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74화 (75/527)

제15장. 하나만 묻겠습니다 (5)

처음에는 눈을 감자마자 바로 뜬 줄 알았다.

앨런의 집에 도착해 잠들었을 때에도 밤이었는데 잠에서 깬 뒤에도 여전히 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바로 깼다 하기에는 이상하게 몸이 개운했다.

그래서 한참을 멍하게 상황을 따져보던 아르센은 잠들기 전보다는 시간이 이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하루를 꼬박 잠으로 보내고 다시 밤이 되어 일어났다는 것을 가까스로 깨달았다. 스무 시간을 넘게 잠만 잔 것이다.

- 꼬르륵.

정신이 드니 공복감이 밀려들며 뱃속이 요동을 쳤다.

칼리안이 정말로 단단히 얘기를 해 두었으므로 앨런은 잠들어 있는 아르센을 깨우지 않고 왕궁에 나갔다. 그리하여 다시 밤이 되어서야 부스스 일어나는 호사를 누리게 된 아르센이 비척비척 방을 나섰다.

집에 불은 켜져 있었으나 인기척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아르센이 앨런의 부엌에서 계란같이 생긴 것 몇 개를 찾아내 접시에 깨뜨려 넣었다. 그리고 손가락 끝에 작은 불을 일으켜 대충 대충 익혔다.

곧 아르센은 소금조차 넣지 않고 매우 원시적인 방법으로 만든 그것에 날 빵을 곁들여 꾸역꾸역 먹기 시작했다. 무언가 상당히 부족한 듯한 맛이었으나 지금 입에 들어가는 것이 닭의 알인지 오리의 알인지도 구분 못하는 아르센이 무얼 더 하겠는가.

- 탁.

그런 아르센의 앞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닭고기 스튜가 놓여졌다. 매우 향기로운 냄새에 취해 스튜를 쳐다보고 있으니 잔소리 비슷한 말이 들려왔다.

"대사막의 전사들도 그런 식으로는 안 먹어, 아저씨."

"아······ 고맙다."

앨런의 손녀인 베로니카였다.

오히려 열 여섯의 히나보다 더 어른스러운 베로니카는 이제 친해졌으니 서로 말을 놓을 때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는 저렇게 편하게 아르센을 대하고 있었다. 아르센이 딱 제 나이의 두 배라는 것을 제외하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나 말고 할아버지께 고마워해. 할아버지께서 어디 나가지 말고 아저씨 챙겨주라고 하셨으니까."

베로니카와 알고 지낸지도 벌써 한 달이 훌쩍 넘었지만 할아버지라는 그 말이 여전히 생소했다. 아르센보다 젊은 외모의 앨런에게 손녀가 있다는 사실이나 그런 앨런을 스스럼없이 할아버지라 부르는 모습이 아직 익숙하지가 않았던 탓이다.

"자빠져 자다 굶어 죽기 딱 좋게 생긴 꼴이라고."

하지만 손녀가 맞긴 맞았다.

"아저씨는 절대로 집 밖에 나가면 안된다고 했으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주면 돼. 내가 도와줄게."

아르센은 스튜를 한 입 먹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베로니카가 그 옆에 앉더니 아르센이 구워낸 오리알을 집어먹었다. 그 뒤에는 그저 굽기만 했을 뿐인데 해괴한 맛을 만들어낸 아르센의 요리 솜씨에 매우 감탄하며 입에 든 것을 뱉어냈다.

그 정도는 아닌데 하고 중얼거리던 아르센이 물었다.

"혹시 내가 왜 나가면 안되는지 말씀하신 것이 있나?"

아르센은 여전히 자신이 왜 나가면 안되는지를 몰랐다. 일단 시키는대로 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유 정도는 듣고 싶었다. 앨런에게 들은 것이 있었는지 베로니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왕비가 아저씨를 많이 찾을거라고 그러셨어. 왕궁을 빼면 여기만큼 안전한 곳은 없으니까 더 묻지 말고 그냥 여기 있어."

아아.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적당히 칼리안의 뜻을 이해한 아르센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리고 앞에 놓인 치킨 스튜를 다시 떠먹기 시작했다.

왕비가 찾는다 하니 이를 어쩌나.

덕분에 잘 쉬게 생긴 아르센이 씩 웃었다.

* * *

다음 날 아침.

에반 브리센 후작은 집사가 전해온 말을 들은 뒤 아프지도 않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레이가 다친 것에 자신이 얽혀 있다는 얼토당토 않은 소문에 대해서도 미처 파악이 되지 않았는데 문제가 또 생긴 탓이다.

'이상한 소문이 또 돌고 있습니다, 후작님.'

특별히 칼리안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에반에 대한 좋지 않은 소식이 하나 더 퍼지고 말았다. 마법사단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가 귀가 중 습격당해 행방이 묘연한 까닭이다.

아르센의 마부와 '아르센에게 전할 말이 있어 뒤를 따라갔던' 키리에의 증언이 있었고 세뉴 강변에 널브러진 열 구의 시체가 증거가 되었다. 모두 브리센 후작가의 기사들이었다.

시체들의 몸에 난 상처가 워낙 제각각이었던 탓에 아주 매끈하게 목이 잘린 시체가 섞여있던 것이 그리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얼음창으로 사람을 꿰뚫을 수 있다면 얼음칼을 만들어 목도 베어낼 수 있겠거니 생각한 것이다.

- 브리센 후작이 이번에는 아르센 헤르츠를 납치했다!

때문에 이런 소문이 생겨났다.

정작 에반이 직접 손을 댄 레넌의 일은 그리 주목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만난지 십 년도 더 된 그레이나 심지어 얼굴도 모르는 아르센의 일에 에반이 얽혀 있다는 이야기가 계속 퍼져나가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 날 오후에 르메인이 아르센을 입에 담는 바람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르메인이 브리센에 대응하기 위해 발칸이라는 것을 만들었음을 모를 이가 없었다. 그런데 발칸의 창단이 발표되기가 무섭게 아르센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브리센 기사의 시체가 있었으니.

에반 스스로가 생각해도 자신이 의심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아닌가?

"이 일로 오늘 오후에 카에라의 기사들이 방문할 것이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대놓고 후작저를 조사하겠다니. 전하께서는 내가 전하의 세력을 건드렸다고 생각하시나보군."

첩첩산중이 따로 없다.

'그레이의 문제까지 있으니 당장 르메인과 대서서 좋을 것이 없다.'

이렇게 생각한 에반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다. 도착하거든 정중히 안내해라."

그렇게 말하던 에반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이 일의 원흉이 된 한 놈이 생각난 탓이다.

"그런데 대체 테일은 무슨 일로 그 놈과 얽혔다 하더냐?"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에 에반의 앞에 서 있던 집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날 낮에 테일이 궁에 다녀왔다 합니다. 아마도 왕비님께서 부르셨던 것이 아닐까요?"

아닐까요, 라는 말로 조심스레 묻기는 하였어도 분명 그 이유일 터였다. 실리케가 부르지 않는 이상 쫓겨난 기사단의 기사가 왕궁에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실리케······. 또 실리케인가."

레넌과 손잡고 멍청한 짓을 벌여서 가문에 아직까지도 회복되지 않는 상처를 남기더니 이제는 제 아비를 아주 구렁텅이에 몰아넣기 시작했다. 대체 왜 후작가의 기사를 멋대로 부려 이 사달을 내었단 말인가!

곧 에반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지금 바로 궁으로 가겠다."

"왕비님을 만나보실 생각이십니까?"

그 말에 에반의 눈에 노기가 들었다.

"아예 내 손으로 자식을 죽여 없애는 꼴이 보고 싶더냐!"

지금 에반은 실리케를 만나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를 만큼 화가 나 있었다. 말 한 글자 한 글자마다 피어오르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말을 잘못 꺼냈음을 안 집사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후작님."

"······ 왕자를 만날 것이다."

"플란츠 왕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럼 지금 란델이나 칼리안을 만나 무얼 하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에반이 직접 플란츠를 만난다 하는 것이 의외였으나 집사가 그에 대해 이유를 물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집사는 그저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보이며 서둘러 준비를 하겠다 답했다.

* * *

칼리안은 먹구름 가득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 사냥대회 날짜가 잡혔습니다. 사흘 후 토요일입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비가 많이 와서 땅이 심하게 젖으면 미뤄질 수도 있다고 하네요.

왕자들과의 석찬에서 사냥 이야기가 나왔으니 지난 봄에 취소된 사냥대회를 이번에 개최하자는 르메인의 의견에 특별히 반대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렇게 며칠동안 날을 골라 개최일이 확정된 뒤 거짓말처럼 하늘이 흐려졌다.

하루 빨리 기사 가문의 귀족들을 만나야 하는 칼리안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비가 오지 말아야 할텐데.'

봄의 사냥대회도 폭우 때문에 취소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저 비가 칼리안의 앞을 참 많이도 가로막는다.

레넌은 돈으로 치우고 그레이는 몽둥이로 치웠는데.

쓸데없이 비를 내리는 하늘은 무엇으로 치워야 하나.

창 밖을 보며 이런 소득 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 칼리안의 귀에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께서는 사냥에 함께 가십니까."

하필 딱 사냥 생각을 하던 차였기 때문에, 하마터면 칼리안이 입을 열어 그럴 것이라 대답을 할 뻔했다.

간신히 입을 다물고 상념에서 벗어난 칼리안이 방금 질문한 플란츠를 흘깃 쳐다봤다. 란델 역시 플란츠를 일별한 뒤 대답했다.

"가지 않을 생각이다."

란델은 저 사냥대회가 무엇때문에 이렇게 급히 진행되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르메인이 플란츠와 둘이 가려던 사냥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는 정도라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결국 르메인이 플란츠를 위해 마련한 자리인 것이나 다름이 없다 여길테니 그런 곳에 란델이 참석할 리 없었다. 게다가 사냥은 란델의 취향에도 맞지 않았다.

"가끔씩 바깥 바람도 쐬시는 것이 좋을텐데요."

굳이 한번 더 권하는 플란츠를 본 칼리안이 속으로 웃었다. 정말로 란델이 그 자리에 왔으면 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안 올것을 알고 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란델이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걱정해주니 고맙구나."

걱정을 해주는 쪽이나 걱정에 고맙다 답하는 쪽이나.

저들의 말에서 진정성을 찾느니 실리케에게서 인간성을 찾는 일이 빠를 것이다.

그렇게 두 형의 대화를 들으며 얌전히 밥을 먹던 칼리안에게 란델의 시선이 닿았다.

"발칸의 부군단장인 이가 실종되었다 들었다. 네가 걱정이 많겠구나."

칼리안이 고개를 들어 란델을 쳐다봤다.

'관심도 없어 하던 마법사단 이야기를 굳이 꺼내시는군.'

아르센과의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걱정이 클 것이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발칸과 칼리안이 아무 상관이 없다 알려졌음에도 굳이 칼리안을 지목해서 '부군단장'을 걱정하는지 묻는 것이다.

곧 칼리안은 이틀 전에 사라진 뒤 여전히 속 편히 잠이나 자고 있을 아르센을 떠올리다 대답했다.

"로젤리타 기간 동안 많이 익숙해진 이였으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입니다. 그래도 저보다는 전하와 스승님의 걱정이 더 크실 것 같습니다."

아마 이 정도면 훌륭한 답이 될 것이다.

란델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대답이니까.

란델이 칼리안을 한동안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칼리안은 생각이 깊어지는 것을 감추려 샐러드를 집어먹었다.

로젤리타를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스산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대화가 있든 없든 식사 자리에서 눈치 싸움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저 마음에 없는 안부 혹은 날씨 얘기나 주고 받는 것이 다였건만.'

그 이유가 칼리안이 성인이 되어서인지 혹은 플란츠가 술도 끊고 옷도 잘 갖춰 입고 다녀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란델에게 슬슬 심경의 변화가 오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칼리안은 저런 란델을 혼자 감당하기 싫었던 플란츠가 아침밥 먹으러 오라는 소리를 한 것은 아닐까 하는 또 다른 소득 없는 생각을 하며 식사를 마치고 가장 먼저 식당 밖으로 나왔다.

"지금쯤이면 전서구는 이미 도착 했을테지?"

변경백령으로 보낸 칼리안의 편지를 말함이었고 곁으로 다가온 얀이 대답했다.

"네 어제 오후에 도착했을 겁니다."

"그래. 그럼."

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 우뚝.

그러다 돌연 입을 닫고 발도 멈추었다.

칼리안의 눈이 벽 너머의 먼 곳을 향했다.

체르밀 궁 밖에서 아주 흥미로운 기세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을 느낀 탓이다.

끝 모를 공포감과 살기가 서로의 크기를 재고 있었다.

이 카이리시스에 저런 기운을 내세울 이들은 칼리안을 제외하면 딱 둘 뿐이다. 때문에 칼리안이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내 스승님이 왜 이렇게 화가 나셨을까."

"마나실 경이요? 화가 나다니요?"

옆에 서 있던 얀이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칼리안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테라스에 있을테니 차 좀 준비해줘."

앨런 마나실과 에반 브리센의 기 싸움이라니.

대단한 이들이 서로 붙어 으르렁거리는데 느긋하게 구경이나 해주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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