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65화 (66/527)

제14장. 오랜만입니다 (2)

칼리안이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그레이의 살기를 털어내듯 가벼운 숨을 내쉬었다. 그 사이 마차 안에서 그레이의 흉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차를 세워라."

계속 달리던 마차가 비로소 멈춰섰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돌려 일행들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레이의 살기를 느낀 키리에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고 아르센과 레이첼의 손에는 마력이 감돌고 있었다.

칼리안이 손을 들어 그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않도록 주의를 보냈다. 특히 분홍색 마차를 보며 대충 각을 재보는 아르센 쪽을 집중적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얀을 보며 말했다.

"키리에만 남고 먼저 가고 있어. 곧 갈테니."

지금부터 할 일은 칼리안만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칼리안의 비밀을 아는 키리에 외에는 이 곳에 있지 않아야 했다.

칼리안의 굳은 표정을 본 얀은 두 말 없이 일행들을 데리고 왕도를 따라 멀어져갔다.

그들의 뒤를 보던 칼리안이 잠시 눈을 감았다.

잠시동안 칼리안이 아닌 베른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레이는 카이리시스로 가면 안된다. 다만 죽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적당히만 손을 봐주어 뒤탈이 생길 여지를 만들어도 안된다.'

따라서 칼리안은 그레이를 완전히 바닥 끝까지 끌어내릴 생각이었다. 두 번 다시 칼리안에게 대서지 못하도록 완전히 배를 보이도록 만들어야 했으니까.

- 드르륵!

그레이가 마차의 창문을 열었다.

그와 함께 칼리안이 감았던 눈을 떴다.

어느새 베른의 눈빛을 한 칼리안이 창 밖을 쳐다보는 그레이를 내려다봤다.

그런 변화를 알 리 없었던 그레이는 커다란 검은 말 위에 앉은 채 마차 안의 자신을 내려다보는 칼리안을 향해 잇소리를 냈다.

"천한 년의 핏줄이 어디 감히!"

칼리안이 창문 너머로 손을 푹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레이의 멱살을 붙들어 잡아챈 뒤 확 당겼다.

- 콰악!

"내가 참다 참다······컥!"

순간적으로 마차 벽에 목이 눌린 그레이가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살기도 그레이가 먼저.

욕도 그레이가 먼저.

그러니 이제부터는 정당방위다.

칼리안이 손에 붙들린 그레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참고 억누르고 있던 화를 터뜨렸다.

"참다 참다, 뭐."

칼리안이 사납게 웃었다.

- 쾅!

칼리안이 팔을 뻗었다 다시 마차 벽으로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그 손에 붙들린 그레이는 머리를 또 박았다.

그레이가 눈을 치켜떴다.

"이······컥!"

- 쾅!

칼리안은 왕도에서 그레이를 마주친 그 순간부터 오러를 감추던 마력을 해제하고 있었다. 그것을 그레이는 눈치채지 못했다.

여섯 중 세 번째의 소드마스터.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제 막 소드마스터가 된 칼리안의 기운조차 느끼지 못한다. 사실상 검의 길에 오른 뒤 제대로 수련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칼리안이 강자였다.

"이, 뭐."

- 콰앙!

한번 더 마차 벽에 머리를 들이박은 그레이의 눈에서 이성이 사라졌다. 결국 그의 손이 검 손잡이를 향했다. 그 움직임을 마차 밖의 칼리안이 놓칠 리가 없었다.

- 쾅!

칼리안이 세 번째로 머리를 박은 그레이 쪽으로 고개를 더 숙였다. 그리고 창문 안쪽으로 보이는 그레이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내리거라."

그와 동시에 칼리안의 살기가 폭발했다.

레넌, 그레이, 실리케, 그리고 플란츠.

참아왔던 브리센에 대한 모든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죽기 싫으면."

갑작스러운 난리통에 그레이의 일행들이 마차 밖으로 나왔다. 집사와 마부도 자리에서 일어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의 시선이 그레이와 여섯 명의 기사들에게 닿아 있었다.

그리고 여섯 명의 기사들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멀리 서 있던 키리에조차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낄 정도의 살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칼리안은 이 정도로 살기를 내비친 적이 없었다. 잠깐 드러난 살기로 앨런 마나실을 긴장시켰던 칼리안이었다. 그러니 제어하지 않은 온전한 살기를 고스란히 받은 그레이는 오죽하겠는가.

그레이의 온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리라고 하였다."

그레이는 지금 저 말이 마차에서 내리라는 말인지 이승에서 내리라는 말인지도 구분이 안됐다.

결국 칼리안이 다시 팔에 힘을 주었다.

- 쾅!

- 콰직!

오러가 집중된 팔의 힘을 마차 벽이 감당하지 못했다. 칼리안은 그레이를 창문 틀 째로 끌어냈다.

"잠깐, 잠깐만!"

그레이가 다급한 소리를 냈다.

칼리안이 그런 그레이를 멱살째로 들어 내팽개쳤다. 그리고 레이븐의 등에서 내려왔다.

그 상관에 그 부하다.

그 칼리안에 그 아르센이다.

스승님 가라사대, 칼만 아니면 얼마든지 사고치라 하셨으니.

- 우웅!

칼리안의 손 끝에 투명한 빛이 어리더니 둥글고 길쭉한 막대기 모양을 만들어냈다. 쉽게 말해 몽둥이다.

"좀 맞자꾸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매타작이 시작됐다.

그레이는 허리춤에 찬 검을 뽑지도 못했다.

그 역시 소드마스터였다. 그런데도 몽둥이가 너무 빨라서 검을 뽑기는 커녕 피할 틈도 없었다. 그저 온 몸에 오러를 둘러 덜 아프게 맞고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를 때려 본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바로 얼마 전 호수에 던져버린 네 명의 기사도 놈들의 뼈가 모조리 부서지도록 화풀이를 했었다.

그런데 오히려 맞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문과 스스로의 힘 덕에 단 한번도 맞아 본 적이 없었다.

'이 곳만 벗어나면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수치심과 분노가 함께 밀려들어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다시 한번 살기가 뿜어져나왔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웃었다.

"정말 다 사라져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그리고 그레이의 복부를 걷어찼다.

- 퍼억!

한 번 두 번 세 번 수도 없이 걷어 차고 짓밟고 즈려밟았다. 그레이의 칼을 빼앗지도 않았다. 칼을 겨눈다면 그것도 상대해주리라 생각했다. 그저 그레이가 칼을 뽑아들 생각도 하지 못했을 뿐.

기어코 그레이의 입에서 헛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그레이의 몸을 지탱하던 오러가 물에 넣은 설탕처럼 스르륵 사라졌다.

오러의 근원이 사라진 것이다.

대륙의 소드마스터를 다시 다섯으로 줄여놓은 칼리안의 손에 아까보다 조금 더 큰 모양의 길쭉한 원형 막대기가 생성되었다. 쉽게 말해 조금 더 센 몽둥이다.

투명하게 빛나는 예쁜 몽둥이가 공중에 화려한 궤적을 수놓으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감히 내 앞에서."

- 퍽!

"핏줄을 말했느냐."

- 퍼억!

그레이가 몸을 뒤틀며 이빨 섞인 피를 게워냈다.

분노는 진작에 사라졌다. 수치심은 조금 남아 있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레이가 게워낸 것 외에는 피가 튀지도 않았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칼리안은 지금 그냥 더럽게 아프고 죽지 않을 곳만 싹싹 골라서 야무지게 때리고 있었다. 그 손이 참으로 매웠다.

"잠깐, 잠깐만······."

칼리안의 손이 잠깐 멈췄다. 그레이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더니 아주 잠시 두 애첩을 쳐다봤다. 여전히 자존심이 남아있었으므로 칼리안은 다시 수고스러운 활동을 시작했다.

그레이는 미칠 노릇이었다. 왜 맞는지는 알겠는데 어떻게 해야 안 맞는지를 몰랐다. 그래서 또 맞았다. 대체 저 몽둥이는 어디서 자꾸 튀어나온단 말인가?

그런 그레이의 얼굴에 생각이 깊어 보였으므로 칼리안은 계속 때렸다.

오러가 없어도 기절을 하지 않았다.

기절 안할 곳만 골라서 때리고 있었던 탓이었다.

너무 아팠다.

오랜 시간 검을 들어왔으나 이렇게 아픈 것은 처음이었다. 결국 한 시간여가 넘도록 매타작을 당한 뒤에야 그레이가 칼리안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몽둥이가 사라졌다.

칼리안이 그레이를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그레이의 몸이 움찔 하며 뒤로 물러섰다. 칼리안이 손을 들어 그레이의 멱살을 다시 잡아 들어올렸다. 뿌리 깊은 공포감이 그레이의 눈에 어렸다.

칼리안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때렸느냐."

그렇게 묻는 목소리 끝에 살기가 짙다.

대답 잘 하라는 뜻이었다.

- 후작은 후작 작위 탐내는 첫째 아들도 돈 받고 치워주려나.

그 순간 조금 전 칼리안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 것은 생존에 대한 본능이었을까. 그레이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에반, 에반 브리센 후작······."

지금 내뱉은 대답이 어떤 뜻인지 모르는 것이 아닐텐데.

참으로 돈독한 부자관계가 아닌가.

칼리안의 얼굴에 냉소가 걸렸다.

그레이는 지금 그것조차 너무 무서울 뿐이었다.

그 얼굴 그대로 칼리안이 주변을 둘러봤다. 여섯 명의 기사를 포함한 그레이의 가솔들이 간신히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칼리안이 손에 쥐고 있던 그레이의 멱살에서 힘을 풀었다. 털썩 하고 그레이의 몸이 힘 없이 쓰러졌다. 곧 칼리안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들을 이리 만들었으니. 참으로 비정한 아비로구나."

그 말과 함께 칼리안이 그레이의 등을 밟았다.

- 콰직!

"끄아아악!"

척추가 부러지는 고통에 그레이가 결국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그 모습을 담담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칼리안의 눈초리가 그레이의 집사에게 가 닿았다.

"넌. 내 말을 알아들었을 머리인가."

그 말에 집사가 고개에서 꺼떡꺼떡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끄덕여댔다.

"지금 당장 변경백령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로 겪은 억울함을 알리겠습니다. 후작 후작께서 아드님과 불화가 깊으셨다고, 이 곳으로 사람을 보내셨다고, 그래서 아드님을 이렇게 만드셨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변경백이 움직인 이동경로가 나와 같구나. 그것은 우연인가?"

집사의 입이 재빨리 답을 찾아 올렸다.

"아닙니다. 변경백이 이리 된 것은 이, 이틀 뒤입니다. 왕자님께서는 그 시점에 궁에 계셨으니 우연히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꽤 흡족한 대답을 들은 칼리안이 고개를 한 번 움직였다. 그리고 얼어붙을 것 같은 목소리로 마지막 경고를 보냈다.

"그래. 그 소문에 내 이름이 한 글자라도 들어가면."

집사를 포함한 모두의 얼굴이 사색이 된 것을 본 칼리안이 씩 웃었다.

"찾아가마. 어디든."

"네, 네. 알겠습니다."

집사가 울먹거리며 다시 고개를 움직였다.

칼리안이 비로소 몸을 돌렸다.

레이븐의 안장에 오른 칼리안이 키리에를 보며 말했다.

"겸사겸사 네 것도 갚은 거야."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던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칼리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다리던 일행들에게 다각다각 걸어오는 두 필의 말이 보인 것은 거의 두 시간여가 지난 뒤였다.

때문에 저녁 시간을 한참 넘긴 뒤에야 마지막 영주성인 넨시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칼리안은 오랜만에 실하게 움직인 덕에 저녁도 걸렀다. 그리고 앨런에게 내용만 대충 전한 뒤 그대로 골아떨어졌다.

다음 날 아침까지 단잠을 자는 칼리안의 옆을 키리에가 밤새 지켰다. 혹시라도 그레이의 기사들이 복수하러 올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레이의 기사들은 칼리안의 얼굴만 떠올려도 진저리를 치고 있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그리고 다음 날 아침부터 얀과 히나가 매우 분주했다.

덕분에 칼리안은 이 곳이 체르밀인지 아니면 넨시아 영주의 성인지를 잠시 혼돈했다.

"사람들이 엄청 많이 몰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출발할 때처럼 가벼운 옷차림으로 들어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에 얀이 이런 말로 칼리안을 살살 달랬다. 따라서 칼리안은 대체 여행길에 왜 챙겨왔는지도 모를 왕자의 정복을 쳐다봤다.

"······ 안 그래도 될 것 같은데."

결국 얀을 이기지 못한 칼리안이 정복까지 입으며 멋을 부리고 나니 다른 일행들이라고 대충 입을 수가 없었다. 어찌됐건 왕자의 로젤리타 수행원들이니 격은 맞춰야 했다.

따라서 모두들 이른 아침부터 목욕과 단장을 마친 후 말에 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머무른 넨시아 영주성을 떠나 한 시간 거리의 카이리시스에 도착했다.

그 뒤 칼리안은 외성 안에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정복을 입은 것을 곧바로 후회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사람이 너무 예쁘고 지나치게 멋있는 것도 피곤할 때가 있는 법이다.

아무튼.

이런 환호성이 왕궁 내에까지 들렸으니 서재에서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던 르메인과 앨런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도착했나보군."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 앉아있던 르메인이 비로소 찻잔을 들어올렸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꽤 긴장했던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앨런이 들어오자마자 또 이런 소리를 한 탓이다.

"전하의 아드님께서 이번엔 남의 허리를 부쉈다더군요."

조금 익숙한 듯한 말이었지만 이전과는 또 많이 다른 것이 부서졌다 하니 르메인이 양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앨런이 일전에 알려준 올바른 질문을 꺼내들었다.

"누구의 허리였는가."

앨런이 만족한 듯한 웃음을 보이며 칭찬하듯 대답했다.

"그레이 브리센의 허리였다 합니다."

이랬으니 도무지 안심이 되겠느냐는 말이다.

대체 그 소드마스터 허리를 어떻게 부쉈냐는 말에 앨런이 이렇게 말했다.

"어찌저찌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답니다."

설마 혼자서 대섰겠느냐 칼리안은 다친 곳이 없다더라. 그러니 이래저래 싸우다 넘어지기라도 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앨런의 말에 간신히 고개를 끄덕인 르메인을 보며 앨런이 부드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라는 자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으니. 자식이 나서서 도둑을 쫓아내준 것이지요."

그것은 그 어느때보다도 폐부를 깊이 찌르는 한 마디였다.

그리고 잠시 뒤.

왕궁 안으로 들어온 칼리안이 레이븐에서 뛰어내리자마자 그새 밖으로 나와 있던 앨런의 품에 쏙 안겼다.

"스승님!"

앨런은, 남의 허리 부숴놓고 달려오는 이 어여쁜 제자를 온 팔로 꼭 안아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뒤 르메인을 향해 웃어보이는 앨런의 승리감 어린 얼굴이 다시 한번 르메인의 폐부를 깊이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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