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80화 (81/527)

제16장. 내가, 당신에게 (4)

왕족은 자신의 이름을 직접 입에 올리지 않는다.

빈민보다도 못한 삶을 살았던 키리에도 그 정도는 알았다.

그런데도 '내가 칼리안' 이라니.

분명 의도한 말이겠지만 자세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모두들 일단 고개를 숙이며 입부터 열었다.

"저는 헤밀란 토르카입니다."

"카인 세르트입니다 왕자님."

운좋게 칼리안에게 먼저 인사를 했던 아이즌을 제외한 남은 열 명의 사람들이 이렇듯 매우 서둘러가며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는 웃지 못할 광경이 잠시 펼쳐졌다.

그 모습을 보는 칼리안의 얼굴에는 어떻게 보면 장난기가 짙은 듯 하면서 또 어떻게 보면 자신감이 가득해보이는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칼리안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단박에 눈치 챈 얀은 눈에 띄지 않게 웃었다.

오래 전 르메인의 탄신 기념일에서 사람들의 앞에 나서기 전 칼리안이 농담처럼 했던 말이 함께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들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 같던데. 아 '그' 칼리안!'

그 때는 '그'에 포함된 의미가 결코 좋지 않았었다. 나약한, 겁 많은, 힘 없는 등등의 수식어가 칼리안의 이름 앞에 항상 붙어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도 칼리안을 '그' 칼리안이라고 불렀다. '그'에 들어가는 말들은 이제 완전히 바뀌었지만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 만큼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과장된 평가도 많았다.

- 내가, 칼리안입니다.

그러니 이 인사는 당신들 머릿속의 '그' 칼리안이 아니라 당신들 앞에 서 있는 내가 진짜 칼리안이라는 뜻을 담아 건넨 말인 것이다.

칼리안이 어떤 사람인지는 직접 보여줄테니 칼리안에게 선물을 보낼 결심을 하게 했던 기대감과 선입견은 일단 다 버리라는 소리다.

그러니 이보다 자신만만한 인사가 또 어디 있을까.

인사를 마치고 고개를 든 이들이 칼리안의 얼굴에 나타나 있던 미소를 보았다. 그리하여 칼리안의 인사에 담긴 뜻을 이해한 몇몇은 마주 웃었고 또 몇몇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웃고 있는 이들을 쳐다봤다.

자신을 따르겠다고 먼저 알려온 이들에게 칼리안은 이렇게 평생 잊지 못할 첫인상을 심어주었다.

* * *

르메인이 조금 걱정스럽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바로 옆에 있는 앨런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이것이 정말 왕자들을 위한 일이 맞을지 모르겠군."

바로 며칠 전 앨런이 했던 것과 아주 비슷한 말이었다.

앨런은 그때 르메인이 대꾸한 것을 따라하며 '배부른 소리를 하시는군요.' 등으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다른 귀족들이 함께 있었던 탓이다.

"충분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답한 앨런이 적당히 활을 들어올려 멀리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새를 향해 쏘았다. 마법사의 손에 들린 활이라니 참으로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팅!' 하는 힘 빠진 소리를 내고 날아간 화살은 새가 앉은 나무의 근처에도 못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새를 잡기에는 지나치게 부족한 활 솜씨에 르메인이 피식 웃었다. 르메인이 웃는 것을 본 귀족들은 놀랐고 앨런은 툴툴거렸다.

"그리 웃지 마시지요. 마법사는 마법이나 잘 쓰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런 말이 끝났을 바로 그 때였다.

방금 전까지 나무 위에 있던 새가 갑자기 작은 울음소리를 길게 내더니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죽은 것이다.

그것을 본 귀족들의 눈이 르메인의 웃음을 보았을 때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의 크기로 벌어졌다.

다만 르메인만은 그리 놀라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마법으로 사냥을 해도 된다는 규칙이 없으니 저것은 무효로 보아야겠는데."

"마법으로 사냥을 하면 안 된다는 규칙도 없으니 유효한 것으로 보아 주시면 안되겠는지요."

둘은 지금 가벼운 말싸움이나 나누고 있었으나 함께 있던 귀족들은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새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르메인이 '마법'임을 말한 뒤에야 앨런이 무엇인가 수를 썼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무 소리도 아무 기척도 없었다.

심지어 앨런은 아까부터 계속 르메인을 보던 채였다.

이 자리에 선 이들은 모두 브리센과 동맹 관계에 있는 기사 가문의 귀족들이었다. 즉 칼리안이 지금 만나고 있는 귀족들과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는 이들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곧 이들 역시 검을 꽤 잘 다루는 사람들이라는 뜻도 되었다. 에반 브리센 후작만큼은 아닐지라도 모두들 무력에 대한 제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런의 화살이 날아가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저것이 나에게 날아왔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한 귀족들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물론 이 곳에 모인 이들의 놀라움에는 관심이 없던 르메인은 앨런을 보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유효로 본다니 안 될 일이지."

그러더니 숲을 둘러보는 듯 혹은 브리센 편의 귀족들을 노려보는 듯 알 수 없는 묘한 눈빛으로 주변을 한 번 훑어보고는 말을 이었다.

"경은 이 곳에 있는 전부를 사냥할 셈인가."

그 말을 들은 귀족들의 입에서는 숨 들이키는 소리가 났고 앨런의 입에서는 짧은 웃음 소리가 났다.

곧 앨런의 날카로운 눈이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어냈다. 그런 그의 가느다란 입술 사이로 차디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 큰 나무에 보란듯이 앉아 있으니."

또 한 마리의 새가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새의 마지막 울음을 뒤로 하고 들려오는 앨런의 말이 모두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졌다.

"······ 못 잡을 것이 있겠습니까."

명백한 협박이었다.

* * *

르메인과 앨런이 환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며 브리센 측의 귀족들을 압박하는 사이, 칼리안과 함께 있는 이들은 소풍같은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 피잉!

칼리안의 손을 떠난 화살이 가벼운 파공음을 냈다.

화살은 방금 날아오른 새의 목을 거침 없이 꿰뚫었다.

활을 한 번 쏠 때마다 어김없이 한 마리가 죽었다.

어차피 사냥은 목적이 아니었으나 적당히 구색은 맞추어야 했으므로 칼리안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 새들을 몇 마리 잡고 있었다.

칼리안의 활솜씨가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던 탓에 날개를 펼친 새가 바닥으로 떨어져내리는 모습을 본 이들의 입에서 이번에도 작은 탄성이 터졌다. 물론 그들 중에는 얀도 있었다.

"키리에. 왕자님께 활도 가르쳐드린 겁니까?"

그 말을 들은 키리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칼리안이 활을 다룰 줄 안다는 사실을 얀에게 말하지 않았었다는 것에 놀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심하지 않는 얀의 둔함에 놀랐다.

아무튼 키리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궁 안에서 칼리안에게 활을 가르칠 수 있을 만한 이는 키리에밖에 없었으니까.

"네······ 제가 알려드렸습니다."

이렇게 말한 키리에는 말 안장에 매인 활을 잠시 쳐다봤다. 그리고 오늘은 절대로 활을 들지 말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검은 다뤄봤지만 아직 활은 한 번도 손에 들어보지 못했던 까닭이다.

키리에의 대답을 들은 얀이 뿌듯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우리 왕자님은 무기를 다루는 것에 소질이 조금 있으신가봐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이다.

덕분에 주변에 있던 이들은 다소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 소질 조금만 더 있었으면 아주 큰일이 났겠다 싶어서였다.

"네. 배움이 매우 빠르십니다."

그리고 하프엘프 키리에는 이제 완벽할만큼 능숙해진 거짓말을 입 밖에 내며 얀의 둔함을 응원했다.

이들의 조금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웃던 칼리안이 옆을 쳐다봤다. 그 방향에 있던 아이즌이 칼리안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에이프린 백작."

"네 왕자님."

"보내주신 쿠키, 왜 호밀이었습니까."

조금 맥락 없는 질문이기는 했으나 칼리안은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중이었다.

카이리스의 귀족들은 호밀을 먹지 않았다.

물론 칼리안이나 앨런은 그렇지 않았으나 얀은 쿠키가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먹지 않았었다.

얀이 그럴 정도면 다른 귀족들은 볼 것도 없지 않은가.

다만 호밀은 밀보다 영양이 더 좋고 값이 훨씬 저렴했다. 때문에 평민들에게 있어서는 없어선 안 될 식재료였다. 그러니 나라에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정작 귀족들은 입에 대지도 않는 독특한 작물이 바로 호밀인 것이다.

"그것이 내내 궁금했습니다. 왜 하필 호밀일까. 백작 씩이나 되서 왕자에게 평민의 생활을 보여주겠다는 감성적인 이유는 아닐텐데."

칼리안의 질문을 받은 아이즌이 굉장히 조심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것을 보낸 뒤에 혹시라도 다른 이유가 있다고 오해를 하실까 후회와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혹시, 내 어머니에 대한 조롱의 의미로 받아들일까봐 걱정했다는 말입니까. 내 어머니께서는 호밀을 먹는 평민이었으니."

숨김 없이 물어오는 칼리안의 말에 아이즌이 어쩔 줄을 몰라하며 고개를 숙였다.

"만약 그런 생각을 하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왕자님.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오해는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런 의미가 맞았다 하더라도 내 환심을 사긴 했을 겁니다."

그렇게 정성스러운 조롱이라니.

칼리안이라면 모르긴 몰라도 보낸 이의 얼굴을 한 번 보아야 되겠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내 어머니의 출신에 대해서는 아예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듯해서 나에게는 오히려 반가운 선물이었습니다."

그렇게 솔직한 감상을 전한 칼리안이 다시 아이즌을 쳐다봤다.

"그러니 이제 호밀의 이유를 좀 알려줬으면 좋겠습니다. 많이 궁금했던 터라."

아이즌이 다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밀도 좋지만 호밀도 필요하다는 의미로 보내드린 것입니다."

"밀도 좋지만 호밀도 필요하다······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은 마치 어려운 문제를 풀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더 강력한 마법사들도 좋지만 덜 강력해도 그 수가 월등한 기사들도 없으면 안된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간 칼리안이 마법사 위주로 세력을 불려나가니 이제 기사들도 좀 봐달라는 뜻에서 보낸 선물이라는 소리였다.

"내가 만약 먹지 않고 돌려보냈다면 백작은 지금 이 자리에도 나오지 않았겠군요."

"죄송합니다, 왕자님."

아이즌이 민망해하는 얼굴을 했다.

호밀 쿠키 하나로 시험을 해 봤다.

오히려 아이즌이, 칼리안을.

아이즌을 보던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멜피르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든 탓이다. 말 목걸이를 보내서 칼리안의 의중을 떠보려 했던 그 모습과 참으로 닮았다.

"선물로는 깨닫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같은 것을 생각했으니, 내가 백작의 문제를 비슷하게나마 맞혔다고 쳐 주면 안되겠습니까?"

칼리안이 이렇게 물었고 아이즌은 더 대답하지도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그런 아이즌을 가만히 보던 칼리안이 레이븐을 살짝 움직여 조금 더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반대편으로 돌아서 섰다. 그러자 칼리안이 홀로 귀족들을 마주보고 선 모양새가 되었다.

"맑은 날 '밖'에 나온 김에 전할 말이 있습니다."

모두를 앞에 둔 칼리안이 가벼운 말투로 이렇게 입을 열었다.

"내가 곧 사냥을 할 겁니다. 물론 여기 있는 분들과 함께."

이미 사냥대회가 시작된 지 한참이었다.

이제와서 이 자리에서의 사냥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눈치가 있든 없든 잘 알아들은 듯 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독수리도 아니고 사자도 아닌 그런 사냥감은 나도 처음 잡아보는 것이라. 다들 관심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이번에는 모두가 웃었다.

모두의 머리에 브리센의 문장 속 그리핀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하나같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므로 칼리안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웃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린 칼리안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원금을 보내겠습니다."

당장 이들에게 칼리안이 줄 수 있는 도움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다시 불어나고 있는 자금 뿐이다. 그리고 자금은 이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기도 할 터였다.

"눈에 띄지 않게 본래 하던 일을 조금만 더 열심히 해주면 됩니다. 나는 에이프린 백작을 통해 연락을 취할테니 주기적으로 서로 교류하기를 바랍니다."

그 말에 모두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그들을 다시 한번 살펴본 칼리안이 낮지만 위엄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다음에는 '안'에서 만나게 되겠군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카이리스 왕궁, 그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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