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하나만 묻겠습니다 (6)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힘겹게 앉았다.
그리고 전서구 편에 보내졌다는 편지를 펼쳤다.
그레이가 스스로 일어나 앉는 것을 본 집사가 감격스러운 얼굴을 했다. 자신이 정말 큰 일을 해냈다는 만족감 때문이었다.
칼리안의 매타작으로 허리가 부러졌던 그레이가 이렇게 앉아있는 것에 집사의 공이 크기는 했다. 빠르게 처신한 덕분에 집사는 그레이로부터 아주 큰 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약 일주일 전.
다 죽어가는 그레이를 마차에 태운 집사는 일단 인근에 치유사가 있는지를 먼저 확인했다. 그리고 레딩턴 성에 텐실의 치유사가 머물고 있다는 이야기를 간신히 접할 수 있었다.
집사는 그 길로 이틀을 꼬박 달려 레딩턴 성에 도착했다. 그 뒤 레딩턴 영지 관리 대리인직을 맡고 있던 신관 말콤 체티쉬를 만나게 되었다.
"이 분은 브리센 후작가의 장남이신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시오. 돈은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으니 꼭 좀 치료해주시오."
그때 말콤은 칼리안에게 덜미를 잡혀 체포된 헤일 라트란 백작을 대신할 새 영지 관리인에게 인수인계를 하던 중이었다. 그 일로 텐실로 돌아가는 것을 잠시 미루고 있었던 참이었다.
의식을 잃은 그레이의 입에서 '칼리안'이라는 이름이 계속 튀어나왔다. 덕분에 말콤이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자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것이 칼리안 왕자님이구나!'
라고.
치유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그레이는 묘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말콤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조건 단전부터 고쳐놓거라. 무조건!"
그레이의 말을 들은 말콤은 아주 잠시 고민했다.
꿈에서 만나도 이가 갈리는 헤일이 그렇게나 좋아하던 브리센 가문 사람의 청을 들어주어야 할지.
혹은 헤일로부터 해방시켜준 뒤 텐실에서 목숨을 부지하게 해 줄 장문의 편지까지 써준 칼리안의 편을 들어주어야 할지.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고 말콤은 곧 치유를 시작했다.
단전의 손상된 조직을 이어 붙이지 않고 아물게 한 것이다.
앞으로 그레이가 다른 어떤 치유사를 만나더라도 절대로 고칠 수 없도록.
대신 적당히 일어나 걸을 만큼 허리는 붙여놔주었다. 물론 검을 다시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게 치유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그레이는 반쯤 고쳤으나 검을 다시 들기는 힘들 몸으로 변경백령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칼리안이 모르는 사이에 은혜를 잘 갚은 말콤은 재빨리 인수인계를 마치고 텐실로 출발했다.
아무튼 그런 과정을 거쳐 제 스스로 일어나 앉아 편지를 펼쳐든 그레이가 갑자기 온 몸을 떨기 시작했다.
칼리안이 보낸 편지였기 때문이다.
'잊지 말라고 협박까지 하려는 것인가!'
이성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이미 나은 상처들이 다시 아파오는 것이다.
손에 들린 것은 전서구 편에 온 짧은 몇 문장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레이는 그것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간신히 편지의 내용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곧 그레이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칼리안이 보낸 편지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던 탓이다.
- 레넌은 죽거나 실종되지 않았다. 후작의 저택 지하에 온전히 감금되어 있다. 만약 후작이 죽고 레넌을 되찾으면 실리케는 너와 레넌 중 누구에게 작위를 주고 싶어 할까.
실리케가 수족같이 부리던 레넌이 사라졌기 때문에 자신을 불렀다는 것을 그레이 역시 잘 알고 있었다.
- 곧 실리케의 사람이 너에게 갈 것이다. 처신 잘 하거라.
만에 하나 몸이 나아 칼리안에 대한 복수를 꿈꿀 수 있게 되더라도 그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일 터였다. 그러니 당장은 실리케나 레넌 혹은 에반 브리센 후작의 손에 죽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결국 그레이는 이를 악물며 집사를 불렀다.
칼리안의 말이 사실인지를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 * *
다 큰 어른들의 싸움이라는 것도 기실 알고보면 별 것 없다.
한 쪽이 건드리고 한 쪽이 못 참으면 싸움이 된다.
즉 앨런이 건드렸고 에반이 참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싸움이라는 소리였다.
"방금 뭐라 지껄였나, 마법사?"
······ 이렇게 말이다.
물론 처음부터 앨런이 에반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앨런이 그 정도로 막돼먹은 인사는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이렇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하자면.
그 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난 앨런은 일단 커피 한 잔을 마셨다. 그리고 도통 일어날 생각을 않는 아르센의 생사를 대충 확인한 뒤 베로니카의 배웅을 받으며 레이첼과 함께 집에서 나왔다.
지금 왕궁에서는 기사단 파벨이 사용했던 건물인 빌헬름 관을 마법사들에게 맞게 개조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때문에 레이첼은 왕궁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빌헬름 관으로 갔다. 그리고 앨런은 아르피아 궁에 들러 르메인과 아침식사를 했다.
'칼리안 왕자님이 말하기를 이 참에 브리센 후작에게 조금 더 압력을 행사하셔도 좋을 것 같다 하더군요.'
'그래. 안 그래도 오늘 후작의 저택을 수색할 예정이네. 그나저나 헤르츠 경은 무탈한 것인가?'
'죽은 것처럼 잘 살아있으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대충 이런 이야기가 오갔다.
그 뒤 앨런은 칼리안을 만나러 체르밀 궁으로 갔다.
그리고 그 입구에서 플란츠를 보러 온 에반과 딱 마주쳤다.
물론 둘은 두 번째 만나는 것이었다. 다만 처음의 만남이 비밀리에 이뤄졌던 탓에 앨런은 첫인사를 다시 건넸다.
"앨런 마나실입니다."
그런 앨런을 잠시 노려보던 에반은 무언가를 씹어 뱉는 듯한 얼굴을 하며 자신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에반 브리센."
그 말에 앨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서로 갈 길 가자며 조신하게 옆으로 비켜선 앨런을 향해 에반이 입을 열었다.
"부하 한 명이 사라졌는데 얼굴이 참 태평하기도 하군."
앨런의 아랫사람이 사라진 일 때문에 골치가 아프던 차에 정작 앨런은 그리 걱정거리가 없어 보이니 부아가 치민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앨런 역시 편한 속이 아니었다. 누가 시켰건 결국은 에반의 기사들이 아르센을 공격한 것이 아닌가.
아무리 아르센이 멀쩡히 돌아와 앨런의 오리알이나 깨먹고 있다지만 브리센으로부터 선제 공격을 당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부하가 열 명이나 죽었다던 후작께서도 퍽 태평한 얼굴을 하고 계시는군요."
따라서 앨런의 입에서도 이렇게 곱지 않은 대꾸가 튀어 나왔다.
에반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앨런은 에반이 주먹을 쥐는 것을 슬쩍 쳐다본 뒤 속 시원하게 말을 이었다.
"만약 제 아랫사람이 그리 죽어 돌아왔다면 이렇게 쉬이 왕궁에 찾아오기보다는 당장 장례부터 신경을 쓰겠습니다. 무엇 때문에 죽었던 그것이 윗사람의 도리 아니겠는지요."
졸지에 윗사람 구실도 못하는 이가 된 에반이 앨런을 향해 잇소리를 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누굴 가르치려 드는 것인가. 설마 전하의 앞에서까지 그리 건방지게 행동하는가?"
당연히 르메인의 앞에서는 더 건방지게 행동한다.
"후작께서 참견하실 영역이 아닙니다. 선은 지키시지요."
카이리스에서 앨런은 평민이나 다름 없다. 그럼에도 앨런은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중앙 귀족 이상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런 앨런이 에반의 말에 단 한 마디도 지지 않는 것이 에반의 이성을 자꾸 흩트려 놓았다. 에반이 그 뒤틀린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런 작자를 총애하며 옆에 두고 있으니 전하의 안목도 결코 믿을 것이 못되는군."
그리고 에반이 체르밀 궁이 있는 곳을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 하니 3왕자의 성품도 알 만 하고."
앨런이 짧은 웃음 소리를 냈다.
르메인을 넘어서 칼리안까지 저 입에 담겨졌으니 그나마 참고 있던 앨런의 입이 완전히 풀려버렸다.
"고작 마법사 한 명을 잡겠다며 덤비다 정예기사 열이 죽어 나간 기사 가문보다는 믿을 만 하겠지요."
방금 앨런이 언급한 것은 지금의 에반에게 있어 가장 굴욕적인 부분이었다. 그것을 푹 찌른 앨런이 계속 입을 열었다.
"그런데 듣자하니 시신들이 누운 모양새가 사방으로 도망가다 죽은 꼴이라 하더군요."
앨런의 시선이 에반의 머리부터 발 끝까지를 천천히 훑어 내려갔다 올라왔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 말씀하셨으니. 후작의 칼 솜씨가 어느 정도인지 저도 좀 알 것 같습니다."
순간 에반의 눈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가라앉았다.
에반이 간신히 참고 넘기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입을 아주 조심해서 놀려야 할 것이다, 마법사."
"후작의 검이나 조심해서 놀리시지요. 나에랑샤 거리의 건달들도 돈 받고 사람 잡아가는 짓은 안 합니다. 부끄러워서."
하다하다 건달이란다.
"닥치거라!"
칼리안이 말하기를 앨런 마나실의 입에 세렌티의 영광 있으라 하였으니. 닥치란다고 닫아질 입이었으면 그런 말을 했겠는가.
앨런이 확연한 조소를 입에 띄우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얼마를 받았다고 합니까."
그렇게 물은 앨런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주 작은 소리로 하지만 또렷하게.
"물론 그 날보다 더 많이 받지는 못했겠지요."
- 당신이 당신의 자식을 팔아 치운 그 날보다.
앨런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눈에 담긴 말을 들어버린 에반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쇳소리 섞인 음성이 에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방금 뭐라 지껄였나, 마법사?"
그와 함께 에반의 온 몸에서 살기가 피어 올랐다.
일전에 에반의 서재에서 보였던 것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짙은 살기였다. 그때 모든 힘을 내보이지 않았던 탓에 다시 한번 살기를 꺼내보인 듯 했다.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또 한번 기 싸움을 하게 되어버린 앨런이 혀를 찼다. 아무리 에반이 7서클 마법사를 제대로 겪어본 적이 없다지만 저택에서 한 번 부딪혔던 일을 통해서도 배운 것이 전혀 없는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에반은 6서클에 그냥 1서클만 더하면 그것이 바로 7서클이라 생각하는게 분명했다. 대륙에 7서클 마법사가 고작 세 명 뿐이라는 사실만이라도 기억해내면 좋으련만.
"나는 그리 무르지 않다 하였는데, 그새 잊으셨나 봅니다."
확실히 에반의 살기는 강했다.
체르밀 궁 안에 있던 칼리안이 그것을 느꼈을 정도였으니 어설픈 힘은 아니었다.
다만 그 상대가.
앨런 마나실이었다.
"이리도 주제를 모르시니······ 정말 어찌 감당하실는지."
그 말과 함께 지극히 원초적인 공포가 온 몸을 죄여왔다.
- 사아아······.
형언할 수 없는 위대한 이의 앞에 무릎 꿇은 듯한 느낌이 에반을 엄습했다.
에반의 살기만 더 짙어진 것이 아니었다. 앨런의 공포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반은 깊고 깊은 구렁텅이에 홀로 침잠하는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의 귀에 앨런의 목소리가 울렸다. 에반의 살기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한 평온한 목소리였다. 그 소리의 울림에도 공포가 있었다.
"생각을 좀 하시지요."
그것을 이겨내려는 듯 에반의 살기가 한층 짙어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앨런의 공포감이 몇 배로 늘어났다.
곧 앨런이 고개를 살짝 숙여 에반의 눈을 직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뗐다.
"내가. 누구인지."
그와 함께 또 한 번 앨런의 기운이 에반을 짓눌렀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에반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결국 에반이 이를 악물며 살기를 흩었다. 그것을 느낀 앨런도 피어를 멈추었다.
곧 에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홀로 강한 것은 결코 오래 남지 못한다, 마법사."
순간 앨런의 머릿속에 칼리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때문에 앨런은 여유롭게 답할 수 있었다.
"나는 홀로 강하지 않으니 상관 없습니다만.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누구를 믿고 또 무엇을 바라고 여기 오려 했는지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에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앨런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움직였다. 실리케가 있는 헤이시아 궁을 향해서였다.
"브리센은 홀로 강하고자 하는 이들이 너무 많군요. 얼마나 오래 갈지는 내가 지켜보지요."
결국 에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에반이 생각해야 할 것이 많아보였으므로 앨런은 그런 에반을 내버려두고 자리를 떠났다.
* * *
차를 가져다 달라는 칼리안의 말에 얀이 곧바로 움직였다.
방금 나온 곳이 식당이었으니 얀은 재빨리 식당 옆에 마련된 다과 준비실로 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따뜻한 코코아 그리고 코코아에 잘 어울릴 옥수수 쿠키를 준비해 칼리안의 방으로 갔다.
얀에게 알렸던 바와 같이 칼리안은 테라스에 나와 있었다. 이제 날이 많이 추워졌으므로 얀은 테라스 테이블에 차를 놓고 다시 방으로 가 가디건을 챙겨왔다.
"감기 걸리십니다."
얀이 이렇게 말하며 가디건을 건넸고 칼리안은 그것이 굳이 필요치 않다는 말 대신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가디건을 받아 걸쳐 입었다.
곧 칼리안의 옆에 선 얀이 물었다.
"무엇을 그리 보십니까?"
거칠거칠한 식감이 매력적인 옥수수 쿠키를 한 입 베어 문 칼리안이 멀리 보이는 체르밀 궁 입구 쪽을 가리켜보였다. 그리고 쿠키를 우물우물 씹어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저기."
인공 호수와 장미 정원을 빙 둘러 가야 체르밀 궁의 입구가 있었기 때문에 얀에게는 그저 두 사람이 서 있는 것 정도만 가늠이 되었다. 눈에 힘을 잔뜩 주며 누가 있는 것인지 확인하려는 얀을 본 칼리안이 뜻 모를 소리를 했다.
"오싹오싹하네, 아주."
여전히 얀은 이해가 잘 안된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는 무슨 일인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기분 좋은 일이 하나. 그리고 재미있는 일이 하나."
앨런이 이겼으니 기분이 좋았고
에반의 오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 재미가 있었다.
"늙어 죽어가는 사자인 줄 알았더니. 이빨이 꽤 날카롭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한참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