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68화 (69/527)

제14장. 오랜만입니다 (5)

- 엘프 시아, 장미, 조약돌, 시간의 축, 시스파니안.

그리고 세렌티.

순식간에 떠오르는 여러 단어들을 뇌리에 새긴 칼리안이 한 발을 뗐다. 그러자 얀이 나서며 말했다.

"제가 살펴볼게요. 위험하니 물러나 계세요."

무슨 용기인지는 몰라도 얀이 이런 말을 했고 칼리안은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리고 한 걸음씩 뒤로 걸었다.

대여섯 걸음을 물러서자 조약돌의 빛이 사라졌다. 물론 꽃의 빛도 사라졌다.

다시 앞으로 몇 걸음.

꽃과 돌이 함께 빛난다.

칼리안은 곧 장미 정원을 한바퀴 돌며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같은 빛을 내는 것은 찾지 못했다.

같은 꽃이 더 없음을 확인한 칼리안이 다시 본래 서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신중한 걸음으로 꽃 앞으로 걸어가 왼손에는 돌을 든 채 오른손을 내밀어 꽃잎을 건드렸다.

그러자

- 파스스······.

붉은 꽃잎이 순식간에 시들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함께 조약돌의 빛도 사라졌다.

생각지 못한 모습에 섣불리 손을 댔다는 것을 깨달은 칼리안이 당혹스러운 소리를 냈다.

"이런."

떨어진 꽃잎은 곧 검게 타들어간 재와 같이 바스러져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마치 멈추어 놓았던 시간이 한 순간에 흐른 것 같다고 칼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다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그 생각의 꼬리를 잡아챘다.

'시간.'

장미가 언제 피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만약.

"만약 오래 전부터 피어 있던 것이라면."

그렇게 가정한 칼리안의 눈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남들보다 한 발 앞선 시간의 말을 듣고 대답하던 시아.

그리고 시간을 멈추어 둔 것처럼 오랫동안 피어 있던 꽃.

"역시, 틀어진 시간을 바로잡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던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시간을 바로잡는다면 가장 먼저 바로잡혀야 할 것은 칼리안 자신이 아닌가. 그런 칼리안이 멀쩡히 서서 이 곳에 있으니 지금 떠올린 결론은 정답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 그녀는 네가 조급하게 굴지 않기를 바란다.

시스파니안의 음성이 기억을 헤집고 올라왔다.

그것이 주는 답답함 때문에 칼리안은 치미는 욕지거리를 집어넣으려 아주 오랫동안 눈을 감았다 떴다.

"눈 앞에서 시간이 흘러갔는데 조급하게 굴지 말라니요."

그리고 냉소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 * *

앨런은 따로 집사나 하인을 두지 않았다.

어지간한 것은 마법으로 대충 해결할 수 있었던데다, 마법사들이 으레 그렇듯이 집에 외부인이 드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컸다.

그러다보니 카이리시스에서 앨런이 고용한 사람은 딱 한명. 마부 오스카 뿐이었다.

"마나실 님 오늘은 귀가가 빠르시네요."

벌써 반년 가까이 앨런의 유명한 자개 마차를 몰고 있는 오스카가 이렇게 말하며 친근해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빠르다 해도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뒤였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새벽이 아닌 밤 공기를 맡으며 집에 돌아가려는 길이었다. 그나마도 르메인이 왕자들과 석찬을 가지기로 하지 않았으면 언감생심 꿈도 못 꾸었을 일이리라.

오스카의 인사에 앨런이 그와 비슷하게 웃으며 말했다.

"빨리 도망가세."

"네? 도망이라니요?"

오스카가 놀라서 물었고 앨런은 대답 대신 일단 마차에 올랐다. 마부석 뒤의 들창 너머로 어딘가 신난 듯한 앨런의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전하께서 석찬에 가셨다네. 그 사이에 대강대강 정리해두고 몰래 도망쳐 나오는 길이니 얼른 가야 하네."

분명 르메인은 석찬 이후 마법사단에 대한 일을 마저 하자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앨런은 그 말을 못들은 척 급한 일만 대충 마무리한 뒤 이렇게 빠져나온 것이었다.

자신이 없어진 것을 알면 르메인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괜스레 우쭐해진 마음에 앨런의 입이 다시 열렸다.

"오늘 리베른에 살던 며느리와 손녀가 도착했네. 전하께서는 어찌 그리도 무심하신지. 이런 날은 알아서 집에 가보라 하는 것이 도리 아닌가? 늙은이 부려먹는 것에 아주 재미가 드셨으니."

오스카가 큰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그러셨군요. 알겠습니다. 얼른 도망가겠습니다."

오스카는 곧 말의 고삐를 고정시킨 끈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앨런이 한숨을 쉬었다.

마차를 향해 누군가 황급히 달려오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르메인이 보낸 사람이 아니면 집에 가려는 앨런을 붙들러 올 이가 없었다. 때문에 앨런이 입을 열어 구시렁거렸다.

"아니, 대체 밥을 어디다 말아드시고 왔기에 벌써 아셨나?"

"네?"

앨런에게 달려오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마부가 되물었고 앨런은 대답 없이 다시 한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곧 멀리서 황급히 앨런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나실 경, 기다려 주십시오.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그제야 앨런의 한숨과 푸념 소리를 이해한 오스카가 들창 너머로 말을 전했다.

"마나실 님. 아무래도 도망 못가시겠습니다."

결국 앨런은 빨리 출발하지 못한 것을 조금 미안해하는 오스카를 뒤로 하고 터덜터덜 아르피아 궁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르메인을 만나면 꼭 한 소리를 해 줘야지. 그런 다짐을 하면서.

그런데 시종이 앨런을 안내한 것은 집무실이 아니었다.

아르피아 궁의 후원 한 가운데에서 익숙한 기운 하나가 멀뚱히 있는 것이 느껴졌으므로 앨런은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아드님이 끊으신 것을 대신 드시나."

또 술을 마시자는 것이다. 그것도, 이런 쌀쌀한 밤에.

앨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리고 더 걸을 것 없이 손가락 한 번을 움직여 르메인의 바로 앞으로 워프했다. 술잔에 술을 따르려던 르메인이 슬쩍 고개를 드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오는 것을 보니 마법사가 맞기는 맞군."

얀이 그랬던 것처럼 꽤 놀라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무덤덤하다. 재미가 사라진 앨런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이런 날 밖에 앉아 술 드시면 입 돌아갑니다."

그리고는 손을 튕겨 르메인 주변의 온도를 조금 올렸다. 몸이 따뜻해진 것을 느낀 르메인의 입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났다.

"역시 술 상대로 마법사만한 이가 없지."

르메인이 자신의 맞은편 바닥을 손으로 툭 쳤다.

다른 말 없이 르메인의 손이 닿은 곳에 털썩 앉은 앨런이 르메인의 손에서 술병을 건네 받아 술을 한 잔 따라주었다. 그리곤 그 앞에 놓인 빈 잔에 자신의 것도 따랐다.

세 왕자와의 저녁을 말아먹고 온 뒤에 갑자기 술이라니.

무슨 일이 있는지 묻는 대신 앨런이 르메인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히며 말했다.

"지난 것을 생각해보아야 속만 아픕니다."

"사람 속 들여다보는 마법도 있나."

"그런 것이 있겠습니까."

신통방통한 앨런의 눈치가 어디 칼리안에게만 쓰이겠는가. 멍하니 먼 곳을 보던 르메인이 고개를 돌려 앨런을 쳐다봤다.

"뻔한 일이지요. 모두가 성인이 된 왕자들 셋을 한꺼번에 보고 왔으니, 이런 자리가 앞으로 얼마나 더 있을지 착잡하셨을 것 아닙니까. 경쟁에서 밀릴 두 놈을 걱정하다보니 먼 곳에 갇힌 형 생각도 나고 실리케를 들인 것이 후회도 되고 하신 것이겠지요."

그러게 하나만 낳을 것이지 왕자를 셋이나 만들어 놓고는 왜 후회를 하는 것인지.

잠깐 이런 생각을 하던 앨런은 칼리안이 막내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르메인이 셋을 낳았으니 자신이 그런 어여쁜 제자를 만난 것이 아닌가.

"어떻게 참 잘도 알아보는군."

"그냥 앞길만 보고 사시지요."

그 속을 어떻게 알았는지를 알려주지 않는 것으로 오늘의 이른 귀가를 막은 르메인에 대한 복수를 마친 앨런이 이렇게 말했다.

그 후로 둘은 말 없이 술잔만 주고 받았다.

개울에 흐르는 물 소리가 익숙해져 풀벌레 소리가 더 크게 느껴질 때 쯤 앨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세 왕자님을 다 합쳐도 체이스 하나 못 따라간다 생각했습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 말인가."

르메인은 뜬금 없이 왜 남의 자식들을 비교하고 있느냐는 말 대신 조용히 말을 받았다.

앨런은 고개를 끄덕끄덕했고 르메인이 피식 웃었다.

"그 뱀 같은 성정의 데블란 밑에서 어떻게 그런 아들이 났는지 신기하다고, 나도 그리 생각한 적이 있었지."

"네. 아무튼 전하의 세 아드님이 체이스만큼 대단한 인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두고 보니 영 천치들은 아니더군요. 다들 알아서 제 살길은 마련해두고 움직일테니 걱정 마시지요."

그 말을 들은 르메인의 눈이 잠시 앨런을 응시했다.

제 살길 마련하기 힘들어보이는 한 놈이 있었기 때문이다. 곧 르메인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만에 하나 칼리안이 길을 잃게 되거든."

그렇게 나온 말이 한동안 이어지지 않았다. 르메인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뒤 말을 이었다.

"경에게 부탁을 하고 싶네."

만약 칼리안이 왕세자위에 앉지 못하면 칼리안을 살려서 도망쳐 달라는 말이었다. 굳이 그것을 앨런에게 부탁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칼리안이 밀려나는 상황이라면 그때 자신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대라면 그런 사정을 잘 알테고 또 칼리안을 굉장히 아끼니 이런 부탁 정도야 들어줄 것 같은데."

그런데 진지한 고민 끝에 건넨 르메인의 말을 들은 앨런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전하의 막내 아드님을 챙겨갈 일이 있을는지."

"그것이 무슨 뜻인가."

앨런이 거절의 의사를 보였다고 생각한 르메인의 얼굴이 크게 찌푸려졌다. 그것을 본 앨런이 장난기 다분한 눈을 하며 물었다.

"새끼 코끼리 한 마리가 전하의 막내 아드님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아십니까?"

그리고 이어진 말에 앨런의 워프에도 담담했던 르메인의 눈이 치켜떠졌다.

칼리안이 밀려나게 된다면 칼리안이 아니라 나머지 두 왕자의 살길과 카이리스의 앞길을 걱정해야 된다는 것을, 그러니 앨런은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는 것을 알게 된 까닭이었다.

결국 술이 완전히 깨버렸다.

* * *

칼리안은 이틀 동안 조찬에 나가지 않았다.

여독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는 진심과 핑계가 반반 섞인 이유를 댔다.

"왕자님. 혹시 내일도 조찬을 물릴 생각이십니까?"

결국 이틀 째 되는 날 밤, 얀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실리케가 왕세자를 언급하고 간 것과 연관을 짓는다거나 혹은 칼리안의 건강을 염려하는 소리가 나온다거나 하는 것들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내일까지만. 모레부터는 갈게."

아침 하나 마음대로 못 하는 생활로 돌아온 것을 여실히 깨닫거나 불평하는 대신 칼리안은 이렇게만 대답했다.

얀도 칼리안이 왜 조찬에 나서지 않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다른 잔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전해둘게요. 그럼 저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주무시기 전에 창문 꼭 닫으시고요."

"알았어."

그렇게 끝인사를 전한 얀이 밖으로 나가 문을 잠근 뒤 혼자 남은 칼리안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후우."

칼리안이 조찬에 나가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

란델 때문이었다.

칼리안은 빛난 것이 단지 장미꽃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란델을 연관지었다. 논리적인 근거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란델이 가꾸는 정원이었던 까닭이었다.

조약돌과 란델이 관련되어 있으리라는 의심까지는 아니었다. 단지 장미의 시간을 멈춰놓은 것이 혹시 란델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에 생각이 미쳤을 뿐이었다. 신관들이 태어나는 텐실의 피가 란델에게도 흐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뜬구름 잡는 의심을 뒷받침할 근거가 아무것도 없으니 우선은 란델의 행보를 지켜보아야겠다는 결정을 내린 칼리안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란델을 의심하는 눈길을 보낼까봐 일단 란델과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사람 마음을 꿰뚫는 것이 앨런과 비슷한 수준이 아니던가?

그렇게 잠자리에 누워 이런 저런 생각을 이어가던 칼리안은 곧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동이 트기 직전의 어두운 새벽.

- 사락······.

바람에 커튼이 흔들리는 소리가 나고 감겨 있던 칼리안의 눈이 스르륵 떠졌다.

'침입자.'

누군가의 소리 죽인 발걸음을 느꼈다.

그리고 얀은 분명 방문을 잠궜다.

얀이 가진 열쇠가 아닌 다른 것으로 열면 시스파니안이 만든 경보 마법이 발동된다. 그러니 방문으로 누군가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답답한 기분에 창을 열어둔 채로 잠에 들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창문의 경보 마법이 발동되지 않은 것이다.

'얀의 말을 잘 들었어야 했는데. 귀찮은 일이 생기겠네.'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그리고 여전히 누운 채로 침입자가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벌써부터 이리 환영해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실리케. 혹은 란델.

과연 누가 보낸 손님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잠시 후 침실 커튼을 조용히 젖히는 소리가 났다.

이제 완연히 가까워진 침입자의 기색을 살피던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익숙한, 하지만 이렇게 찾아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사람의 기운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칼리안은 '검'을 만들려던 것을 미루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날카롭게 빛나는 눈으로 침입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뭡니까."

침입자는 얼굴을 가리지도 않은 채였다.

그리고 그는 칼리안이 깨어난 것에 놀라지 않았다. 경계심 가득한 칼리안의 말에도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칼리안의 눈을 마주보며 낮은 목소리를 냈다.

"마법이나 좀 쓴다더니, 바람결에 깰 줄을 알고."

그것이 누구든 이 시간에 창문으로 들어온 이를 반겨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불쾌한 낯빛을 굳이 가리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왜 오셨는지 물은 겁니다. 이런 시간에, 이런 식으로."

눈빛부터 목소리까지 온 몸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는 칼리안을 보며 손님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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