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79화 (80/527)

제16장. 내가, 당신에게 (3)

칼리안이 제 자리에 선 채 가만히 눈을 내리떴다.

얀은 칼리안이 생각할 것이 많을 때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무엇 때문에 그리 깊은 생각에 빠졌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얀은 칼리안의 생각이 끝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그렇게 말 없이 서 있는 시간이 하염없이 늘어났다.

그러자 칼리안에게 깊은 상념을 준 무언가가 다시 움직이며 소리를 냈다.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님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아!"

꾸물럭거리는 느린 춤을 추며 발랄한 노래를 부르는 석상을 본 칼리안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웃음을 참고 있었다.

방금 전 칼리안은 실리케와 대면을 했다는 것과 아이샤의 죽음 뒤에 실리케가 있는 것 같으니 확인이 필요하다는 말을 르메인에게 전했다. 플란츠와 손을 잡았다는 것도 자신이 플란츠에게 얼마나 냉정한 말을 했는지도 모두 르메인에게 풀어놓았다.

그런 칼리안의 말을 모두 들은 르메인은 미안한 것이 많다 대답했다.

르메인의 사과 덕에 더더욱 가라앉은 기분을 한 채로 앨런의 저택까지 온 길이었다. '밖'에서 만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더니 앨런의 저택 현관 앞에 세워져 있던 석상이 갑자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미치겠네."

간신히 웃음을 참아낸 칼리안이 이렇게 말하자 지금껏 칼리안의 기분에 맞춰주느라 함께 웃음을 참고 있던 얀이 입술을 씰룩이며 말했다.

"저도 이거 처음 봤을 때 똑같은 말 했었어요."

"네가 언제 스승님 댁에 왔었나?"

그런 칼리안의 질문에 얀이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다른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지금 그들은 왕궁 밖에 있었다.

앨런의 마차를 타고 남몰래 밖에 나온 길이었으므로 얀은 시종의 옷차림도 아니었다.

그래서 얀은 잠시 시로이안 지그프리드가 되어 대답했다.

"어떤 분이 독 차가 싫다고 독약을 처드셨던 날에요."

그 날의 일에 대해 쌓인 것이 누구보다 많은 얀이었으니까.

옆에 있던 앨런은 그런 얀의 심정에 깊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뒤에 서 있던 키리에가 작게 웃는 소리를 냈다.

앨런과 아르센에 이어 이제는 얀에게까지 욕을 얻어먹은 칼리안이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으니.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님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아!"

결국은 칼리안의 웃음보가 터져버렸다.

"이렇게나 마음에 들어하시니 왕자님 방 앞에도 하나 놓아드리겠습니다."

"아뇨.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스승님."

칼리안이 급히 손사래를 치며 발을 옮겼다.

그렇게 간신히 들어간 앨런의 집 안에는 이미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베로니카는 점심 식사를 준비중이었고 폴룬 마법 학원의 이사장이기도 한 멜피르와 그 마법 학원의 교장이기도 한 에우리아가 학원의 운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바로 옆에서 아르센이 베로니카의 마법 학원 과제를 해주고 있었다.

"무료한 마음에 제가 먼저 도와주겠다 했습니다, 왕자님."

마법학원 이사장과 교장 옆에서 학생의 과제를 마음대로 해주고 있던 아르센이 마법학원의 실질적인 주인인 칼리안을 보며 그렇게 변명같은 설명을 했다. 칼리안은 그 말을 반쯤만 믿기로 했다.

그렇게 모인 이들이 함께 점심식사를 마친 뒤 칼리안과 아르센 그리고 멜피르와 에우리아가 응접실 테이블에 빙 둘러 앉았다.

"내가 없는 동안 다들 고생이 많으셨다 들었습니다."

카이리시스 밖에 나섰던 칼리안도 이런저런 일들을 꽤 많이 겪기는 했으나 안에 있던 이들 역시 한가하지 못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칼리안이 벌여놓고 간 일들 때문이었다.

칼리안은 더 이상 동글동글하지 않은 멜피르의 얼굴을 보며 정말 미안해했다. 제대로 쉬지 못해 그새 많이 홀쭉해진 것이다.

"레딩턴 자작이 도착했습니다, 왕자님. 좋은 분을 보내주시어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제 좀 여유가 생겼습니다."

애초에 바빠진 것이 칼리안 탓이었으나 멜피르는 이렇게 칼리안을 배려하는 말을 했다.

고개를 끄덕여 멜피르의 감사 인사에 화답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번 사냥 대회에서 기사 세력을 가진 귀족들을 만나 볼 생각입니다. 브리센의 기사들을 대신할 세력이 있는지 찾아봐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서요."

그 말과 함께 얀이 멜피르와 에우리아의 앞에 종이 한 장씩을 건넸다. 그것은 바로 칼리안에게 선물을 보낸 기사 가문 귀족들의 명단이었다.

칼리안은 종이 안에 적힌 이들을 쭉 훑어 내려가는 둘을 보며 말을 이었다.

"폴룬 남작."

"네, 왕자님."

칼리안의 손이 종이를 가리켜보였다.

"그들 중 남작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신용하기 어려운 이들을 골라내 주시면 됩니다."

상단을 운영하면서 각 귀족 가문들과도 수많은 거래를 해왔던 멜피르가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듯 대답했다.

"네. 확인해보겠습니다."

그 후 칼리안이 에우리아를 쳐다봤다.

마법사 협회장이나 마법학원의 교장이 아닌 정보조직 보스인 에우리아의 거름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에우리아는 칼리안이 따로 말을 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브리센에 대해 조사했던 내용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브리센과 연관이 있는 이들을 명단에서 제외시켜 놓겠습니다."

칼리안이 믿음직스럽다는 눈으로 둘을 보며 고마움을 전했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칼리안이 직접 한명 한명 만나가며 판단해나가는 것이었으나 운신이 자유롭지 않은 칼리안은 그렇게 많은 이들을 일일이 대면하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멜피르와 에우리아의 눈과 귀를 빌리려는 참이었다.

첫 번째로 얀이 걸러낸 이들 중 멜피르와 에우리아의 손까지 거친다면 꽤 믿을만한 이들만 남을 것은 분명했다. 완벽하게 걸러지지는 못해도 괜찮았다.

'어차피 내가 마음 놓고 신용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전부이니.'

칼리안의 최측근인 앨런 얀 키리에. 그리고 아르센.

칼리안이 완전히 등을 맡길 수 있을 사람들이다.

그보다 조금 넓은 범위에는 지금 눈 앞에 있는 멜피르와 에우리아 그리고 르메인과 슬레이만이 있었다. 이들까지는 칼리안이 속내를 드러내고 대해도 괜찮을 터였다.

그리고 이제부터 만나게 될 귀족들은 앞서 언급한 이들보다 조금 더 먼 범위 안에 속하게 된다. 누구든 언제든지 칼리안으로부터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고 손을 잡아야 할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완벽히 걸러지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저녁까지는 여기에 있을테니 그때까지 알려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아르센을 쳐다봤다. 칼리안의 눈이 긴 호선을 그렸다.

"헤르츠 경. 닷새 정도면 푹 쉬는 것이라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심심함을 참지 못하고 베로니카의 과제를 해준 아르센이 이제 다시 바빠지리라는 것을 예감하고는 씩 웃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마법학원의 과제보다는 재미가 있으리라.

"네 왕자님. 충분합니다."

칼리안이 아르센과 비슷한 얼굴로 마주 웃었다.

* * *

아침부터 멜피르 폴룬이 선물을 보내왔다.

그가 보낸 선물은 이번에도 칼리안의 허를 찔렀다.

아주 특별한 선물이 도착했다는 말에 조찬을 마치자마자 밖으로 나온 칼리안은 체르밀 궁 앞에 있는 커다란 두 마리와 작은 한 마리를 보며 또 웃고 말았다.

"하여튼 폴룬 남작."

칼리안의 귀환도 축하하고 마음에 쏙 드는 테시드 레딩턴이라는 인재를 보내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보내온 선물이었다.

멜피르가 처음 칼리안에게 보냈던 선물은 레이븐의 목걸이였다. 아직도 채워 줄 엄두를 못 내고 있는, 칼리안이 가진 그 어떤 장신구보다 비싼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선물 역시 칼리안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덕분에 얀의 입이 귀에 걸렸다. 키리에는 티는 내지 않았지만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건지."

'커다란 두 마리'는 무려 레이븐의 형제 말이었다.

브리센 상단을 인수하면서 처음 플란츠에게 레이븐을 보냈던 마주와도 계약을 한 듯 했다.

한 마리는 옅은 갈색 또 한 마리는 짙은 갈색이었는데 각각 얀과 키리에를 위한 선물이었다. 재밌는 사실은 두 마리 모두 순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 대체 레이븐은 왜 혼자 그모양인지.

"저 짙은 색 말이 원래 플란츠 왕자에게 보내려던 녀석이었대요. 플란츠 왕자가 하도 레이븐을 마음에 들어해서 어쩔 수 없이 레이븐을 보냈다고 하더라고요."

얀의 말을 들은 칼리안이 볼을 긁적였다. 플란츠는 그런 말을 고스란히 칼리안에게 빼앗겼다는 소리니까.

공교롭게도 그 날 플란츠가 던진 칼 때문에 손을 다쳤었으니 칼리안은 미안해하는 대신 그냥 그에 대한 보상이었던 셈 치기로 했다.

아무튼 얀이나 키리에나 이제 왕궁 밖에 나갈 일이 많아 슬슬 말을 한 마리씩 마련해줄까 했으니 아주 잘 된 일이었다.

"오늘 사냥에 바로 타고 나가면 되겠네."

때문에 이렇게 말하며 얀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말을 받는 것을 허락한 칼리안이 이번에는 '작은 한 마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새를 사줄까, 개를 사줄까 했더니."

멜피르를 만난 칼리안은 키리에의 동생이 왕궁에서 키울 만한 동물을 상단에서 판매하고 있는지를 물어봤었다. 어쨌거나 히나에게 약속을 했었으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선물로 보내온 모양이었다.

푸른 색과 갈색의 오드아이를 가진 은백색의 새끼 고양이였다. 언뜻 보면 히나의 머리색과 비슷하고 키리에의 눈을 꽤 닮았다. 그 짧은 사이에 어떻게 찾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폴룬 남작은 여러모로 비범하네요."

칼리안이 얀의 감상에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옹거리는 새끼 고양이를 보며 가장 좋아한 것은 당연히 선물의 주인인 히나였다. 그 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고양이를 안아올려 히나에게 건넸다.

"고양이는 체르밀에 있어도 되니까. 잘 키우도록 해."

히나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언제나 느끼지만 보는 이들의 복잡했던 마음을 전부 잊게 만들어주는 웃음이다.

"폴룬 남작에게 잘 받겠다고 전해줘."

"네 왕자님."

그나저나 멜피르.

처음에는 칼리안이 아끼는 말을 위한 선물을 주더니 이번에는 칼리안이 아끼는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보냈다.

"남작이 내 선물을 보내 줄 날이 오긴 오려나."

정작 멜피르에게 아무것도 받지 못한 칼리안이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튼 멜피르는 재밌는 사람이다.

* * *

비는 이미 그쳤다.

늦가을 날씨는 아주 좋았고 사냥대회는 취소되지 않았다.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왕자님. 아이즌 에이프린입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만났다.

사냥대회는 몇몇 귀족들이 한 조를 이루어 가장 많은 사냥감을 잡는 이들에게 우승 상품을 주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앞서 얀은 멜피르와 에우리아가 말한 이들을 제외한 최종 명단을 칼리안에게 정리해줬었다. 서른 명 가까이 되던 귀족들은 세 명의 거름을 거쳐 어느새 열 한 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각자의 기사들과 마법사단이 모이면 브리센 그리고 브리센과 우호 관계에 있는 귀족들의 병력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힘을 낼 터였다.

칼리안은 바로 그 명단을 르메인에게 전달했다. 그리하여 명단에 적혀있던 인물들은 모두 칼리안과 한 조로 묶이게 되었다.

시큼 텁텁한 호밀 쿠키를 한가득 보낸 에이프린 백작을 보며 칼리안이 호감 가득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쿠키가 아주 맛있더군요.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 모인 다른 열 명의 눈을 하나하나 들여다 본 칼리안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칼리안을 마주 쳐다보는 귀족들의 눈빛은 단순히 사냥대회에 참석하러 온 이들의 것과는 달랐다.

"반갑습니다."

지금의 자리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한 조에 참여하게 된 다른 이들의 면면을 보며 알았으리라.

칼리안이 이제 브리센과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하리라는 것을.

"내가, 칼리안입니다."

그리하여 칼리안은 이렇게 두 번째로 자신의 이름을 먼저 알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