 깊고도 깊었다.

* * *

한편 그 시간.

르메인의 한숨을 만들어낸 두 왕자가 있을 체르밀 궁은 르메인의 시끄러운 속과는 정 반대로 지나칠 정도의 고요함에 묻혀 있었다.

밖에서는 이미 실리케에 대한 일을 잊어가고 있었으나 체르밀만은 그렇지 못했다.

따라서 아무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으므로 과연 왕자들이 사는 곳이 맞기는 할까 싶을 정적이 감돌고 있는 것이다.

특히 플란츠가 머무는 4층의 분위기는 카이리스 왕궁 그 어느곳보다도 침체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것이 누구든 4층에 발을 디디기를 꺼려했다.

때문에 아무도 알지 못했다.

"······ 그래서 넌 왜 안 가는데."

카이리스의 2왕자가 이미 깨어났으며 아주 멀쩡해진 몸으로 짜증 섞인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을.

"변명 거리를 아직 못찾았습니다."

그리고 칼리안이 자신이 어떻게 검의 길에 올랐는지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해서 일주일 째 이 곳에 틀어박혀 있었다는 것도.

덕분에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얀을 부른 르메인이 지금 어떤 고초를 겪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를 칼리안은 아주 뻔뻔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 신경쓰지 말고 쉬십시오. 아직 많이 어지러우실 겁니다."

플란츠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라는 말이 적힌 목줄을 한 고양이가 침대로 올라와 애옹거리고, 그 옆에는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고양이와 대화를 나누는 시녀가 있고, 그 뒤는 오드아이 검사가 말 한마디 안한 채 눈을 부릅뜨고 서 있는데, 또 그 옆에는 7서클 마법사가 검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었다.

이틀 전 눈을 떠서 이 광경을 처음 봤을 땐, 설마 실리케로 인해 우울해할까 걱정해서 저러나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우애좋은 형제 사이가 아니지 않나.

"······ 가라고."

애초에 내 동생이 맞기는 하느냔 말이다.

그런 플란츠를 보며 칼리안이 씩 웃었다.

싫다는 뜻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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