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70화 (71/527)

제15장. 하나만 묻겠습니다 (1)

르메인이 항상 부려먹기만 한다는 앨런의 말은 정말 개똥같은 소리였다. 분명히 르메인은 앨런을 부려먹는 만큼 대우를 해주고 있었다.

왕궁에서 일하는 이들 중 르메인의 집무 공간인 아르피아 궁에 개인 집무실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앨런이었으니까.

"와······"

앨런의 집무실이 있는 곳에 처음 와본 칼리안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직 집무실에는 들어가보지도 않았으니 집무실의 시설이나 넓이에 감탄한 것은 아니었다.

"엄청난데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르피아 궁의 엄숙한 복도에 자신의 웃음소리가 울리는 것을 깨달은 뒤에야 간신히 웃음을 멈춘 칼리안이 말했다.

"스승님께서 전하와 항상 붙어 계시게 된 이유를 한 눈에 알겠습니다. 전하께서 스승님을 너무 잘 챙겨주셔서 불평을 하신 거군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아르피아 궁 가장 상층에 위치한 두 개의 집무실을 쳐다봤다.

역대 카이리스 국왕들의 초상화가 빼곡히 걸린 복도의 왼쪽에는 르메인의 집무실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앨런의 집무실이 있었다.

즉 르메인은 자신의 집무실 바로 맞은편에 앨런이 일할 곳을 마련해 준 것이다.

문만 열면 국왕이 있으니 카이리스에서는 별다른 작위도 없는 앨런에게 이보다 더한 대우가 과연 어디 있겠는가.

"그런 말씀 마시지요."

옆에 있던 앨런이 이렇게 툴툴거렸다.

본래 나르실관에서 일하던 그에게 더 크고 좋은 방을 준다기에 왔더니 르메인의 맞은편 방이었다. 싫다고 하니 르메인은 그럼 그냥 자신의 집무실에 책상 하나를 더 놓겠다고 했다. 국왕의 이런 파격적인 대우에 울며 겨자먹기로 새 집무실에 들어온 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다.

"매일 얼마나 시달리는지 아마 가늠도 안되실 겁니다."

앨런의 주 업무는 마법사단 발칸과 관련된 것이었다. 물론 르메인과 함께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르메인이 자신의 몫을 하나 둘 앨런에게 넘겨놓기 시작했다.

덕분에 '왕자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스승이 남는 시간에 국왕의 일을 조금 돕는' 것을 생각했던 앨런은 이제 일하고 남는 시간에 왕자의 마법을 간신히 보아주는 정도가 되어 있었다.

물론 앨런이 칼리안의 스승을 자처했던 것은 왕궁 안에 들어오기 위한 하나의 명분에 불과하긴 했다. 게다가 칼리안 역시 옛 칼리안이 잘 익혀둔 지식으로 혼자서도 마법을 잘 수련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전하께서 내려주시는 일거리가 어찌나 하해와 같은지."

하염 없는 푸념을 늘어놓는 앨런을 보며 칼리안의 웃음이 다시 시작됐다. 앨런은 얼른 집무실 문을 열어 웃음을 끊지 못하는 제자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렇게 앨런의 집무실 안에 들어선 칼리안은 웃음을 지우려 노력하며 소파에 앉았다.

지금 칼리안이 이렇게 앨런을 따라 아르피아 궁으로 온 것은 르메인과의 독대를 위해서였다. 칼리안의 부탁을 듣기가 무섭게 앨런이 이 곳으로 칼리안을 데려온 것이다.

'어차피 전하와 왕자님은 아무리 몰래 만난다 해도 다 들키게 됩니다. 그러니 그냥 제 집무실에 볼 일이 있다 하고 당당히 가시지요. 그 편이 낫습니다.'

덕분에 칼리안은 앨런과의 대화를 마치자마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매우 많은 이들의 인사를 받으며 당당히 아르피아 궁에 도착했다.

"잠시 계십시오. 이제 전하를 몰래 모셔 올 터이니."

앨런이 이렇게 장난스레 말하며 나간 뒤 칼리안의 심장이 다시 두근두근 소리를 냈다. 르메인과의 비밀스러운 만남을 칼리안이 요청했던 것은 맞았지만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곧바로 만날 줄은 몰랐던 까닭이었다.

칼리안은 앨런의 집무실 소파에 앉아 목을 가다듬고 얼굴 근육도 몇 번 움직여보고 또 옷매무새도 점검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 긴장한 것이다.

오래지 않아 문이 다시 열리며 앨런이 먼저 들어오고 그 뒤를 따라 들어서는 르메인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칼리안이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그래."

짧은 말로 칼리안의 인사를 받은 르메인이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앨런은 다시 밖으로 나갔다. 독대를 원한다 했으므로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 재밌다는 듯 웃으며 이 곳에 온 사람이 맞을까 싶을만큼 진지한 표정이 된 칼리안이 르메인을 향해 말했다.

"갑작스러운 요청에도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그 말투가 상당히 딱딱했다. 그런 칼리안의 얼굴을 보던 르메인이 편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어려워하지 말거라."

칼리안이 어색하게 웃었고 르메인의 말이 이어졌다.

"석찬에서 왕비의 언행을 마음에 담아 둔 것은 아닌지 걱정하였는데 웃고 떠드는 것이 들려오니 좋더구나."

아무래도 복도를 울리는 칼리안의 웃음과 대화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민망해진 칼리안이 사과를 전하려는데 르메인의 말이 먼저 나왔다.

"나쁘게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염려하지 말거라. 오히려 그런 말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자란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으니."

진심어린 르메인의 말에 칼리안은 세크리티아의 국왕 데블란에게도 가져본 적 없던 깊은 감사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런 것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습니다 전하. 마음을 써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 다행한 일이다."

르메인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르메인은 아주 잠시동안 칼리안의 눈을 깊이 응시했다. 그리고 조금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마나실 경이 하는 말이, 네가 또 뭘 부술 생각을 하고 있으니 한번 들어보라 하던데."

걱정과 우려가 함께 들어있는 말이었다. 그런 르메인의 말을 듣기가 무섭게 칼리안의 눈이 문 쪽을 향했다. 앨런이 있을 곳이었다.

지금 르메인의 말만 들어보면 그야말로 플란츠의 몇 배 쯤 되는 망나니가 따로 없지 않은가.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그 마음을 잘 알 것 같아서 르메인은 칼리안의 한숨 소리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곧 칼리안이 앨런을 향한 원망의 눈빛을 접고 르메인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네 전하. 부술 것이 있기는 있습니다."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부술 것인지 마음의 준비를 해 둘 테니. 이야기 해보거라."

"당연히 브리센입니다."

르메인의 시선이 창 밖을 향했다.

"레넌 브리센 자작과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을 말함이더냐."

"아닙니다. 특정 한 명이 아닌 브리센 후작가 그 자체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르메인은 그에 대해 다시 우려하는 대신 가능한 담담하려 애쓰며 말했다.

"그래.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지. 계속 말하거라."

"우선은 기사 가문의 귀족들을 만나볼 생각입니다. 때문에 그것이 혹시 전하께 누가 될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너의 세력이 커지는 것이 나에게 해가 되거나 혹은 내가 경계할 문제가 될지를 묻는 것이더냐."

"네, 전하."

즉 자신의 힘이 커지는 것을 르메인이 어찌 생각하게 될지를 묻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당돌한 질문이다.

그것을 이해한 르메인이 실소하며 말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 하더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가 마법학원을 만든다 하였을 때 마나실 경이 같은 것을 물었지. 헌데 이제는 기사들이구나."

그렇게 말한 르메인이 칼리안을 보며 퍽 자상한 아버지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괜찮으니 원하는대로 해보려무나."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의 뜻을 전한 칼리안이 부탁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이어나갔다.

"제가 대화를 나눠보고자 하는 몇몇 이들이 있습니다만 브리센의 눈을 피해야 합니다. 혹시 석찬 자리에서 플란츠 형님에게 말씀하셨던 것을 조금 키워서 추진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석찬에서 르메인이 꺼낸 말은 모두 빈말이 아니었다. 때문에 르메인은 칼리안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를 바로 알아차렸다.

"사냥을 말하는 것이냐?"

"네 전하."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식사 중 자연스럽게 나온 이야기인데다 제가 아닌 플란츠 형님에게 권하셨던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갑자기 추진된다 해도 의심할 자가 적을 것입니다."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칼리안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게다가 사냥대회이니 기사 가문의 귀족들이 모두 참여한다 하여 이상하게 여겨질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왕비께서도 자리하지 않을 것이고 곧 브리센 변경백에 대한 소문이 퍼질 것이니 브리센 후작 역시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 말에 르메인의 표정이 다소 어두워졌다. 사냥대회 한 번 여는 것이 어려웠던 탓은 아니었다. 칼리안의 말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르메인이 조용히 물었다.

"브리센의 눈은 피해야 한다 말하면서 정작 플란츠가 반드시 참석할 수 밖에 없는 자리를 마련해달라 하는구나. 혹시 플란츠와 왕비가 서로 등을 돌린 것이냐."

"네. 최소한 플란츠 형님은 마음을 돌린 것으로 여겨집니다."

르메인은 다소 착잡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려울 것 없는 일이다. 준비하라 일러두마."

흔쾌한 허락에 칼리안은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 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부탁드리고자 하는 것이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얘기하거라."

이어진 칼리안의 말은 르메인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카이리시스와 지그프리드령 사이에 대규모 이동 마법진을 만들어두고 싶습니다. 추후에는 다른 지역으로도 연결되도록 하고자 합니다."

"지그프리드라."

코끼리들의 땅. 그곳과 카이리시스를 잇는 이동 마법진.

"만약의 경우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이 사흘만에 카이리시스를 뒤덮을 수도 있겠구나."

"맞습니다, 전하."

"마나실 경을 통해 네 시종이 지그프리드의 장자임을 들어 알고 있다. 가주인 지그프리드 공의 성정 역시 잘 알고 있지만······ 지금 네가 꺼낸 이야기는 그들에 대한 신뢰만으로 쉽게 결정할 수 있을 문제는 아닌 것 같구나."

르메인은 한동안 생각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쉬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던 터라.

"향후에 다시 답을 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려무나."

"그리하겠습니다."

결국 르메인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답을 했다.

* * *

사람 취향이란 본래 어느 한 순간 손바닥 뒤집히듯 바뀐다.

베른이 즐겨 마셨던 커피를 칼리안이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실리케의 앞에서 몸 속의 독을 풀었던 그 날에 마신 것이 커피였기 때문에 칼리안은 특별히 누가 주는 것을 거부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커피를 먼저 찾아서 마시지도 않았다. 은근한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 이후 얀은 단 한번도 칼리안에게 커피를 내어 준 적이 없었다.

항상 커피를 달고 사는 앨런이지만 그 역시 이런 칼리안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체르밀 궁에서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때문에 르메인과의 대화를 마친 칼리안과 함께 체르밀 궁으로 되돌아온 앨런은 무엇을 마실지 묻는 얀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 것이나 주면 되네."

그리고 앨런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아르센은 같은 것을 묻는 얀에게 정중히 대답했다.

"진한 커피 한 잔만 부탁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흔쾌히 답한 얀은 눈 밑이 퀭해진 이 마법사의 앞에 심연의 어둠을 담은 듯한 고농축 커피를 툭 내려놓았다.

민트차를 한 입 머금다 곁눈질로 커피를 본 앨런은 아르센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자네. 그거 다 마시면 죽을걸세."

"특별히 다를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과로로 죽든 아공간 비슷한 색을 내는 커피를 마시고 죽든.

아르센은 별 거부감 없이 커피 한 잔을 쭉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본 칼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공간이동 마법진을 개발하지 못해 그러는 겁니까."

특별히 아르센을 압박한 적 없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르메인도 바로 답을 주지 못하겠다 했으니 급할 것이 없던데다가 저러다 아르센이 발칸의 군단장이 되기도 전에 죽을 것 같아서였다.

"일단 오늘은 좀 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냥 일반적인 마법진으로 만드세요. 경비를 강화하면 됩니다."

이렇게까지 아르센을 혹사시킬 생각은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은 자신이 주문했던 것을 물렸다.

"아닙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르센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답을 내었습니다, 왕자님. 맹세의 인이 발동하는 원리를 변형했습니다. 다수의 대상과 마법진 사이의 사용 계약이 가능합니다."

그럼 잠이 아니라 생명을 줄일 것 같은 저 커피는 왜 마셨냐고 묻는 듯한 눈의 칼리안을 향해 아르센이 씩 웃으며 말을 맺었다.

"왕자님께서 이동 마법진을 독점하실 수 있습니다."

참으로 마음에 드는 말이다.

칼리안이 아르센을 보며 신뢰의 미소를 보였다.

"고생했습니다."

칼리안의 이 말을 듣기 전에 잠들까봐 얀의 커피를 들이켰던 아르센은 그대로 칼리안의 소파에 졸도하듯 쓰러졌다. 그리고 오랜만의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것을 본 앨런이 칼리안을 향해 물었다.

"저 친구 할 일은 더 없습니까?"

"네. 마법진 구축이야 마법사 협회의 마법사들을 파견시켜 진행할 생각이니까요."

"그럼 저 친구는 이제 다시 한가한 마법사가 되었겠습니다."

앨런이 그것을 왜 묻는지 눈치챈 칼리안이 차마 대답하지 못하자 그 얼굴에서 마음대로 대답을 찾은 앨런이 흡족하게 웃었다.

마법사단의 일이 아르피아 궁에 잔뜩 쌓여 있거늘.

장래 군단장이 될 이가 이리 한가해서야 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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