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71화 (72/527)

제15장. 하나만 묻겠습니다 (2)

며칠이 더 지났다.

항상 푸른 잎의 르니에리 화분으로 가득했던 실리케의 온실이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칼리안과 만나 맹세의 인을 교환하고 돌아온 날 실리케의 화풀이에 전부 깨져버렸다.

그 이후 실리케는 며칠 전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때문에 실리케의 온실도 깨끗이 치워지기만 한 뒤 새로 채워 넣어지지 않은 채로 몇 달을 보냈다.

그런 온실의 한가운데 마련된 응접실 안에서 실리케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걸음 걸음마다 냉기가 흐르는 것 같아서 시녀들은 차마 그 곁으로 갈 엄두도 내지를 못했다.

또각.

- 차르륵

또각.

- 차르륵

손에 들린 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며 온실 안을 서성이던 실리케가 제 자리에 멈춰 서며 입술을 깊이 깨물었다.

그레이 브리센이 오지 않는다.

수도 인근까지 온 것은 분명했다. 그 후로 갑작스럽게 소식이 끊겼다.

레넌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능성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이유가 있다면 납치가 되든 살해가 되든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레이는 그럴 수 없지 않나.

지금 실리케는 그레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여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레이가 어떤 다른 마음을 품고 사라진 것이 아닌지를 의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실리케에게 시녀장이 달려와 몇 마디 말을 전했다.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수도 인근에 도착했을 때 에반 브리센 후작이 보낸 자들이 공격을 했다 합니다. 이로 인해 변경백이 큰 부상을 입고 변경백령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일파만파 퍼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들은 실리케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아버지가? 어째서?"

"그것이······. 후작위를 빼앗고자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돌아가서 두번 다시는 카이리시스로 돌아오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다고 합니다. 지금 그에 대한 이야기로 귀족가가 매우 소란합니다."

귀족들의 입은 정말로 빨랐다.

수도로 요양을 오던 그레이가 에반으로부터 공격을 당했다는 소문 역시 삽시간에 번져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레이는 소드마스터였다.

그런 이가 아버지로 인해 재기가 힘들 정도의 큰 부상을 입었다 하니, 이보다 더 재미있는 소식이 또 어디있을까.

실리케가 미간을 찌푸렸다.

손에 들린 부채를 몇 번 펼쳤다 접기를 반복한 뒤, 실리케의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후작의 자리를 노릴 것 같아서 미리 쳐냈다. 이런 시점에."

그러다, 뭔가 이상한 것이 있다는 듯 실리케가 다시 시녀장을 향해 물었다.

"아버지가 직접 가신 것도 아닐텐데 누가 변경백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다는 말이냐."

"변경백은 이미 부상을 입어서 수도로 오는 중이 아니었습니까. 때문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대답을 들은 실리케의 눈이 번뜩였다.

실리케가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물다 입을 열었다.

"아니야."

그레이는 부상을 입어 온 것이 아니었다.

카이리시스에 올 때 그렇게 핑계를 대라 시킨 것이 바로 실리케였다. 그 후 플란츠를 세자위에 올리는 것을 도우면 에반 브리센 후작을 축출한 뒤 그 자리에 그레이를 앉혀주겠다고 그렇게 말을 했었다.

- 차르륵!

실리케가 머릿속으로 몇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그레이의 계획을 안 에반 브리센이 직접 나서서 공격했다.

그레이가 실리케를 배신한 뒤 핑계를 대고 돌아갔다.

아니라면 드러나지 않은 누군가가 그레이를 공격했다.

곧 실리케가 날카롭게 뜬 눈으로 시녀장을 보며 말했다.

"브리센 변경백령으로 치료약을 보내라. 변경백이 정말 부상을 당해 변경백령에 있는 것이 맞는지와 누구에게 공격을 당했는지를 정확히 확인하고 오거라. 가능한 빠르게 직접 눈으로 보고 와야 한다."

시녀장이 허리를 숙이며 그렇게 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당장 테일 경을 찾아서 데려오거라."

테일은 칼리안으로 인해 왕궁에서 물러난 기사단 파벨의 부단장이었다. 실리케를 대신하여 여러번 검을 휘둘렀던 이였기도 했다. 돈만 준다면 무엇이든 하였으니 급한대로 그레이를 대신해 수족 노릇을 해 줄 사람으로는 그보다 나은 이가 없을 터였다.

시녀장이 황급히 밖으로 빠져나간 뒤 실리케가 다시 한번 온실 안을 서성였다.

실리케는 지금 자신이 가정한 세 가지를 모두 확인해보려 하고 있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그레이를 만나고 온 시녀가 확인을 시켜줄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테일을 통해 확인해 볼 참이었다.

드러나지 않은 누군가라는 것을 떠올리니.

"왜 자꾸."

칼리안.

"······ 네가 생각나는지."

- 차르륵!

실리케는 불쾌한 예감을 떨치려 애쓰며 방으로 돌아갔다.

* * *

그날 오후 르메인의 중대 발표가 있었다.

발칸이라는 이름의 마법사단을 창단할 준비가 모두 끝났으며 일주일 뒤 창단식을 거행한 뒤 곧바로 운영을 시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발칸의 임시 군단장은 앨런 마나실.

부군단장은 아르센 헤르츠였다.

그날 오전 그레이에 대한 소식으로 얼굴을 찌푸렸던 실리케는 그 소식에 또 한번 인상을 찌푸렸다.

"파벨의 건물과 훈련장을 쓰겠다니······ 전하께서 예전의 일들을 모두 잊으신게지."

다시 한번 실리케의 심기가 불편해졌음을 안 시녀장이 어쩔 줄을 몰라했다. 실리케의 입 속에서 까드득 하고 이를 악무는 소리가 났다.

"기사단 파벨이 사라졌다 하여 나의 힘이 없어진 것이 아닐진대. 거기가 어디라고 마법사들을······."

그렇게 말하던 실리케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니지."

그것을 따져 묻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상기한 것이다.

브리센 후작이 자신의 아들을 불구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실리케가 르메인의 뜻을 반대하면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실리케에게로 향하게 될 터였다.

"전하께서 모아 놓은 마법사가 서른 명이라 했느냐."

"네 그렇습니다."

실리케가 비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 가지고는 무엇도 하실 수 없을 테니. 군대 놀이가 하고 싶다 하시는데 구경은 해드려야지. 일단 알겠다."

그렇게 말한 실리케가 몸을 돌렸다. 그러자 시녀장이 다시 조심스러운 말로 그녀의 발을 붙들었다.

"말씀하신 이를 데려왔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실리케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파벨의 기사 테일이 찾아온 것이다. 실리케가 곧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만나러 내려갔다.

응접실 앞에서 주변을 모두 물린 실리케가 홀로 들어갔다. 테이블 앞에 평범한 옷을 입은 남자 한 명이 앉아있었다. 테일이라는 그 기사였다.

테일은 전형적인 기사란 이런 것이라 말하는 듯한 외모를 지닌 자였다. 게다가 행동거지가 반듯하고 말수도 적었다. 때문에 처음 보는 이들은 테일의 진짜 모습이 어떤지 상상도 하지 못한다.

다만 실리케만은 알고 있었다.

그의 손에 당장 금화 세 개만 쥐여줘도 왕궁 밖의 그 누구든 죽여서 데려올 자라는 것을.

- 잘그락.

때문에 실리케는 응접실에 앉은 테일의 앞에 돈이 든 주머니를 먼저 건넸다. 그 내용물을 확인한 테일이 물었다.

"상대할 이가 여러 명입니까?"

돈이 꽤 많았기 때문에 묻는 말이었다.

실리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한 명이니라."

그 말에 테일이 의뭉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얼마 전에도 한 명을 상대하고 큰 돈을 받았기 때문이다.

레넌 브리센.

그를 잡아다 후작의 앞에 데려다 놓은 두 기사 중 한 명이 바로 테일이었다. 물론 테일은 입이 무거운 기사였으므로 실리케는 그것을 영원히 모를 터였다.

"누구입니까."

칼리안의 로젤리타를 수행했고 왕궁에 머무르지 않으며, 앨런 마나실의 가족이 아닌 자.

실리케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르센 헤르츠라는 마법사다."

오늘 하루 그레이와 함께 카이리시스 귀족들의 입에 열심히 오르내린 발칸의 부군단장. 그 이름을 테일도 들었다.

"그레이 브리센과 마주쳤는지 마주쳤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내 오면 된다. 알아낸 뒤에는 그 입을 잘 막아두어야 할 것이다. 잘 처리하면 그 두 배를 더 주마."

돈 주머니가 무거웠던 이유를 깨달은 테일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머니를 품 속에 넣은 뒤 실리케의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 * *

그리고 그날 저녁.

얀은 굉장히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우리 왕자님에게도 세력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물론 발칸과 관련된 내용 그 어디에도 칼리안의 이름은 없었다. 하지만 얀은 마법사단 발칸이 칼리안의 군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 서른 명 뿐이지만 곧 엄청나게 늘어날 겁니다. 그러니 왕자님도 이제 당당하게 다니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얀의 말에 얀과 나란히 서서 칼리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기를 기다리던 키리에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지금보다 더 당당해지셔도 괜찮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진심 가득한 그 말에 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플란츠나 란델 왕자에게 어찌나 치이고 사시는데요. 특히 플란츠가 우리 왕자님께 얼마나 독한 짓을 하는지 알면 그런 말 못할 겁니다."

칼리안이 그 플란츠와 반쯤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알면 정말 놀랄 얀이 이렇게 말했다. 때문에 샤워실 안에서 얀의 말을 들은 칼리안이 잠깐 난처한 얼굴을 했다.

플란츠와의 일을 얘기해줘야 하는데 저래서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이 된 탓이다.

그렇게 복잡한 마음을 안고 샤워를 마친 칼리안은 간단한 예복을 갖춰 입었다. 그리고 세뉴관에 마련된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아직 발칸이 공식적으로 창단된 것은 아니었으나 르메인이 창단을 발표한 것을 기념하는 가벼운 석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오래지 않아 연회장 안에 들어선 칼리안은 그 어떤 때보다 더 많이 집중된 시선 때문에 잠시 발을 멈칫했다.

"칼리안 왕자님께서 오셨다!"

그들은 전국에서 모인 마법사였고 칼리안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랬으니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칼리안을 살피기 시작한 것이다.

- 그 눈이 정말 시스파니안의 것처럼 붉은지.

덕분에 칼리안은 마법사들 모두와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해주어야 했다.

'란델과 플란츠가 오지 않은 것이 어찌나 다행인지.'

실리케는 물론이었고 둘 모두 그럴싸한 이유로 불참을 알려왔다. 칼리안이 이렇게 주목 받는 것을 보이지 않아도 되니 반겨할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실소하던 칼리안에게 마지막으로 아르센이 다가왔다. 상당히 피곤한 얼굴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미안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헤르츠 경. 괜찮습니까."

"곧 안 괜찮아 질 것 같습니다, 왕자님."

솔직한 대답에 칼리안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창단식 날에도 연회가 있을테니 오늘은 그냥 가서 쉬세요."

그러자 아르센의 표정이 조금 밝아지다 말았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갈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석찬이 끝난 뒤 다시 마나실 님을 뵈러 가야 합니다. 게다가 이대로 마음대로 집에 가버리면 과연 내일 마나실 군단장께서 무슨 말을 할지 상상도 되질 않습니다."

그 얼굴을 보던 칼리안이 다시 웃었다.

"스승님께는 제가 말을 잘 전해두겠습니다."

"하지만······."

"쉴 수 있을 때 쉬어요."

이 순간 칼리안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 아르센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은 먼저 가보겠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가는 길에 잠들지 말고."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뜻 모를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아르센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앨런이 쫓아올 것 같은 느낌에 얼른 걸음을 옮겨 마차에 올랐을 뿐이었다.

아르센의 집은 세뉴 강을 건너가야 있었기 때문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칼리안은 잠들지 말라 했지만 사람 눈꺼풀이라는 것이 어디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던가.

- 다각 다각.

규칙적인 말 발굽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르센의 눈이 스르르 감겨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세뉴 강을 건넌 뒤.

마차의 불안한 흔들림과 마부의 급박한 목소리가 아르센을 깨우기 전까지.

"헤르츠 님!"

이상한 기분에 슬쩍 눈을 뜬 아르센을 마부가 다시 불렀다.

"일어나십시오!"

그제야 정신이 든 아르센이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마차가 심하게 요동쳤다.

- 쿵!

항상 평온하던 아르센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아르센은 아직 달리는 마차의 문을 확 열었다.

평소보다 몇 배는 빨라진 마차가 정신 없이 달리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 휙휙 지나갔다.

아르센은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는 대신 적당해 보이는 곳을 눈에 담으며 마부를 향해 소리쳤다.

"그대로 계속 달려 도망가게!"

그리고 신속하게 마력을 운용했다.

[텔레포트]

그와 동시에 아르센의 몸이 마차에서 사라졌고 그가 조금 전 보아두었던 곳에 정확히 나타났다.

달리는 마차에서 바닥으로 몸을 옮긴 아르센은 곧바로 실드를 생성해 몸을 보호했다. 그러자 마차를 뒤따라 온 것 같은 여러 마리의 말이 아르센을 둘러쌌다.

달빛에 번뜩이는 칼날이 모두 아르센을 향하고 있었다.

의심되던 상황이 맞음을 깨달은 아르센이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반갑네."

오로지 빠르고 효율적인 대인 공격 마법만을 연구해 온, 그리하여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얼음창을 만들어내는, 이제 고작 스물 여덟의 5서클 마스터 마법사.

"마법사단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라 하네."

아르센 헤르츠의 얼음이 시린 빛을 머금은 채 쏘아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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