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72화 (73/527)

제15장. 하나만 묻겠습니다 (3)

버릇 같은 자기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번뜩이는 얼음창 두 개가 기사들을 향해 쇄도했다.

- 쌔애액!

- 콰직!

날카로운 것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렸다.

빠르다!

감각이 좋은 한 명은 거의 낙마하듯 뛰어내리며 간신히 피해냈다. 나머지 하나는 가슴에 바람 구멍이 생긴 채로 말 위에서 떨어졌다. 그에게서 흘러내린 피가 금세 웅덩이를 만들어냈다.

대비할 틈도 없이 한 명이 죽자 기사들이 서둘러 말에서 내렸다. 그들이 가까이 오도록 굳이 기다려 줄 용의는 없었으므로 아르센이 다시 손을 움직였다.

- 쉬이익! 쉬익!

두 개의 얼음창이 아르센의 정면에 서 있던 기사에게 연달아 날아갔다. 검을 휘둘러 하나를 쳐낸 그는 곧바로 날아오는 두 번째 얼음창에 맞아 죽었다.

- 쿵!

육중한 몸이 쓰러지는 소리에 남은 기사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대상을 정하고 계산하고 주문을 외우고 발동시킨다.

그것이 마법사의 전투가 아닌가?

- 쌔애액!

- 서걱!

칼잡이의 안일함을 비웃듯 파열음이 다시 이어졌다.

어두운 밤에 날아드는 아르센의 얼음은 그 자체로 암기였다.

보이는 순간 죽는다!

- 풀썩.

테일의 옆에 있던 기사 한 명이 바닥에 엎어졌다. 관통된 목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무슨, 미친!'

말에서 내려 아르센을 포위하는 그 짧은 순간에 셋이 줄었다.

테일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기사 일곱의 한가운데에 선 아르센이 고개를 돌렸다.

다음 타깃을 찾는 시선이 정면을 향함과 동시에 아르센의 뒤에 서게 된 두 기사가 일사불란하게 달려들었다. 각각 아르센의 목과 심장을 겨눈 채였다.

그들의 검이 바람처럼 휘둘러졌다.

그것을 조금 늦게 알아차린 아르센이 고개를 돌렸다. 이미 지척에 다다른 검날이 아르센의 눈동자에 비춰졌다.

그리고.

- 팅! 티딩!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경쾌한 금속음과 함께 아르센의 실드가 두 번 빛났다. 목표의 옷자락조차 스치지 못한 두 개의 검이 튕겨나왔다.

망연자실한 표정이 된 두 기사가 다시 검을 뻗어내려 할 때, 어느새 날아온 얼음조각이 그들을 덮쳤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여지없이 이어졌다.

- 카드득! 콰직!

한 명이 심장을 꿰뚫린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폐가 사라진 또 한 명은 심장을 잃은 동료를 한동안 부러워하다 피거품을 게워내며 죽었다.

그 꼴을 고스란히 지켜보던 테일이 이를 악물었다.

'젠장!'

지금까지 테일이 살아있는 것은 실력이 아니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테일이 그것을 가장 잘 알았다.

눈 깜짝 할 새 후작가의 정예 기사 다섯이 죽어나갔으니까!

'잘못 건드렸다.'

아르센은 테일에게 충분히 후회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엄습해오는 서늘한 느낌에 테일이 고개를 비트는 순간 차가운 얼음의 날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베인 것인지 목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아르센의 실드가 다시 빛났다.

- 티딩! 팅!

테일이 공격받는 순간을 노려 실드를 내리친 두명이 물러났다. 그리고 자신에게 날아올지 모를 얼음을 막기 위해 정면을 주시했다.

- 쉬이이익!

그런 기사들을 농락하는 것처럼 이번 얼음창은 한 명의 머리 위에서 생성되어 그대로 내리꽂혔다.

- 쿠웅!

불운한 타깃이 된 기사가 정수리부터 턱까지 꿰뚫린 채 절명했다. 얼음 끝을 따라 흘러내린 붉은 피가 바닥을 적셨다.

테일은 그저 아르센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살았다. 산 것을 안 순간 테일의 몸이 바닥을 박찼다.

아르센을 향해서가 아니었다.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그런 테일의 움직임을 본 다른 기사들 역시 슬금슬금 도망 칠 때를 보았다.

그 때 기사 한 명이 아르센에게로 달려들었다. 예리한 칼날이 실드와 아르센을 함께 갈라낼 것처럼 날아들었다.

아르센은 실드의 방어력이 얼마나 남았는지 혹은 저 칼날의 예리함이 얼마나 될 지를 가늠하는 대신 입을 열었다.

[텔레포트]

낮은 목소리와 함께 아르센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와 함께 아르센에게 검을 휘둘렀던 이를 제외한 기사들이 저마다의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테일도 그 중 하나였다.

아르센의 신형이 테일의 바로 뒤에서 나타났다. 보기만해도 소름끼치는 얼음창이 테일과 또 다른 기사 한 명을 향해 쏘아졌다.

테일이 허리를 뒤틀며 등 뒤로 검을 휘둘렀다.

이 기적적인 움직임이 그의 목숨을 살려냈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얼음창이 튕겨 나간 것이다.

- 푸욱!

그와 함께 앞서 달려나가던 기사의 눈에서 생명의 빛이 빠져나갔다. 눈동자만 간신히 움직여 그것을 본 테일의 손이 떨렸다.

'오지 말았어야 했다.'

꽤 강한 마법사라 생각했다.

그래서 왕궁에는 알려지지 않은 아홉 명의 동료를 더 불렀다. 테일을 포함하면 합이 열이다. 열 명이 나누고도 충분한 돈이었던데다 성공하면 두 배를 더 주겠다 했으니 당장 나눠가지는 돈이 그리 아깝지 않았다.

테일이 헛웃음을 지었다.

'성공할 생각을 했다니. 고작 열 명으로.'

짧은 판단으로 오늘 당장 죽게 생긴 테일의 눈에 뒤늦은 후회가 가득 어렸다.

실리케조차 아르센이 어떤 이인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그 돈은 분명 많았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아르센을 둘러싼지 5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

열 명의 기사 중 셋이 남았다.

- 쌔액!

- 콰직!

아니, 둘이다.

등을 돌린 채 미친듯이 달리던 이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얼음창을 피하지 못했다. 결국은 거대한 얼음창에 몸이 꿰뚫린 채 죽었다.

그의 시체가 강둑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세뉴강의 맑은 물에 검붉은 피가 퍼져나갔다.

아르센에게 검을 휘둘러 본 한 명 그리고 도망을 포기한 테일. 이제 둘 밖에 남지 않았다.

그제야 아르센의 공격이 멈추었다.

"이제 둘이 남았네."

아르센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둘 중 누가 살겠나. 나는 한 놈만 필요하다네."

그리고 이렇게 물어왔다.

* * *

아르센이 나간 직후 여유로운 얼굴로 탄산수를 한 모금 마신 칼리안이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키리에."

주변에 아무도 없었으니 언뜻 본다면 혼잣말같기도 했다.

이제 막 석찬이 시작되어 분위기가 소란스러웠다. 서로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인사 소리도 컸다. 잔을 부딪히는 소리도 끊이지 않았고 이곳 저곳에서 식기 부딪히는 소리도 작지 않았다.

그 가운데 흘러나온 칼리안의 목소리에 칼리안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얀과 함께 서 있던 키리에가 곧장 다가왔다. 엘프의 피가 준 영향인지 몰라도, 키리에는 상상 이상으로 청력이 좋았으니까.

"네, 왕자님."

칼리안이 잠시 키리에를 바라보다 말을 전했다. 주변의 소리에 묻혀 아무도 듣지 못했겠지만 오로지 키리에만은 칼리안의 말을 전부 알아들었다.

"······ 할 수 있겠어?"

말을 마친 칼리안이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었다.

키리에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고 키리에는 그 길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키리에의 뒷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서 앨런이 있는 곳을 잠시 쳐다보았다. 르메인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앨런이 자연스럽게 칼리안을 보았고 칼리안은 다른 말 없이 연회장에서 나갔다. 그러자 앨런이 곧바로 칼리안을 따라나왔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칼리안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레이에 대한 소식이 오늘 전해졌으니 실리케가 움직였을 겁니다. 제가 그레이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어 할 것이라서."

"안그래도 헤르츠 경이 보이지 않기에 궁금해하고 있었지요."

곧바로 상황을 이해하고 이렇게 답한 앨런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흥미로운 상황을 눈 앞에 둔 것 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실리케의 암수가 헤르츠 경을 향했겠군요. 제가 다녀오면 될는지요?"

그 말에 칼리안이 웃었다.

"시스파니안이 토끼를 잡는 모양새가 나와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헤르츠 경을 공격하는 이들을 잡는 것에 굳이 스승님의 힘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스승님께서는 그저 들어가셔서 전하께 알려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만큼 아르센을 믿고 있다는 말이겠지만 아르센 한 명으로도 충분히 처리가 가능하다고 여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실리케는 지금 브리센 후작이 자신의 편인지 아닌지도 의심하고 있을 겁니다. 불안할거예요."

그레이가 실리케를 도우러 온 것이 형제간의 깊은 우애 덕분이 아니라는 것은 칼리안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분명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실리케가 그레이에게 제시할 수 있는 것은 후작의 작위 외에는 없다. 그런데 후작의 자리는 거저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왕의 자리처럼 이양할 수도 없다. 반드시 에반 브리센이 죽어야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실리케는 에반이 실리케의 계획을 눈치채고 그레이를 직접 처벌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을 터였다.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려 변경백령에 사람을 보내도 돌아오려면 며칠이 걸립니다. 그 전까지는 후작이 직접 그레이를 공격했던 것이 아닌지를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겠죠. 그러니 실리케는 후작의 기사를 마음대로 부릴 수가 없어요. 자칫하면 그들의 칼이 자신에게 향할 테니까."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깊은 조소를 머금은 채로 헤이시아 궁 쪽을 바라봤다.

"더군다나 실리케는 헤르츠 경을 만나본 적도 없습니다. 헤르츠 경의 무력이 어느정도 되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으니 고작해야 기사 몇 명을 불렀을까 말까. 그러니 헤르츠 경 한 명이면 충분한 상대가 될 겁니다."

앨런의 양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렇게나 거부감을 느끼더니.

"로젤리타에 다녀온 뒤 헤르츠 경에 대한 믿음이 꽤 굳건해지셨군요."

그 말에 칼리안이 앨런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믿을 수 밖에요. 이 곳에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이였으니."

처음 칼리안이 아르센을 본 날 보여준 반응을 보고 베른과 아르센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얼추 눈치를 챘던 앨런이었다. 지금의 대답을 듣고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확신한 앨런이 혀를 내둘렀다.

* * *

'가는 길에 잠들지 말고요.'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제야 이해한 아르센이 앞에 세워둔 둘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칼리안 공격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혼자 보냈다!

"믿음에 감사를 드려야 할지, 아니면 방임에 원망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왕자님."

아르센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칼리안이 무슨 이유로 자신의 실력을 철썩같이 믿는지 몰랐으니까.

그런 아르센을 보는 테일과 또 다른 기사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둘의 손에는 여전히 검이 들려 있었다. 아르센과의 거리는 불과 한 보 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센은 저렇게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다.

물론 둘 모두 그런 아르센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검을 들어올리기도 전에 아르센의 얼음이 이미 몸을 관통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르센이 둘을 보며 다시 물었다.

"이제 정했나?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아르센은 둘 다 살려둘 생각이었다.

서로 살기 위해 경쟁하듯 정보를 뱉어내게 할 참이었다.

테일이 입을 열었다.

"저를 살려주십시오. 그리고 칼리안 왕자님께 데려가 주십시오. 그럼 제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왕궁에는 칼리안도 있지만 실리케도 있다.

왕궁까지만 가면 실리케가 살려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기사가 매서운 눈으로 테일을 노려봤다. 아무리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지만 그와 테일은 12년을 함께 지냈다. 그런 동료를 어찌 저렇게 쉽게 버린단 말인가?

"알겠네. 그럼······"

협박을 위해 다른 한 놈 쪽으로 손을 가져가던 아르센이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먼 곳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다그닥, 다그닥!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말 발굽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르센이 앞에 선 둘을 그대로 둔 채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이를 살폈다. 잠시 후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지자 아르센이 씩 웃었다.

"방임이 아니셨군."

아르센을 찾아 온 것은 바로 키리에였다.

말에서 내린 키리에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것을 본 아르센이 난색을 표했다.

"조금 늦게 왔군. 그냥 가게. 오래 볼 것이 못 되네."

온통 가득한 피 냄새 곱게 죽지 못한 시체들.

그리 나이가 많지 않은 키리에가 그런 모습을 보았을 리 없다 생각한 것이다.

아르센의 말처럼 처음 보는 광경임은 맞았다. 하지만 키리에는 그저 담담했다.

"더 독한 곳에서 지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한 키리에가 살아있는 두 기사를 잠시 쳐다보다 아르센을 향해 물었다.

"둘을 왜 남겨두신 겁니까."

키리에의 질문에 아르센은 별 생각 없이 테일을 가리켜보이며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 확인하실 것이 있지 않겠는가? 안그래도 왼쪽에 있던 친구가 왕자님을 뵙겠다 하기에······."

- 서걱!

아르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른쪽 기사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가 사라진 몸뚱이가 둔중한 소리와 함께 허물어졌다.

검을 지닌 채 긴장하고 있던 브리센의 정예 기사. 그런 이의 목을 순식간에 내리친 것은 키리에였다.

피가 방울방울 맺힌 단검을 털어내며 서로 다른 색을 지닌 키리에의 눈이 아르센을 향했다.

"데려올 필요 없다 하셨습니다."

테일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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