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73화 (74/527)

제15장. 하나만 묻겠습니다 (4)

실리케의 기사단 파벨.

테일은 바로 그 파벨의 부단장이다.

그런 테일이 지금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마법사가 쏘아대는 얼음을 피해 이제껏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거늘. 고작해야 팔뚝 길이의 단검으로 동료의 목을 떨궈낸 소년의 입에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데려올 필요 없다.'

당연히 칼리안의 전언일 터였다.

배후고 뭐고 궁금할 것도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테일은 그냥 포기했다.

당장 목에 구멍이 나든 아니면 목이 사라지든 둘 중 하나는 될 판이다. 동료까지 팔아가며 살고자 했는데 지금 남의 비밀 지켜주는 것이 중요하겠는가?

포기하고 나니 항상 무거웠던 입이 절로 열렸다.

"두 분께서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왕자님께 드릴 말씀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왕궁에만 가면 실리케가 살려줄 것이라고. 테일은 여전히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테일은 얌전히 두 손을 모으고 선 채 제멋대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들으면 칼리안의 앞에 데려가지 않고는 못배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저를 잘 살려두셨습니다. 제가 왕비께 직접 의뢰를 받았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여기 이렇게 돈 주머니도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테일의 말은 끝이 날 줄 몰랐다.

테일은 비단 실리케의 돈만 받은 것이 아니었다. 레넌과 에반으로부터도 돈을 받고 값에 맞는 많은 일들을 했다.

"칼리안 왕자님의 시종에게 레넌 브리센이 건네준 뭔가를 전달했다던 시녀를 처리한 적이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제가 증언을 하겠습니다."

얀에게 처음으로 독차를 건넨 후 사라졌다던 시녀의 이야기였다. 그에 대해서는 아르센도 어느정도 들은 바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테일의 짓인 모양이었다.

다만 아르센은 칼리안이 이미 그 일을 묻어두겠다며 실리케와 맹세의 인을 나누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테일 역시 시녀를 왜 죽였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인 듯 하니 그런 증언이 이제 와 필요할 리 만무했다.

"그것은 이제 소용이 없네. 그리고 왕자님께서는 그 때의 일은 생각도 하기 싫어하신다네."

칼리안의 앞에서 진한 커피를 쭉 들이켰던 아르센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테일의 뒤에 서 있던 키리에를 쳐다봤다. 이제 그만 처리하고 가자는 뜻이었다. 키리에가 반 걸음 앞으로 나왔다.

- 저벅.

키리에의 발자국 소리가 생명줄 끊어지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들은 테일이 얼른 둘을 만류했다.

"제가 중요한 것을 하나 더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이건 정말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 말에 키리에가 다시 뒤로 물러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안도한 테일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후작님의 자금원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뇌물 아닌가."

"물론 그것도 큽니다만 그것은 비정기 수익 아닙니까. 정기적인 자금원은 따로 있습니다. 궁에서 나온 뒤 제가 담당하고 있는 곳입니다."

결국 테일은 꼭꼭 닫아 두었던 상자를 열기에 이르렀다.

테일이 비장의 한 수라는 듯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깔았다.

"카이리시스에 사설 도박장이 있습니다. 사람을 놓고 도박을 하는데 하루 오가는 돈이 상상 이상입니다. 어디에 있는지 알려드릴테니 저를 칼리······."

"혹시 '시스파니안의 깊은 술냄새' 4층을 말하는 겁니까."

테일의 입이 조용히 닫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르센이 키리에를 보며 물었다.

"그거 설마 술집 이름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 이름 한번 경박하군."

"겉으로는 술집이지만 지하에 도박장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대단한 정보는 아닙니다."

테일이 입술을 물어뜯다가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레넌 브리센. 그가 누구 때문에 실종된 것인지 아십니까?"

누구긴.

우리 왕자님이지.

아르센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지만 테일은 목소리를 높였다.

"심지어 레넌 브리센이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은 모르셨을 겁니다!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시면 저를 칼리안 왕자님께,"

아르센이 테일의 말을 자르며 키리에에게 물었다.

"레넌은 브리센 후작가에 감금됐을 거라 하셨던가?"

"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것은 칼리안의 예측이었다.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한 아르센이 긴 하품을 했다.

테일의 눈꼬리가 틀어졌다. 레넌 브리센도 통하지 않는 것이다.

조금 전 떨어져내린 동료의 머리가 아까부터 계속 테일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따라오라 말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테일은 레넌에 대해 이야기 할 때보다도 더 낮은 목소리로 아주 은밀한 것을 알려준다는 듯이 말했다.

"이번에 변경백님이 다치신 것은 아마도 후작께서 직접 나서서 진행하신 일이 맞을 겁니다. 후작님 말고는 변경백님을 다치게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누구긴.

그것도 우리 왕자님이지.

아르센의 눈이 점점 감겨들어갔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 피곤했다. 이동 마법진 개발때문에 며칠을 잠을 못 잤다. 그 후 딱 한번 단잠을 자고 난 뒤 곧바로 앨런에게 붙들렸다.

몸도 피곤하고 스트레스도 심한 상태에서 오랜만에 마력까지 펑펑 썼으니 이렇게 세월 좋게 대화나 나눌 정신이 되지 못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테일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후작님께서는 사실 검의 길에 오르신지 굉장히 오래 되셨습니다. 저와 저기 강둑에 누워있는 놈. 이렇게 둘이 후작님의 검이 다 부서진 것을 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변경백님께 숨기셨습니다."

그 말에 느슨해지던 아르센의 눈꺼풀에 힘이 들어갔다. 아르센이 비로소 관심을 가지며 말했다.

"그것은 왕자님께서 조금 좋아하실 지도 모르겠군."

"맞습니다. 후작님과 변경백님의 관계가 나쁘다고는 해도 어느 정도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으니까요. 변경백으로 봉해지기 전에 두 분 사이에 큰 싸움도 한 번 있었는데 왕자님을 뵙게 해주시면 그에 대해 자세히······."

거기까지 들은 아르센이 손을 들어 테일의 말을 잠시 막았다.

"자네는 아는 것이 참 많은 것 같네."

그리고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 말에 테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원하는대로 칼리안과 대면을 시켜주리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아르센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네가 살아있던 것은 아는 것에 비해 입이 무거워서였을 것 같네. 안 그런가?"

어쩐지 온전한 칭찬은 아닌 것 같았으므로 테일은 대답 없이 아르센을 쳐다봤다. 아르센은 그런 테일 대신 키리에를 보며 조용히 물었다.

"왕자님께서 정말 데려오지 말라 하신 것이 맞는가?"

"네. 다만 정말 도움이 될 이라면 재량껏 결정하라 하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아르센이 다시 테일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비밀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핑계로 왕궁에 가면 실리케가 자네를 구하겠다 나서주기라도 할 것 같던가."

그렇게 많은 비밀은 알면서 정작 실리케가 어떤 사람인지는 잊었던 테일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것은······!"

그 순간 키리에의 단검에 달빛이 담겼다.

차가운 날이 테일의 목을 스치듯 지나갔다.

- 서걱!

결국 테일은 말을 모두 마치지 못했다.

- 퉁!

조금 전 떨어져내린 과묵한 기사의 머리 옆으로 테일의 머리가 데굴 굴러갔다. 실드를 펼쳐 피가 튀는 것을 막은 아르센이 떨어진 테일의 머리를 잠시 바라보며 말했다.

"한 번 무거웠던 입은 계속 무거워야 하네. 괜한 머리를 쓰려 입을 열면 명이 줄어드는 법이라네."

곧 아르센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쉰 뒤 키리에를 보며 말했다.

"도우러 와 줘서 고맙네. 이제 자네는 이만 궁에 돌아가게. 내 마부가 신고를 했을 테니 곧 수도 치안대 병사들이 올 걸세.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해주고 돌아가겠네."

키리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테일이 조금 전까지 손에 들고 있던 돈 주머니를 집어들어 품에 넣은 뒤 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헤르츠 경은 눈에 띄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키리에가 자신의 말 안장에서 검은 로브를 꺼내 아르센에게 건넸다. 그리고 칼리안이 전한 말을 마저 꺼냈다.

"아무에게도 연락을 취하지 말고 마나실 경의 저택에서 닷새 동안 푹 쉬라 하셨습니다."

이유까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아무튼 푹 쉬란다.

그 말에 아르센의 입이 웃다 말다 했다.

휴가는 휴가인데 앨런의 집에서 지내는 휴가라니.

이것을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 * *

후작이 도박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은 완전히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요긴하게 쓰일 정보였다.

그리고 또 하나 후작이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 역시 모르던 사실이었다. 칼리안의 옆에서 키리에의 말을 함께 들은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일전에 브리센 상단을 사겠다 했을 때 후작이 너무 성급하게 화를 낸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앨런은 '칼잡이'라는 자신의 말에 곧장 살기를 내비쳤던 에반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다 또 금방 고분고분해졌는데 어쩌면 제 눈을 가리려고 일부러 그리 굴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칼리안이 그럴 수 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을 한번 만나보면 정확히 확인해 볼 수 있겠네요. 이제 저도 중앙 귀족 회의에 참석을 할 수 있으니 기회는 많이 있을 겁니다."

곧 칼리안은 작은 종이에 몇 가지 말을 적어 얀에게 건넸다.

"지금 보내줘. 변경백령으로 보내면 돼."

전서구를 보내라는 말이었다.

그것을 받아든 얀이 밖으로 나간 후 칼리안은 고생했다는 짧은 말로 키리에를 격려한 뒤 이만 쉬도록 돌려보냈다.

그렇게 앨런과 둘이 남게 되자 앨런이 사일런트를 발현했다.

칼리안에게 할 말이 있다는 의미였으므로 칼리안이 앨런의 얼굴을 응시했다.

"전하께서는 마법사단의 부군단장을 해치려 한 이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하셨습니다."

왜 테일을 붙들어오지 않고 굳이 전부 죽여 없앴느냐는 말이었다.

칼리안은 테이블에 놓인 주머니를 쳐다봤다. 채 마르지 않은 핏자국이 있는 그것은 실리케가 테일에게 건넸던 돈 주머니였다.

"파벨이 여전히 왕궁 안에 있던 기사들이라면 그렇게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자는 이제 실리케가 아니라 후작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레넌의 일에도 관여를 했겠죠."

예전에는 실리케의 심부름을 했지만 이제는 에반의 수족이 되었다는 것. 그것 때문에 잡지 않고 전부 죽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자가 왕궁 안에 잡혀 있으면 후작이 경계할 겁니다. 그 자가 밝혀낼 비밀들을 빌미로 전하나 제가 어떤 것을 요구할지 알 수 없으니 신경을 곤두세우겠죠."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앨런의 앞에 놓인 호밀 쿠키를 가리켜보였다. 어찌나 많이 보냈는지 아무리 먹어도 도통 줄어들지를 않는 것이다.

"저 아직 다른 귀족들 만나보지도 못했잖아요. 그래서 후작은 아직 저에게 관심을 가지면 안됩니다. 지금은 그레이와 실리케의 사이에서 줄다리기만 하게 두는 것이 낫습니다."

즉 칼리안을 경계한 에반이 실리케와 다시 손을 잡는 것을 막고자 했다는 소리였다.

칼리안이 실리케와 에반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는 없었다. 아직 그만큼의 세력은 되질 않았다. 그래서 야금야금 그들의 세력을 줄여가는 중이었다.

레넌과 그레이를 실리케의 손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그레이가 원인이 되어 실리케와 에반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칼리안은 그 상태를 최대한 유지시키면서 이용해 먹을 생각이었다.

곧 칼리안이 테이블의 주머니를 툭 쳐보이며 씩 웃었다.

"대신 실리케는 더 많이 불안해져야 하고요."

테일이 죽었다. 테일과 함께 있던 아홉의 기사도 함께 죽었다.

그런데 아르센도 사라진다. 앞으로 닷새 동안은 아르센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을 터였다.

만약 아르센이 살아있다면 테일로부터 무엇을 들었을까.

들었다면 그것을 칼리안에게 전했을까.

그리고 칼리안은 자신의 수족을 공격한 실리케를 어떻게 할까.

등등.

"실컷 고민해보라 해야죠."

머리를 싸맬 실리케를 생각하니 칼리안의 입에 진한 웃음이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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