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하나만 묻겠습니다 (7)
이대로 체르밀 궁에 들어갈 것인가.
방향을 돌려 헤이시아 궁에 들어갈 것인가.
모두 아니라면 브리센 저택으로 돌아갈 것인가.
에반은 마치 길을 잃은 사람처럼 한참을 서 있었다.
앨런의 아랫사람에게 에반의 부하가 졌다거나 앨런 본인에게 말과 기세 모두에서 크게 밀려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 두 가지도 자존심이 크게 상하고 화가 나는 일임은 맞았으나 그보다는 앨런의 마지막 말이 그의 심경을 건드리고 있었던 탓이 더 컸다.
-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누구를 믿고 또 무엇을 바라고 여기 오려 했는지.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앨런이 건넸던 말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변경백인 그레이가 대체 왜 수도에 왔는가.
생각할 것도 없이 답은 하나였다.
'실리케.'
레넌이 브리센을 버리고 란델을 선택한 것처럼 실리케가 에반을 버리고 그레이와 손을 잡으려 한 것이다.
'갑작스럽게 퍼져나온 소문에 정신을 온통 팔려서는 정작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
이런 사실을 하필 앨런의 입을 통해 상기하게 되었으니 그 참담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을 또 가르치려 든 마법사의 목소리와 얼굴을 지워내기 위해 에반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곧 에반의 눈이 자연스럽게 헤이시아 궁을 향했다.
'네가 기어이 나를!'
에반이 감아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자식이 아비를 쳐내려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에 대한 분노였다.
에반은 지금 당장 헤이시아 궁으로 달려가려는 발을 붙들어맸다.
그렇게 간신히 화를 삼켜낸 에반이 다시 고개를 돌려 체르밀 궁을 쳐다봤다. 플란츠가 있을 곳을 살펴보려던 에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섣불리 만나면 안된다.'
사실은 플란츠와 실리케의 관계가 어떤지를 확인하려 찾아온 길이었다. 만에 하나 자신이 실리케를 궁 밖으로 내보낼 경우 플란츠가 영향을 받을지를 알고자 했다.
제 어미를 내쫓았다며 브리센과 척을 질 듯 하다면 플란츠를 왕으로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레넌을 꺼내주고 브리센 전체가 란델의 손을 들어주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실리케가 에반을 배신했다면 플란츠가 누구의 편인지를 완벽하게 파악한 뒤에 만나야 했다. 그러니 일단은 이 준비되지 않은 만남을 미루기로 에반은 그렇게 결정을 했다.
그리하여 결국 에반은 발을 돌렸다.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로 작은 성과도 같은 브리센의 거대한 저택으로 돌아간 것이다.
실리케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 쏴아아아······.
그리고 기어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 *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과 창 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 그 너머로 발길을 돌리는 에반의 모습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방향을 보니 왕궁 밖으로 나가려는 듯 하네요."
"그나마 가장 현명한 판단을 하였습니다. 같은 싸움을 또 걸어오기에 영 머리가 나쁜 줄로 알았는데, 그래도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는 하는 모양입니다."
이러한 앨런의 말을 들은 칼리안은, 에반을 함께 비웃는 대신 자신조차 오싹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던 앨런의 피어를 떠올렸다.
"조금 전에는 정말 굉장하셨습니다. 그 정도의 기운은 저도 처음 겪어봤습니다. 아, 물론 시스파니안을 제외하고요."
앨런은 에반의 앞에 서 있던 사람과 같은 이가 맞을까 싶을 만큼의 상냥한 얼굴이 되어 대답했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놀라기는 했습니다. 스승님의 앞에 있던 것이 제가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릅니다. 키리에는 아예 숨도 못쉬던데요."
칼리안은 그 기싸움에 대한 감상을 여기까지만 전했다.
자신이 에반의 오러를 느낄 수 없었음을 그러니 당장은 에반이 자신보다 강하리라는 말을 앨런에게 전하지 않은 것이다. 괜한 걱정을 끼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수는 것은 참 잘하는 칼리안이 아니던가.
가로막는 벽이 있으면 부술 힘을 더 키우면 되는 일이니까.
"혹 제가 물러났어야 했을지요?"
재미있는 것을 눈 앞에 둔 듯한 칼리안의 웃음을 어찌 해석했는지 몰라도 앨런이 이렇게 물어왔다.
이 말을 아마 르메인이 들었다면 분명 능구렁이 같은 질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미 칼리안이 무슨 대답을 할지 알면서 묻는 말이니 말이다.
굳이 제자의 칭찬을 받고자 하는 기대감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있는 앨런에게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스승님. 아주 잘 하셨습니다. 어차피 알리려 했던 정보이기도 했으니까요."
세상에서 무서울 것 하나 없을 이 대마법사가 왕자의 칭찬을 받고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아마 아무도 모를 터였다.
"마법은 모르겠지만 입으로 스승님을 이길 자는 이 땅에 아무도 없을 겁니다."
칼리안이 진심을 담아 덧붙인 말에 앨런은 세상에서 가장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마법은 누가 가르쳐 줄 수나 있지.
입을 놀리는 것은 누구에게 배울 수도 없는 능력이 아닌가.
"제 입이 세상 어디에서도 적수가 없을 입이기는 하지요."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한참을 웃었다.
잠시동안 칼리안의 웃음이 끝나길 기다린 앨런이 화제를 바꾸었다.
"아무튼 이제 저들의 사이가 보기 좋게 틀어지겠군요."
칼리안은 그레이에게 실리케가 레넌의 손을 잡을 것이라 언질을 주었다.
그리고 앨런은 에반에게 실리케와 그레이가 협심하여 후작위를 빼앗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겉으로는 셋이 서로를 의심하고 견제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들춰보면 아니죠."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겉으로는 셋이 힘겨루기를 하는 듯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레이와 에반 모두에게 공통된 적이 생긴 것이나 다름 없었다.
바로 실리케다.
"실리케가 어찌 나올지. 궁금하네요."
같은 것이 궁금하다 여기며 고개를 끄덕이던 앨런이 문득 떠오른 다른 의문을 꺼내들었다.
"그럼 왕자님께서는 이제 무엇을 할 요량이십니까?"
"가보려고요. 궁금증 풀러."
"가보다니······."
앨런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설마 실리케와 독대를 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내일 쯤 만나볼까 하고 있습니다. 빠르다면 내일 중에 그레이에게 보낸 이들이 전해온 소식이 도착할테니 그레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좀 떠볼 겸 해서요."
앨런이 손가락을 들어 귀를 후비적거렸다.
"누가 또 오늘만 살 것처럼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칼리안이 씩 웃었다.
지금 앨런은 실리케가 칼리안에게 또 독차를 내어줄까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그런 수에 당할 칼리안이 아님을 알았으니까.
그저 실리케를 만난 칼리안이 화를 참지 못하고 또 무슨 일을 저지르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사고 치러 가는 것 아니니 걱정 마세요. 그레이와 에반이 실리케를 경계하기 시작하니 실리케는 그 둘이 아니라 저에게 집중하게 만들어 놔야죠. 그래야 자신의 처지를 잊고 무모하게 움직일 테니까요."
실리케가 칼리안에게 집중하도록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앨런이 참 잘 아는 방법이기도 했다.
사람 속 뒤집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왕자의 말에 사람 비꼬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스승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맞이할 사람이나 찾아올 사람이나 서로 미리 약속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알 수 있었다.
오늘 밤에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라고.
때문에 이 추운 밤에 창문을 연 채로 방문객을 기다리던 칼리안은, 테라스에서 난 '툭' 하는 작은 소리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얼굴로 자신이 앉아있는 맞은편의 소파를 가리켜보였을 뿐이었다.
"앉으십시오."
고작 두 번 만에 플란츠의 방문이 익숙해지다니.
칼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아마도 플란츠 역시 칼리안의 방에 이런 식으로 또 오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터였다. 오전에 느껴진 짙고 짙은 살기에 창문 밖을 내다 보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칼리안의 맞은편에 털썩 앉은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아침에 마법사가 기사를 내쫓는 것이 보이던데."
"스승님과 브리센 후작의 기싸움을 알아보셨습니까. 전하께서 형님의 검술 실력을 칭찬하시기에 반만 믿었는데. 과언은 아니셨나 봅니다."
플란츠는 다른 대꾸를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눈이 닿는 곳에서 칼리안과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으므로 하루 종일 고민을 했을 것이 뻔했다.
앨런과 에반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왜 둘이 그런 싸움을 벌였는지. 그리고 에반은 왜 다시 돌아갔는지.
"후작과 혹시 자주 만나십니까."
칼리안은 플란츠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궁금한 것을 먼저 물었다. 이 대화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는 마찬가지인 플란츠는 자신의 질문을 무시하고 건네진 칼리안의 물음에 대답을 해줄 수 밖에 없었다.
"따로 대면했던 적 없는데."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플란츠를 따로 만난 적 없었다는 그 말에 에반의 심경 변화를 분명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실리케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것까지는 몰랐어도 실리케를 먼저 버릴 생각을 하고는 있었던 것이군.'
상황을 조금 더 파악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형님의 집안이 워낙 화목했던지라 그리 많은 것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곧바로 골이 생기는군요."
플란츠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대체로 그 눈에 빛이 돌지 않는 모습만 보아 왔던 칼리안은 문득 생소한 느낌을 받았다.
칼리안은 그에 대해 별다른 티를 내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 일 때문에 후작이 형님을 찾아온 것 같습니다. 형님 의중을 확인하려고. 그러다 제 스승님과 마주쳤고, 사소한 자존심 싸움이 있었고, 그냥 돌아간 겁니다. 그러니 형님의 어머니가 물러나는 것만을 바라신다면 굳이 제 편을 더 들어주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두시면 후작이 알아서 형님의 어머니를 끌어내리고 형님을 카밀론에 보낼 준비를 할 테니까요."
플란츠는 지금의 말에 대해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칼리안의 말이 끝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으니 계속 해보라는 듯 고개만 살짝 움직였다.
"그러니 형님의 어머니만 배척하고 왕이 될 생각이 있다면 에반을 만나십시오. 만약, 형님의 어머니가 있든 없든 상관 없이 카밀론 궁에 가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저는 갈 생각이 있으니 겸사겸사 제가 돕겠습니다."
플란츠가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내가 이미 대답을 한 줄 알았는데."
그것은 칼리안의 손을 잡을 생각이 변하지 않았다는 플란츠 나름의 명확한 대답이었다. 실리케가 있든 없든 왕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으니까.
칼리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카이리스와의 전쟁에서 죽은 뒤 카이리스에서 되살아나서.
아르센을 거느리고 플란츠와 손을 잡을 상황에 놓였으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칼리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신이 목숨을 바쳤던 형을 대신해 앉아 있는 자신의 목숨을 앗아간 형을 보면서.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플란츠는 고개를 한번 더 움직여 보였다.
입을 다물고 숨을 고른 칼리안이 한참이 지난 뒤 물었다.
"실리케. 이번에는 정말 최악의 선택을 할 지 모릅니다. 제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 생각이라서."
'형님의 어머니'라는 길고 긴 표현을 집어치운 칼리안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악의 선택.
플란츠의 눈이 깊이 잠겨들어갔다.
칼리안이 그런 플란츠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저는 실리케를 구제해 줄 생각이 없습니다. 제 손을 잡겠다면 제대로 각오하고 잡으십시오."
실리케를 위한 레니시타 잎이 광장에 깔리더라도 내 손을 계속 잡을 수 있겠느냐고. 칼리안은 그렇게 물었다.
플란츠의 입에 깊은 조소가 어렸다.
그것이 누구를 향한 비웃음인지는 플란츠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열어 둔 창문 사이로 거센 빗소리가 먹먹하게 울렸다.
"내 어머니가 그리 애써가며 걸어간 길에."
르메인의 검에 죽든.
에반 브리센의 손에 죽든.
혹은 광장에 선 죄인으로 죽든.
"그것 말고 다른 끝이······ 있기는 할까."
플란츠는 담담하려 노력하는 것이 분명한,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정없이 휘청거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맺었다.
그리고 칼리안은 플란츠와 완전히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