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66화 (67/527)

제14장. 오랜만입니다 (3)

체르밀 궁은 언제나 같았다.

그저 계절이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이 없었다.

칼리안의 무사 귀환을 축하한다며 쌓여 있는 선물상자도 똑같았다.

"그 동안 이 곳이 참 쓸쓸했는데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기쁩니다, 왕자님."

무뚝뚝한 메를린이 이런 인사를 건네자 메를린 뿐 아니라 다른 시녀들도 돌아가며 한 마디씩 칼리안을 반겼다. 칼리안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마움을 전했다.

왕궁을 떠나있던 그 짧은 기간만에 환복을 도와주는 손길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체르밀에서 오직 칼리안만 변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것은 다시 익숙해져야 할 칼리안의 일상이었다.

"저도 집에 돌아갔을 때 그랬어요. 오늘 푹 쉬시고 내일부터 다시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금방 적응될테니 걱정마세요."

어색해하는 티가 많이 났던지 얀이 이렇게 말하며 민트차를 건네왔다. 밖에서 가장 많이 마셨던 것이었기 때문에 차를 본 칼리안이 괜히 웃었다.

떠날 때는 더운 바람이 불었는데 돌아오니 어느새 쌀쌀한 바람이 되어 있었다. 그것이 썩 나쁘지 않았으므로 칼리안은 잠시 테라스로 차를 들고 나가 홀짝홀짝 여유를 즐겼다.

칼리안을 따라 나온 얀이 옆에 놓인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왕자를 모시는 온전한 시종으로의 생활에 얀도 아직 다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그에 대해 지적할 마음은 조금도 없던 칼리안은 그냥 티가 나지 않도록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참 이상하지."

칼리안이 잔잔한 인공호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칼날 위에 살고 있는 왕자들이 셋이나 있는데. 왕궁 밖 어느 곳보다도 조용한 것이."

그렇게 말한 칼리안은 손에 들린 민트차를 가만히 마셨다.

오랜만에 돌아온 일상에 상념 가득한 오전의 한 때가 그렇게 묵묵히 지나갔다.

* * *

앨런은 정말 바빴다.

발칸의 창단을 앞두고 마지막 정비를 하고 있었다. 칼리안과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던 앨런은 점심 시간을 조금 넘긴 뒤에야 도착했다. 시계도 보지 못하고 일하느라 왕자와의 약속 시간에 늦을 만큼 바빴다.

심지어 앨런은 가족인 레이첼과 베로니카와도 아직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고 했다. 둘은 아직 입궁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곧바로 앨런의 저택으로 가야 했던 탓이다.

"둘의 입궁을 전하께 요청할 만큼의 시간도 없을 만큼 바쁘셨던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염두에 두지 마시지요. 어차피 내일부터는 체르밀까지도 드나들 수 있을 터이니."

앨런이 훌륭하게 잘 구워진 스테이크를 썰어내며 이렇게 말했다.

왕자들의 공간에 굳이 두 모녀의 출입을 요청하게 된 것은 이동 마법진 때문이었다. 언젠가 아르센이 생각했던 것처럼 칼리안도 마법사였으므로 도무지 답을 내지 못하고 있는 '특정인만 사용할 수 있는 이동 마법진'을 만드는 방법을 함께 연구해보기로 했던 것이다. 칼리안이 이곳 저곳을 다니기 어려웠으니 연구할 이들을 칼리안의 방으로 불러올 수 밖에.

레이첼과 베로니카를 생각하던 앨런이 칼리안을 보며 물었다.

"제 가족들과는 이야기를 좀 나눠보셨습니까?"

칼리안이 앨런과 똑같은 머리색을 가진 베로니카를 떠올려 보았다. 칼리안보다 한 살이 적고 이제 막 2서클을 만들어낸 어린 마법사라는 것 외에는 특별히 아는 것이 없었다.

"그레이스 경과는 얘기를 좀 나눴습니다만. 베로니카와는 첫인사 외에는 말을 나누질 못했습니다."

"차차 나누면 될 일이겠지요."

"네. 서두를 필요 없으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칼리안이 카이리스에는 흔하지만 자신에게는 조금 생소한 견과류인 개암, 즉 헤이즐넛을 하나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일상적인 이야기와 그간 서로 겪은 일들을 한동안 주고 받으며 식사를 마친 뒤, 둘은 오랜만의 산책에 나섰다. 장미 정원까지 걸어왔을 즈음 앨런의 입이 먼저 열렸다.

"한번 보여주시지요."

무엇을 보여달라는 것인지 되물을 필요가 없었다. 아마 앨런은 칼리안을 만나보기가 무섭게 이것부터 보고 싶었을 것이다. 칼리안이 손을 내밀어 마력을 집중해보였다. 무엇이든 베어버릴 듯한 예리한 기운의 마력이 둥근 구체를 이루었다.

"허."

그것을 본 앨런이 정말 신기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 지고한 시스파니안도 신기하게 생각했던 것이니 앨런이라 하여 달랐을까.

"혹시 그럼 이 마력에 속성의 힘도 담을 수 있습니까?"

칼리안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마력을 다시 감추었다.

"가능은 합니다만 아직 자유롭게 쓸 만큼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검으로도 쓰고 몽둥이로도 쓰셨다 이 말이군요."

아아, 실로 고급스러운 몽둥이였다.

칼리안이 전날의 일을 회상하며 피식 웃었다. 참지 않고 온전하게 화를 내 본 것이 얼마만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범상치 않은 힘이니 혹시라도 브리센 변경백이 함부로 떠들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 걱정입니다."

그 말에 칼리안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에 베여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겠지만 맞아서 죽게 되리라고는 생각한 적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 자신을 그렇게 매타작 할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서워하고 있을 것이라서. 운이 좋아 다시 걷고 검을 들게 된다 하더라도 저와 두번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아 할 테니까요."

"대체 사람을 얼마나 두드려 두었기에 소드마스터였던 이가 그 정도의 두려움을 가지게 된 것인지."

앨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카이리시스에서는 그런 사고를 내시면 안 됩니다, 왕자님."

"손속이 무자비했던 것은 저도 모르지 않습니다. 변경백이 수도 안으로 들어와 전하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과감히 저질렀던 일이었으니 수도에서는 그렇게 마음대로 굴 일 없을 겁니다."

그것을 보던 앨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아무튼 이제는 후작이 좋지 않은 소문에 시달리겠습니다."

"네. 아들을 아주 잔인하게 대했으니 여파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 발칸 창단 발표는 그 소문이 생긴 이후로 조금 미루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레이의 집사가 했던 말에 따르자면 그레이는 이틀 뒤에 후작이 보낸 사람들에게 공격당해 허리를 크게 다치고 변경백령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 그 뒤 후작의 천인공노할 짓을 일파만파 퍼뜨리겠다 했으니 에반 브리센은 한동안 소문에 시달릴 터였다.

"당장은 소문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을텐데요. 전하의 코앞에 발칸의 마법사들이 들어와 살게 되는 문제에 대해 신경을 쓰기가 어려울 만큼. 그러니 그 이후에 발칸 창단을 발표하고 기사단 파벨의 구역을 발칸의 공간으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앨런이나 르메인도 생각이 같았다.

"맞는 말씀입니다. 본래는 오늘이나 내일 쯤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일주일 정도 미루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고보니 폴룬 남작이 레넌을 살해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있었는데 그 흉흉한 말도 사라지겠군요."

그것은 칼리안이 이 곳에 오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레넌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멜피르가 브리센 상단을 인수하게 되었으니 레넌의 실종과 멜피르를 엮는 이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멜피르의 마음고생이 좀 있었을 터였다.

"그러고보니 공교롭게도 부녀가 모두 악소문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부녀라는 앨런의 말에 칼리안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실리케가 생각난 탓이다.

"어제 실리케가 플란츠 왕자와 따로 만났다고 합니다. 어떤 말을 나누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리케가 다섯 달 만에 처음으로 움직였다니 그 쪽에도 신경을 좀 쓰셔야 할 겁니다."

"네. 이제 실리케도 다시 움직일 것이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곳의 소문이 커질수록 본래의 소문이 잦아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니까요."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어렸다.

"기대되네요. 어떻게 나올지."

* * *

그동안 앨런과 반지를 통해 그렇게 많은 말을 나누었는데도 할 이야기가 많았다. 덕분에 칼리안은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두 시간 가까이 산책을 한 뒤에야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전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선물 상자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 저것들을 좀 열어볼까."

선물을 무조건 돌려보내기보다는 하나 둘 받기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벌써 세 번째로 보내오는 선물이었으니 그들 중 얀의 평가가 괜찮은 이들의 상자를 열어보려 한 것이다.

그런데 잠시 나갔다 들어온 얀이 뜻밖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선물은 오늘 밤이나 내일 열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일정이라도 생겼어?"

"네. 갑작스럽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묻는 칼리안의 눈빛에 얀이 난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씻고 옷 갈아입으시고 석찬에 드셔야 합니다. 전하께서 세 왕자님들과 저녁 식사를 하겠다 하셨다네요."

"석찬이라니."

그 말을 들은 칼리안도 난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방금 밥 먹고 산책하고 왔는데."

비록 그 산책이 두 시간짜리기는 했지만 밥을 먹고 산책하고 또 밥을 먹는다 하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그렇다 해서 르메인에게 못가겠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은 서둘러 샤워부터 한 뒤 그리 튀지 않는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무래도 다른 두 왕자가 있는 자리였으니 굳이 화려한 복장으로 눈에 띌 필요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머리 손질을 받는 동안 옆에 서 있던 얀이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 말에서 내리시자마자 마나실 경에게 달려가신 바람에 전하께서 많이 서운해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

확실히 그것은 칼리안의 실수였다. 아무리 앨런이 반갑다고는 해도 르메인에 대한 인사가 먼저였어야 했다. 르메인이 너그럽게 이해해주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왕궁에 도착을 하자마자 호되게 혼이 날 뻔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사를 권했으니 싫어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맙다 할 일이었다.

곧 준비를 모두 마친 칼리안이 아르피아 궁에 마련된 소규모 만찬장으로 갔다. 출발할 때 체르밀 궁 앞에 마차가 한 대 뿐인 것을 보고 이미 예상했듯이 란델과 플란츠가 모두 와 있었다. 너무 늦장을 부린 것 같아서 칼리안은 그에 대한 사과의 의미까지 함께 담아 두 형에게 인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두 분 형님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란델과는 로젤리타를 떠나기 전까지도 하루 한 두 마디 씩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때문에 란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친 곳 없이 잘 다녀와 다행이라는 정도의 인사치레를 해 주었다. 그리고 플란츠는,

"잘 왔다."

이렇게 말했다!

칼리안은 정확히 비교하자면 앨런이 시간의 축을 이미 알고 있다고 말했던 그 날 만큼 놀랐다. 플란츠의 환영 인사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탓이다.

물론 진심이라고는 귀에 오러를 집약시켜도 찾아 들을 수 없을 목소리였으나 어쨌거나 환영의 뜻이 아닌가. 때문에 칼리안은 저 놈이 이제는 약을 처먹나 하는 생각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노력했다.

칼리안이 채 감추지 못한 놀라움을 확인한 플란츠의 한 쪽 입꼬리가 올라갔고 란델은 그런 플란츠의 얼굴을 잠시 살폈다.

그 직후 르메인이 들어와 석찬이 시작된 바람에, 결국 칼리안은 플란츠의 꿍꿍이를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란델. 읽고 있다던 시르테이야의 논서는 모두 읽었느냐? 네 학식이 갈수록 깊어지니 기쁜 일이구나."

르메인은 칼리안보다 다른 두 왕자들에게 더 많은 질문을 하는 것으로 칼리안을 배려했다.

"검술을 열심히 훈련하고 있다 하더니 지난번보다 몸이 더 좋아진 것 같구나 플란츠. 언제 둘이 사냥이라도 가보자꾸나."

이렇게.

칼리안에게는 그저 밖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왔는지만 물었고 칼리안은 얌전히 그렇다고만 대답했다. 배운 것이 많은지 부순 것이 많은지는 르메인이 더 잘 알테니까.

아무튼 란델과 플란츠가 별다른 거부감 없이 르메인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을 보니 칼리안이 없는 동안 여러 번 이런 자리를 가졌던 것 같았다. 확실히 앨런의 공이 컸다.

그렇게 평화로운 부자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만찬장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시종 한 명이 시종장 라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이고 나갔다. 그리고 라울이 매우 당황한 얼굴을 하다 르메인에게 무슨 말을 전했다. 작은 미소가 머금어져 있던 르메인의 얼굴이 라울의 말을 듣기가 무섭게 굳어졌다. 그리고 잠시의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들어오라 하게."

국왕과 왕자들의 식사자리에 들어올 수 있으나 방문 만으로도 시종장을 당황시킬 수 있는 사람. 르메인이 결코 반겨하지 않을 사람.

누가 찾아온 것인지 굳이 쳐다보지 않아도 되었다.

칼리안이 잠시 눈을 내리 뜬 채 작은 숨을 들이마셨다.

또각.

또각.

구두가 만들어내는 소리에도 르니에리 향기가 감도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무엇을 감추려 저렇게나 짙은 향기를 내는지.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웃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실리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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