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78화 (79/527)

제16장. 내가, 당신에게 (2)

칼리안과 실리케가 대면하던 시간.

에반 브리센 후작이 매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꽉 쥔 주먹에서 한 방울의 피가 뚝, 떨어졌다.

하룻밤.

그는 꼬박 하룻밤 동안 자신의 침실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어제 왕궁에서 앨런과의 일전을 치르고 그 와중에 실리케의 배신을 알게 된 에반이었다. 때문에 에반은 매우 예민해진 상태로 저택에 돌아왔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화를 다스리며 하루를 보내던 중 르메인이 보낸 이들이 저택을 찾았다.

바로 국왕 친위대인 카에라였다.

'하필 카에라를 보내다니.'

사실 에반은 왕궁의 기사들이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썩 좋은 기분이 들지는 않았었다. 다른 이들도 아닌 카에라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르메인을 두고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그 누군가가 국왕의 안위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는 자일 때 뿐이었으니까.

그러니 르메인이 아르센을 찾겠다며 카에라를 보냈다는 것은 발칸 부군단장의 실종이 르메인의 안위와 연결된다고 생각한다는 말과도 같았다. 아직 정식으로 창단되지도 않은 발칸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기도 했다.

'분명히 보여주기 식 방문일테지.'

즉 르메인은 이번에 에반의 집을 조사하라며 카에라의 기사를 보내는 행동을 통해 발칸이 누구를 위해 만들어진 어떤 목적의 군대인지를 널리 알리려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계획적인 움직임에 자신이 쓰였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카에라의 방문이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저택을 수색하라는 왕명을 받고 왔습니다."

에반의 앞에 선 기사.

카에라의 기사단장인 렌 아드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렌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말하지 않았다.

에반을 향해 예를 보이지도 않았다.

에반은 렌이 언제 이런 모습을 보이는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노기 어린 목소리를 냈다.

"네 놈.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죄인 취급인 것이냐."

범죄자 그것도 카에라가 직접 움직여야 할 만큼 르메인에게 큰 피해를 입힌 범죄자를 대할 때의 표정을 한 렌이 짧은 대답을 전했다.

"왕명, 입니다."

이런 분위기를 내는 것은 비단 렌 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기사들도 모두 완전히 무장하고 있었고 표정들이 하나같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제야 에반은 자신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음을 깨달았다.

카에라의 방문은 '보여주기 식'이 아니었다는 것을.

기껏해야 자신을 찾아와 몇 마디 묻고 갈 것이라 생각을 했건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곧 렌이 기사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에반의 허락은 구하지도 않았다.

렌의 손짓을 따라 기사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명 이들은 아르센 헤르츠라는 마법사를 찾으러 왔을 텐데 기사들은 마치 사람이 아니라 작은 동전이라도 찾으러 온 것처럼 온 저택을 뒤져나갔다.

결국 더 참지 못한 에반이 노호성을 터뜨렸다.

"내가 그 마법사를 이 곳에 숨겨두기라도 했다는 말이더냐!"

에반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보면서도 렌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대신 여전히 무감정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방으로 들어가 기다리십시오."

그 한 마디와 함께 렌의 뒤에 서 있던 기사들 중 두 명이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에반을 침실로 안내했다. 에반은 당장 검을 들어 그들을 베지 않기 위해 인내해야 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상황에 에반이 가장 먼저 생각한 이가 르메인이 아닌 실리케였다는 사실이었다.

실리케가 그레이와 손을 잡았기 때문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해괴한 소문에 자신이 얽혔기 때문에.

실리케가 배신을 했기 때문에.

카에라의 기사들에게 이런 취급을 받고도 칼 한번 휘두르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늘 일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실리케."

에반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이를 갈았다.

수색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끝났다.

에반의 저택이 워낙 컸고 카에라의 수색이 상상 이상으로 꼼꼼했던 탓이었다.

그나마 에반에게 있어 한 가지 다행이었던 일은 레넌을 숨긴 곳은 들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수 장치로 잘 숨겨두었던 지하실 입구는 발견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상 없는 것 확인했습니다. 쉬십시오."

렌은 이런 짧은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기사들이 떠난 후 에반에게 남겨진 것은 어질러진 저택, 그리고 분노였다.

* * *

에반이 한참 화를 내고 있던 바로 그 시간.

뚱한 얼굴로 창 밖을 보던 앨런이 입을 열었다.

"이것이 정말 저를 위한 일이 맞을는지요?"

그리고는 붉게 충혈된 눈을 부비적거리며 긴 하품을 했다. 갈수록 방만해지는 앨런의 태도에 잠시 혀를 찬 르메인이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안경을 찾아 쓰며 대답했다.

"배부른 소리를 하는군."

그렇게 말하며 서류를 하나 집어들고 읽어내려가기 시작하는 르메인을 향해 앨런의 대꾸가 이어졌다.

"도무지 올 생각을 않으니 의심을 하는 것이지요."

"아드리안 경이 꼼꼼한 성격이기는 하지."

지금 앨런은 카에라의 기사단장인 렌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렌이 빨리 와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꼼꼼한 것이 아니라 오다가다 죽은 것이 아닌지를 걱정해야 할 판이 아닙니까?"

전날 오후. 자신의 집무실에서 얌전히 일을 하고 있던 앨런은 르메인의 집무실 주변을 구석구석 호위하던 기사들이 반 이상 쑥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때문에 깜짝 놀라 르메인의 집무실로 찾아가니 태평한 얼굴의 르메인이 이런 말을 했다.

"카에라를 내보냈으니 올 때까지 내 뒤를 부탁하지."

아들의 교육을 위해 찾아온 사람에게 자신의 업무를 계속 넘겨주더니 이제는 시시때때로 호위까지 맡기려는 르메인에게 앨런이 넌지시 물었다.

"이번에는 전하께서 후작의 집을 부술 요량이십니까?"

"수색이라 설명을 하였는데."

"하셨지요. 그런데 그 수가 누군가의 집을 수색하겠다는 인원이라기보다는 부수겠다는 인원이니 하는 소리 아닙니까."

"경고의 의미를 담은 수색이지. 마찰이 있을까 우려되기도 하고. 그러다 좀 부서지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겠나."

앨런이 웃었다.

"전하께서 누군가에게 화풀이도 할 줄 아시는 분이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제 알았겠군."

물론 렌은 모르고 출발했지만 아르센은 여전히 앨런의 집에서 유유자적 노닐고 있었다. 다만 외부에는 아르센이 실종 상태였으므로 처음 르메인은 아르센을 찾는 척 적당히 장단만 맞춰 줄 생각이었다.

그러다 카에라가 출발하기 조금 전에 마음을 바꾸어 그렇게 많은 인원을 보내 후작의 집을 아예 샅샅이 뒤지도록 한 것이다. 앨런의 말마따나 화풀이였다.

르메인이 화풀이를 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낮에 앨런과 에반이 주고 받은 설전 때문이었다.

"아무리 임시직이라고는 해도 그대는 발칸의 군단장이 아닌가. 그런 그대를 무시하고 들었다 하니 이 참에 발칸이 어떤 군대인지를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하였네. 그래서 '수색'의 수위를 높였고."

물론 평소였다면 수색을 핑계삼아 에반에게 경고를 보내는 일을 절대 할 수 없었을 테지만 지금은 사정이 좀 다르지 않은가. 따라서 앨런은 이참에 르메인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알려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허······ 알겠습니다. 전하께서 나서서 제 복수를 해주시겠다 하니, 기사들이 돌아올 때까지는 여기에 있지요."

앨런은 더 이상의 다른 말 없이 르메인의 소파에 앉아 렌을 기다렸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고 결국 밤이 지났다.

그 뒤 아침이 오도록 렌은 돌아오지 않았다.

슬슬 렌이 에반의 집 주춧돌까지 들춰보고 오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될 때 쯤.

- 똑똑.

비로소 렌이 돌아왔다.

밤새 무엇을 그리 뒤졌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렌은 다소 피곤한 얼굴로 들어와 르메인에게 보고를 전했다.

"헤르츠 경은 찾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무언가가 적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저택의 지하에 사람 한 명이 갇혀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레넌 브리센으로 추정됩니다."

이 꼼꼼한 기사단장은 비밀통로의 입구를 열어 레넌이 감금된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원 상태로 돌려두었다. 그리하여 에반 모르게 레넌의 위치를 알아내 온 참이었다.

쓰일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의외의 소득인 것은 맞았다. 때문에 르메인은 수고했다는 말을 전한 뒤 렌을 내보냈다.

"경은 리베른에서는 자작위를 받았다 했던가."

리베른에 있을 때 앨런의 작위를 묻는 것이었다. 다소 뜬금 없는 질문이었으나 앨런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딜 가든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이지만 세크리티아에서는 남작이기도 하고 리베른에서는 자작이기도 하지요."

워낙 한 나라에 묶여있질 않았으니 가는 곳마다 작위를 주며 앨런을 붙들어두려 했던 결과였다.

정작 본인은 작위 같은 것에 그리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지냈던 앨런이 웃으면서 덧붙였다.

"그래도 카이리스 3왕자의 스승인 앨런 마나실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그 말에 르메인이 피식 웃으며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서류를 집어들었다.

"그 입이 내 마음에 드는 말을 할 줄도 아는군."

"능력 좋은 입이니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런 대답을 끝으로 앨런은 이제 슬슬 돌아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서류 너머로 그 모습을 흘끗 본 르메인이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 카이리스에서는 3왕자의 스승이자 백작인 앨런 마나실로 하지."

에반이 무엇을 빌미로 앨런에게 시비를 걸었을지 모르지 않았다. 때문에 앨런의 위치에 맞는 작위를 내리려는 것이다.

"······ 그런 말을 무슨 평일 아침에 날씨 얘기하듯 꺼내시는지."

앨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 * *

전 왕비 아이샤는 병사하지 않았다.

란델은 알고 있을까.

아이샤의 죽음에 실리케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그런 생각을 하던 칼리안은 이내 란델은 모르고 있으리라는 결론을 냈다.

베른의 기억을 통해 란델이 텐실의 국왕이 된 이후에도 카이리스와 텐실의 사이가 특별히 나쁘지 않았음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하긴.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플란츠보다 란델이 먼저 내 방에 찾아와 손을 잡자 했겠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칼리안이 실리케를 축출해주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니 이것을 란델에게 알려줘야 할지.

혹은 그냥 두어야 할지.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기게 된 칼리안이 짧게 웃으며 실리케를 쳐다봤다. 그리고 실리케는 이미 칼리안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던 중이었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향한 시선을 그대로 둔 채로 잠시 시간을 보냈다.

시계의 초침이 두 바퀴 쯤 돌았을 때, 실리케가 입을 열었다.

"네가 또 무언가를 오해한 모양이구나."

그 말에 칼리안의 입에 짙은 조소가 떠올랐다. 실리케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오해라."

중얼거리던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 칼리안의 질문을 받고 지어보였던 표정을 실리케 스스로가 본다면 그것을 결코 오해라 할 수 없을 터였다.

칼리안은 아이샤가 죽은 원인을 확신하고 있었고 실리케 역시 칼리안이 자신을 믿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오해를 했다 하니 웃음이 나올 밖에.

꽤 오랫동안 웃음소리를 내던 칼리안이 사납게 치켜 뜬 눈으로 실리케를 쳐다봤다.

"내가 고작 그레이 브리센 따위와 손을 잡았을 것이라는 당신의 불쾌한 착각. 그런 것을 바로 오해라 말하는 겁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나한테는 필요 없거든. 당신같은 족속들."

그 말에 실리케의 얼굴이 조금 전 편지를 쥐고 있던 손보다 더 하얗게 질렸다. 왕자로부터 반말과 폭언을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실리케가 충격을 받았든 말든 칼리안은 안쓰럽다는 듯한 얼굴을 하며 다시 말했다.

"그런데 내가 왔을 때 분위기를 보아하니, 나한테 필요 없는 브리센 변경백에게는 당신이 필요 없었나보네요."

"칼리안. 함부로 말하지 말거라. 아주 정신이 나간 게로구나."

"당신만큼 나가진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 입에 내 어머니를 계속 담습니까.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그렇게는 못합니다."

가만히 앉은 채로 실리케의 손에 더 들어갈 수 없을 만큼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텅텅 비워져 있는 온실을 쭉 둘러본 칼리안이 실리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온실 다시 채우지 마요. 당신 이 곳에 오래 못 있을 겁니다."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냉담한 얼굴로 실리케를 내려다보며 실리케의 머릿속에 오로지 칼리안의 이름만 남게 할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내가, 당신에게. 끝을 보여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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