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오랜만입니다 (4)
오랜만이라는 말.
특별히 하대도 아니었으나 그렇다 하여 존대도 아니었다.
아무리 르메인의 앞이었다 해도 또 아무리 란델과 플란츠가 있는 곳이었다 해도 실리케에게 그 이상의 높임을 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 이유를 모를 이는 이 곳에 없었으므로 칼리안을 탓하는 이는 없었다. 물론 실리케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시종이 빼 주는 의자에 앉은 실리케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칼리안에게 여전히 하대를 하니 실리케 역시 예의를 차리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딱히 존대를 기대하지도 않았던 칼리안은 신경쓰지 않고 식사를 이어나갔다.
"무슨 일이지."
칼리안을 쳐다보는 실리케를 향해 르메인이 물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실리케는 이러한 홀대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초대되지 않은 식사 자리에 찾아올 때부터 이미 각오했을 것이다. 실리케가 르메인을 보며 말했다.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전하."
"보던 것을 안 보게 되었으니."
르메인은 굳이 가릴 것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이는군."
르메인이 꺼내든 것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적대적인 말이었다.
르메인의 눈에 안 보이다 보이게 된 실리케는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내는 저 말에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러더니 칼리안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3왕자가 잘 다녀왔는지 그것이 궁금해서 왔어요."
그리고 칼리안을 향해 웃는 얼굴을 꺼내 보였다.
르메인은 마치 칼리안에게로 향하는 실리케의 시선을 가로채듯 말했다.
"굳이 그것을 확인하러 온 것인가."
"탈이 많던 아이였으니까요."
탈이 많았다니.
친부와 계모의 기싸움을 조용히 듣고 있던 칼리안의 눈썹 끝이 잠시 움직였다.
저 정도의 음해에 기분이 나빠져서는 아니었다. 평생 일으킨 탈과 궁 밖을 나갔던 잠깐 사이에 벌인 탈 중에 어떤 것이 더 많은지 가늠이 어려웠던 탓이다.
'네가 부리려던 두 형제가 모두 나로 인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면 그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칼리안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르메인이 조용하지만 위엄 있는 소리로 경고의 말을 보냈다.
"실리케. 왕자에 대한 말을 신중히 꺼내도록."
실리케는 가벼운 말실수였다는 듯이 웃었다. 칼리안은 일상적인 안부인사를 들은 사람처럼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보시다시피 잘 다녀왔습니다."
"그리 보이는구나."
"앓고 갔던 감기가 워낙 독했던지라. 밖에서는 그만큼 큰 탈을 줄 것이 없더군요."
실리케의 독을 언급하자 르메인의 얼굴이 다소 경직됐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할 시간이 잠시 흘렀다. 그 뒤에는 실리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 참. 다행이구나."
"덕분입니다. 워낙 저에게 신경을 써주시니."
칼리안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의 대답에 플란츠가 웃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리고 실리케는 아주 잠시동안 웃음을 지웠다.
더는 말싸움을 하고 싶지 않으니 이만 나가달라는 말이 칼리안의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때문에 칼리안은 물잔을 들어 물과 말을 함께 삼켜냈다. 들어오라 한 것이 르메인이었으니 칼리안이 나가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칼리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실리케가 이번에는 르메인 쪽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전하."
칼리안은 질렸다는 표정을 그대로 지어보였다.
란델 쪽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물론 실리케는 신경쓰지 않았다.
"지그프리드의 땅에서 놀라운 일이 있었다 하던데. 혹시 들으셨나요?"
르메인이 대답 없이 실리케를 쳐다봤다.
실리케가 자상한 어머니와 같은 얼굴이 되어 칼리안을 보았다.
"상서로운 일이 있었다며 사람들의 칭찬이 헤이시아 궁에까지 들어오니, 정말 놀랍고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단다."
"기쁘셨다니 다행입니다."
칼리안이 마음 속으로 실소했다. 무슨 말을 꺼내려 저렇게 거창한 칭찬을 입에 담는지 얼추 예상이 되었다. 실리케의 시선이 다시 르메인을 향했다.
"그런데 함께 들려오는 말이 있다기에 그것을 여쭤보고 싶네요."
시스파니안의 둥지에서 있었던 일과 묶여 있는 소문은 딱 하나뿐이었다. 적당히 운을 뗀 실리케가 르메인의 푸른 눈을 노려보듯 쳐다보며 꺼내지 말아야 할 소리를 입 밖에 냈다.
"정말로 다음 왕세자로 칼리안 저 아이를 생각하고 계시는 것인지. 그것을 알려주세요."
칼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확히 칼리안이 예상한 바로 그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눈에 보이는 것이 없구나. 실리케.'
왕세자.
세 명의 왕자가 있는 이 자리에서 그 말은 하나의 금기어와도 같았다. 실리케가 그것을 꺼내놓은 것이다. 그것도 하필 칼리안을 걸고 넘어지면서.
르메인이 아무 말 없이 실리케를 쳐다봤다.
저 말에 르메인이 무슨 대답을 하겠는가.
그렇다 할 수도 아니라 할 수도 심지어 대답 없이 실리케를 내쫓을 수도 없다.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여질 테니까.
일단은 이 쯤에서 저 질문을 멈추게 하려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르메인 쪽에서 여유로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얼마 전에 마나실 경이 그런 말을 하더군."
'스승님?'
의외의 이름이 이 자리에서 나오자 칼리안이 나서려던 것을 참고 르메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일 마음에 안 드는 놈부터 카밀론에 보내라. 그렇게 하면 알아서 사라질 것이다, 라고. 허나 모두가 소중한 나의 아들인 것을. 그 때문에 내 고민이 깊었는데."
그렇게 말한 르메인의 눈이 왕자들을 한번씩 훑었다.
곧 르메인의 푸른 눈동자가 실리케를 깊이 응시했다. 르메인은 아무런 감정도 들어가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지금 그대가 고민을 덜어주려 하고 있군. 고맙게도."
실리케가 고개를 숙였다.
일그러진 얼굴을 감출 부채가 없어서였다.
칼리안도 고개를 숙였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였다.
'아아.'
앨런 마나실의 입에 세렌티의 영광 있으라!
* * *
르메인을 궁지에 몰아넣을 생각으로 왔던 길이다.
칼리안을 세자위에 올리겠다 하면 편애하는 것이냐며 반발하려 했고 올리지 않겠다 하면 그 말을 약속해달라 요구하려 했다. 대답을 미룬다면 기사단 카에라를 움직인 이유를 추궁하려 했다.
그런데 르메인은 그냥 플란츠를 세자위에 올리겠다는 말로 오히려 실리케를 협박해왔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인지.
"더 할 말이 없다면 나가도록. 정말로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렇게 말한 르메인이 문 근처에 선 시종들을 향해 손짓을 보냈고 시종들이 문을 열었다. 그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실리케에게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괜한 걸음을 하게 된 실리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의 오만함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나를 이렇게 대한 것을 후회할 날이 올거예요. 반드시."
전 왕비 아이샤가 죽은 뒤 브리센의 힘을 얻으려 실리케를 왕비로 들였던 그 날부터 이미 후회만 하고 있었다는 말을 르메인은 굳이 전해주지 않았다.
여전한 태도의 르메인을 뒤로한 채 실리케가 다시 또각 또각 소리를 내며 밖으로 나갔다.
'브리센 변경백을 돌려보내고 온 것이 천만다행이군.'
실리케의 뒷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이런 생각을 했다.
이런 상황에 그레이까지 수도에 들어왔다면 당장 내전이 벌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앨런 마나실에게 잘 배운 말 한마디로 실리케를 내보낸 르메인이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살폈다. 그리고 실리케를 대할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진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에게 악의가 있어 한 말이 아니니라. 왕비와 너를 같은 선에서 보고 있지 않으니 오해 말거라."
실리케에게 했던 이야기에 혹시라도 플란츠가 신경을 쓸까봐 우려한 것이다. 플란츠가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압니다."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여보인 르메인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둘러보는 듯한 눈을 했다.
"너희들의 백부가 어찌 지내고 있는지 모두 알 것이다."
칼리안의 백부라 함은 곧 르메인의 친형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는 칼리안만 빼고 다들 아는 모양이었다. 둘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베른은 타국 국왕의 형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옛 칼리안은 자신이 왕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므로 르메인이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지나 남은 형제가 어떻게 되었는지에는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았다. 관심을 가져봐야 자신의 어두운 미래만 미리 알게 되는 꼴이었으니까.
'얀에게 물어봐야겠네.'
그리고 지금의 칼리안은 르메인에게도 형이 있었다는 것은 알았으나 그 사람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까지 관심을 둘 만큼 여유롭지를 않았다.
"나는 너희들 중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될 이가 없기를 바란다.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는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렇게 말을 마친 르메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식사를 더 이어나갈 분위기가 아니었으므로 왕자들도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연회장 밖에서 기다리던 중 실리케가 들어갔음을 알게 된 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석찬은 잘 하셨습니까?"
"응. 별 일 없었으니 걱정하지 마."
이 말을 듣고서야 안심하는 얀을 보며 칼리안이 웃었다.
잠시 뒤, 가장 늦게 체르밀에 도착한 칼리안이 말했다.
"잠깐 걷자. 소화가 안돼."
얀은 칼리안이 키가 크기 시작하면서 얼마나 많은 양을 먹고 잘 소화해내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얀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는 표정 대신 알겠다는 말만 하며 칼리안의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오늘만 두 번째로 호수 옆을 걸어가는 동안 칼리안이 조금 전 르메인이 전했던 말을 들려줬다.
"전하의 형님이 어떻게 되셨는지, 혹시 알아?"
"그것이······."
조금 복잡한 표정이 된 얀이 대답을 이었다.
"본래 세자위에서 밀려난 왕자들은 스무 살이 넘으면 카이리시스를 떠납니다. 자신의 영지를 하사받고 그 곳에서 지내요. 사병을 거느리지 못하고 왕실에서 병사들을 보내준다는 것과 카이리시스에 닷새 이상 머물지 못한다는 것을 빼면 별다른 제약이 없어요."
그것은 싸움 없이 세자위를 받지 못한 다른 왕자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건 나도 알아. 그런데 전하께서 굳이 말씀을 하셨으면 이번에는 결과가 조금 달랐다는 뜻인 것 같은데."
"네. 그랬어요."
역시나 얀이 다시 입을 열어 설명을 이어나갔다.
"사실 과거에도 그렇게 여생을 보낸 왕자들은 그리 많지 않으셨어요. 대부분은 형제가 왕이 된 이후 광장에 레니시타 잎이 깔리거나······."
참수형이나 교수형에 처해진다는 뜻이다.
섣불리 말을 꺼내기 어려운 주제였으니 얀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입을 열었다.
"외딴 곳에 갇혀 평생을 보냅니다."
"외딴 곳이라."
"선왕께서는 시스파니안의 축복으로도 고쳐지지 않는 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일찍부터 왕세자를 결정했고, 그 분이 지금 전하세요."
"그랬지."
"왕세자위가 결정된 직후에 전하의 형님이신 아스난 님께서 그 일에 반기를 들었고, 아스난 님은 지금 지그프리드령보다 더 남쪽에 있는 베레카 협곡의 깊은 곳에 지어진 탑에 계십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를 걱정하는 것으로 보였던지 얀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왕자님께서 카밀론에 들어가지 못하시면 저희 집으로 모셔갈 생각이니까요."
당당하게 꺼내놓는 얀의 계획에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되려면 지그프리드는 공작령이 아니라 왕국이 되어야 할 텐데."
카이리스에 독립을 선언하고 전쟁이라도 벌이지 않는 이상은 왕세자위에서 밀려난 왕자를 데리고 살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못할 것 있겠습니까."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 아냐?"
악의 없이 오로지 칼리안만 생각하여 해주는 말에, 칼리안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튼 전하께서는 형제들이 서로 피 튀는 싸움이나 하다 죽거나 갇혀 살게 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을 해주신 거겠네."
"가능한 일일까요."
잠시 가늠해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평화로운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겠지."
지금 저 둘과 사이좋게 지낸다니.
꿈에서도 이뤄지기 어려울 말이다.
그렇게 칼리안이 잠시동안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 왕자님."
얀의 조용한 목소리가 칼리안을 불러세웠다.
얀을 쳐다보니 그 시선이 칼리안의 허리춤에 닿아 있었다.
얀의 눈길을 따라간 칼리안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칼리안의 허리춤 정확히는 재킷의 주머니 안에서 붉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속에 든 것이 무엇인지 칼리안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엘프 루카로부터 받아왔던 검은 조약돌이었다. 시스파니안이 지니고 있으라 했기 때문에 버릇처럼 항상 주머니에 넣어두고 다녔던 것이었으나 지금처럼 빛이 나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실드]
갑작스러운 상황에 칼리안이 긴장하며 얀의 앞에 실드 하나를 만들었다. 혹시라도 폭발 같은 일이 벌어질까봐 걱정한 것이다. 곧 칼리안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조약돌을 꺼내려다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
정원의 한 구석 장미 나무 아래 자라난 작은 꽃가지.
이 쌀쌀한 날에 홀로 피어있는 붉은 장미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단순한 꽃이었다면 그저 이상하게 생각하고 넘겼을 것이다.
작은 꽃이 참 늦게도 피었구나 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으므로 칼리안의 입에서 의문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왜?"
장미는 조약돌과 똑같은 색의 빛을 내고 있었다.
칼리안의 눈과도 닮은 피같이 붉은 빛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