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그 걸음 (4)
아주 조금만 시간을 거슬러 이틀 전 토요일.
칼리안이 반 브리센 세력에게 제 이름을 소개하고, 새 잡던 앨런 옆에서 르메인이 친 브리센 세력을 잡고, 플란츠가 히나로부터 감사 인사를 받던 그 날.
에반 브리센 후작의 저택으로 폴룬 상단의 마차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 안에는 멜피르도 앨런도 아닌 아르센이 들어 있었다.
"처음 뵙습니다.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입니다."
아르센의 자기 소개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정중하되 왜인지 모르게 사람 심기를 쿡쿡 건드리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물론 에반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아르센이 사라진 일 때문에 에반이 발칸을 견제해서 젊은 인재를 죽이려 했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저 놈의 마법사 한 명 찾겠다고 카에라의 기사들은 마굿간의 건초더미까지 헤집어두고 갔다.
뿐만인가?
- 그 스승에 그 제자라 말씀하셨으니. 후작의 칼 솜씨가 어느 정도인지 저도 좀 알 것 같습니다.
아르센이 에반의 기사 열을 죽여놓는 바람에 앨런에게 평생 잊을 수 없을 치욕적인 말까지 들었다.
"아르센······ 헤르츠. 네 놈이 그 놈이구나."
바로 그 아르센 헤르츠가 제 발로 찾아 들어왔으니 에반은 당연히 너 이놈 잘 만났다 하며 검부터 집어들었다. 앞뒤 사정 구분 없이 저 놈 하나 죽여버리면 속은 시원하겠다 싶어서였다.
에반의 손에 들린 검이 웅웅 소리를 내는 것을 본 아르센이 손을 내밀었다. 마법을 쓰기 위함이 아니라 제 손에 끼워진 반지 하나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방해하게 되어 죄송합니다만. 제가 지금 마나실 경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일전에 칼리안이 끼고 다녔던 통신용 마법이 걸린 반지였다.
"혹시라도 제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곧바로 찾아오시겠다 전해달라 하십니다."
아르센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아르센은 지금 자신의 앞에 선 것이 누구인지 알고는 있는걸까 싶은 평온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
"후작께서도 마나실 경께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제가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안타깝게도 통신용 반지가 무엇인지는 에반도 잘 알았다. 그것이 에반의 검을 붙들었다. 결국 에반은 검에 불어넣었던 오러를 회수하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 능구렁이 같은 마법사 놈이······."
그러자 반지의 빛이 조금 더 진해지는가 싶더니 아르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예전에 들은 바 있던 말이라 식상하다 하십니다. 그래도 언제 한번 꼭 오시겠다고 전해달라십니다."
에반이 노기 가득한 얼굴로 아르센을 쳐다봤다.
지금 장난이나 칠 때인가 싶어서였는데 아르센의 얼굴 그 어디에서도 장난스러운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금 이 마법사는 소드마스터 앞에서 아주 진중하게 대화에 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정말로 자신의 욕설을 앨런에게 전한 것이다.
결국 에반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를 치다시피 말했다.
"왜 왔느냐! 그 용건이나 말하고 꺼지거라."
그러자 아르센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월요일 발칸 창단식이 있을 때까지 이 곳에 머무르라는 칼리안 왕자님의 명을 받아 왔습니다."
"······ 뭐라?"
닷새의 휴가가 끝나자마자 제 편 하나 없을 사지에 찾아오게 된 아르센은 할 말을 잃은 에반에게 설명을 덧붙였다.
"왕자님께서는 왕비께서 분명 제 거취를 빌미로 일을 꾸미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후작께 제가 몸을 의탁하고 있으면 거취에 대한 증명이 가장 확실할 것이므로 이 곳에서 이틀만 지내라 하셨습니다."
에반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일을 꾸민다니. 실리케가 무슨 일을 꾸민단 말이냐?"
그러자 아르센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말을 들었다는 얼굴이 되어 말했다.
"무슨 일인지를 아셨으면 왕자님께서 저를 이런 곳에 보내셨겠습니까."
"이런 곳이라니, 이런 건방진 놈을 보았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에반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실리케가 무슨 일을 꾸민다면 분명 발칸의 창단식 날이 맞기는 할 터였다. 거기까지는 에반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무슨 일을 꾸민다는 그 자체가 심히 마음에 걸렸다.
아르센의 입에서 다음 말이 나왔다.
"후작께서 이번에 칼리안 왕자님을 돕는다면 저를 해치려 했다는 소문에서는 벗어나실 수 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물론 플란츠 왕자님께 해가 될 일도 없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칼리안이 괜히 아르센을 에반의 저택에 보낸 것이 아니었다.
에반이 아르센을 해치려 했다는 누명이 사라져야 실리케가 기사들을 사주했다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상황에서 에반만큼 아르센의 거취를 정확히 보증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브리센이 아닌가.
브리센이 보증을 한다면 아무리 실리케라도 아르센을 더 몰아세우지 못하리라는 것이 칼리안의 생각이었다.
다만 그것은 칼리안에게만 이득이 큰 일이었다.
에반은 그깟 소문 하나 이기자고 아르센을 이틀이나 집에 묵게 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따라서 에반은 거절의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아르센의 말이 먼저 나왔다.
"그리고 도박장에 대한 비밀을 지키겠다 하셨습니다. 그 이상한 이름의 술집 3, 4층 말입니다."
물론 브리센과 관련하여 칼리안이 알고 있는 비밀은 더 많았다.
이를테면 레넌 브리센이 어디에 있는지 라거나 그레이가 무슨 일로 이 곳에 와서 무슨 일을 겪고 다시 돌아갔는지 라거나 혹은 플란츠가 이미 왕위에서 마음을 뗐다는 사실이라거나 더불어 아이샤 왕비의 사망 원인에 대한 의구심 같은 것들.
하지만 아르센의 이틀치 숙박비에 맞을 교환품은 이 정도였다. 좋지 않은 소문 그리고 도박장.
나머지는 칼리안이 사실을 알고 있음을 에반에게 들키기에는 너무 값이 비싼 것들이었다.
칼리안의 계산은 정확했다.
양대 기사가문 중 하나인 브리센 후작가의 가주가 도박장 운영이라니. 그 일은 절대로 공개되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결국 에반은 칼리안의 거래에 응하고 말았다.
도박장에 대한 정보를 칼리안이 함구하는 대신 자신의 기사들을 도륙낸 이 마법사를 이틀 동안 맡아주기로.
"······ 네 놈이 다른 기사들에게 공격당하는 것까지 참견하지는 않겠다. 그러니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없는 것처럼 있다 가도록."
"알겠습니다."
아르센은 그렇게 답했다.
그리고 당연히 없는 것처럼 지내지 않았다.
아르센이 에반의 집에 있었다는 사실을 에반만 알고 말 것이라면 뭐하러 목숨을 걸고 왔겠는가.
때문에 아르센은 기사들, 그것도 아르센이 자신의 동료를 죽였다며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는 기사들이 득시글한 그 곳에서 당당하게 마법사 로브를 걸쳐 입고 온 저택 안을 헤집고 다녔다.
그 와중에 몇 번 싸움이 있었으나 아르센은 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폭음이 들려올 그 즈음에는 온 저택의 사람들이 적어도 한 번은 아르센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에반은 실리케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불안해진 마음에 카렌과 라온 기사단장에게 실리케의 말을 듣지 말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것만으로는 불안이 가시지 않았으므로 월요일 오전에는 르메인을 찾아가 실리케를 축출하는것을 묵과할테니 실리케와 브리센 가문을 연관짓지 않도록 해달라는 말도 했다.
그 후 저택까지 잘 간 뒤에 카이리스 왕궁에서 터져나온 폭음을 들었다. 때문에 다시 왕궁으로 온 상태였다.
자신의 딸에게 가장 큰 독이 될, 아르센 헤르츠라는 그 마법사와 함께.
* * *
사실 칼리안은 정말 많은 생각을 했었다.
실리케가 어떻게 일을 벌일지를 예측하기 위해서였다.
칼리안이 실리케를 만나러 갔던 날.
밖에서 칼리안을 기다리던 시종이 무슨 짓을 꾸몄다는 말을 할까봐 얀도 데려가지 않고 실리케를 혼자 만났다.
그만큼 가능한 많은 경우의 수를 두고 생각을 했다.
그 중 하나가 아르센이었을 뿐이다.
마력탄까지 써 가며 헤이시아 궁에 폭발 사고를 일으킬 정도로 막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아르센을 빌미로 암살을 시도했다는 누명을 씌우지 않을까 하는 예상까지는 했다. 그래서 대비를 했다.
그리고 실리케는 아르센이라는 미끼를 덥썩 물었다.
이제 그 낚싯줄을 힘껏 당길 차례였다.
칼리안이 한번 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제 막 들어와 왕자들의 곁에 앉아 있던 르메인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 뚜벅, 뚜벅.
고요한 가운데 칼리안의 구두 소리가 울려퍼졌다.
르메인을 포함한 많은 이들의 이목이 칼리안에게 집중됐다. 때문에 칼리안의 목소리도 모두에게 들렸다.
"전하."
칼리안은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 가며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수많은 이들이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헤이시아 궁의 사고를 조사해 주십시오."
제 손으로 마력탄을 터뜨리고 그것으로 칼리안을 내치려 했던 것을 밝혀달라고.
그리하여 실리케가 절대로 견디지 못할 시간을 만들어달라고.
그렇게 말했다.
르메인의 눈이 잠시 플란츠에게 가 닿았다.
플란츠는 아무 말 없이 르메인의 시선을 받기만 했다.
곧 르메인의 입이 열렸다.
"그리하겠다."
* * *
가장 먼저 확인된 것은 아르센에 대한 사실이었다.
실리케의 부친이기도 한 에반이 아르센의 거취를 보증했다. 사고가 있던 당시 아르센이 에반의 집에 있던 것을 본 눈이 너무 많아서 의혹의 여지조차 없었다.
실리케가 그렇게 애써 만든 덫이 너무 쉽게 벗겨졌다.
"섣부른 말을 삼가시라고, 그리 말씀을 드렸는데."
실리케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칼리안의 말에 실리케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실리케는 분명 아르센을 보았다 했다. 칼리안에게 그 마법사를 당장 데려오라 소리쳤다. 그 마법사가 모든 일의 범인이라 했다.
헌데 아니었다.
심지어 아르센은 오히려 실리케가 파벨의 기사들을 사주하여 자신을 공격하게 했다는 말을 했다.
애초에 아르센을 죽이려 한 것이 에반이 아닌 실리케라는 말에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장내를 가득 채웠다.
그러던 중 시종장 라울이 르메인의 곁으로 와 무언가를 알렸다. 이야기를 들은 르메인이 저도 모르게 침통한 소리를 냈다.
"실리케."
르메인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장내의 소란을 가라앉혔다.
"폭발에서 한 명이 죽고 한 명이 크게 다쳤다."
시녀가 죽었다.
기사단장은 크게 다쳤다.
실리케가 고개를 들었고 플란츠는 고개를 숙였다.
실리케는 누군가 살았다는 말 때문에, 그리고 플란츠는 누군가 또 죽었다는 말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뉘우치지 않을 생각인가."
르메인이 다시 물었고 실리케는 대답하지 않았다.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실리케의 뒤에 있던 시녀장을 봤다. 그 시선을 느낀 시녀장이 눈을 꼭 감았다.
그녀는 이 곳에 오기 전부터도 얼굴이 창백했다. 떨리는 손을 감추려 하고 있었다.
그것을 주시해왔던 칼리안이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무조건 따르기만 해서는 바로잡을 수 없다. 감싸는 것만이 네 길인 것은 아니니라."
생각해보라.
얀은 칼리안에게 욕도 했다.
이 얼마나 바람직한 시종의 모습이란 말인가?
그 때를 생각한 칼리안의 얼굴에 아주 잠깐 미소가 스쳤다.
그리고 실리케가 그 미소를 보았다.
"그래. 참으로 많이 닮았구나."
실리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같았다.
아무 위협도 되지 않는 옛 칼리안에게 어떻게든 끈질기게 손을 뻗어 죽여버렸던 칼리안의 존재 자체를 혐오하던 여자였다.
"네 어미도······ 마지막까지 그리 웃었다."
칼리안이 프레이야를 닮았으니까.
너무 많이 닮았으니까.
기사가 깨어나든, 시녀장의 입이 열리든.
에반까지 완전히 돌아섰으니 어차피 실리케는 이제 더 이상 왕비일 수 없었다. 실리케가 그것을 가장 잘 알았다.
그리하여 실리케는 칼리안에게 달려들었다.
어느새 그 손에는 숨겨두었던 비수가 들려 있었다.
그것을.
칼리안과,
앨런과 키리에와.
······ 플란츠가 보았다.
* * *
끼어들지 말라고.
무슨 일이 생겨도 끼어들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 * *
빌헬름 관의 하얀 대리석 바닥에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도 소리내지 못했다.
르메인이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란델의 눈이 크게 벌어져 있었다.
실리케는 칼리안에게 비수를 휘둘렀다.
그녀의 비수가 누군가의 가슴을 길게 베며 깊이 파고들었다.
실리케가 칼리안에게 한 발을 떼었을 그 때 칼리안에게는 이미 앨런의 실드가 씌워져 있었다.
사실 그렇게 튼튼한 6서클짜리 실드가 없어도 평생 칼 한번 휘둘러보지 않은 그 움직임은 지나치게 느렸다. 굳이 칼리안이 손을 쓸 필요조차 없을 만큼 느렸다.
그러므로 칼리안은 완벽하게 안전했다.
그 똑똑한 플란츠가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러니 플란츠는, 일부러 달려든 것이다.
실리케의 비명소리가 정적을 깼다.
청포도 빛의 아름다운 드레스에 핏물이 스몄다.
아무도 그 소리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비수와 함께 잘려나간 실리케의 아름다운 손에도 신경을 쓰지 못했다. 길게 베이다 간신히 심장 앞에서 멈춘 플란츠의 깊은 상처에도 신경을 쓰지 못했다.
죽겠다고 달려든 원수같은 놈 살리겠다고.
제 스승이 씌워준 실드를 깨기 위해 만들어 낸.
투명한 검에 어린 푸른 오러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