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찾았습니다 (5)
가만히 창 밖을 보던 칼리안이 문득 말했다.
"조용해지니까 좋네요."
그레이가 떠난 뒤, 레딩턴 성의 병사들과 하인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때문에 그레이의 흔적을 지우고 본래의 평화로운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칼리안 역시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즉 태평한 얼굴로 테시드의 집사가 건네준 따뜻한 밀크티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런 칼리안과 마주보고 앉아있던 테시드가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브리센 변경백이 화가 많이 났습니다. 어떻게 나올지 걱정되지는 않으십니까?"
"글쎄요. 걱정할 것이 있으려나."
"소드마스터가 아닙니까. 변경백의 화를 그렇게 돋워놨으니 카이리시스로 돌아가기 전에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우려됩니다."
"괜찮습니다."
칼리안은 짧은 대답으로 해야 할 모든 말을 대신했다. 테시드에게 자세한 내용을 이야기하기도 어려웠거니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태평한지 누구에게 말 할 거리도 되지 못했던 탓이다.
칼리안이 이 응접실에서 그레이를 마주했던 그 순간 칼리안은 그레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매우 강한 오러를 느꼈다. 때문에 마음놓고 그레이의 자존심을 꾹꾹 내리눌렀다. 그레이의 오러가 느껴졌다는 것은 최소한 칼리안과 동급이거나 그 이하의 상대라는 소리였으니까.
게다가 수도에는 앨런과 앨런이 준비하고 있는 마법사단이 있었다. 이 일을 알게 된 앨런과 르메인이 어떤 결정을 하게 될 지 칼리안은 알고 있었다.
'발칸의 창설을 앞당기겠지.'
아무리 훈련이 안되어 있다 해도 능력 있는 마법사들의 집단이다. 때문에 섣불리 나서서 건드려 보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니 개인 대 개인의 싸움이든 세력 대 세력의 싸움이든 당장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차피 언젠가 한 번은 부딪혀야 할 사람과 만났을 뿐이니 걱정해주지 않아도 됩니다."
테시드와 눈을 마주치며 그렇게 말하는 칼리안의 얼굴에서 불안함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테시드는 그런 모습이 오히려 신기하기까지 했다.
곧 칼리안이 다시 고개를 움직여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멀리 있는 곳이 아니라 조금 가까운 곳을 보고 있었다. 사실 그 곳에는 그레이만큼 테시드의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누군가가 아까부터 눈에 밟히고 있었다.
테시드가 조금 안타까운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저 시종은 계속 저대로 두실 겁니까?"
'저 시종'이란 성의 훈련장을 벌써 몇 십 바퀴 째 달리고 있는 키리에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칼리안의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저렇게 해서라도 가르쳐 놔야 할 것이 있어서요."
칼리안을 위해 기사들의 매타작을 견딘 키리에는 히나의 치료도 허락받지 못한 채 곧바로 뜀박질을 시작해야 했다. 물론 테시드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칼리안을 믿지 못한 행동에 대한 벌이었다.
키리에와 반대로 아르센은 칼리안의 직위와 대처 능력 그리고 재력을 믿었다. 그래서 엄청난 금액의 마차 한 대를 한 계절 잘 써먹을 장작더미로 만들어 경고를 빙자한 화풀이도 했다. 겸사겸사 폭발음을 들은 칼리안이 나오도록 불러낸 뒤에는 적당히 화를 돋워서 놈들을 처벌하게끔 만들었다.
그리하여 칼리안으로 하여금 직접 피를 보게 만든데다 안그래도 많이 비어있던 금고를 한번 더 털게 만든 것에 대한 대가로 아르센은 지금 꿀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저 아이와 내가 감당할 일이 서로 다르니 이제 그것을 깨우칠 때가 되었습니다."
칼리안은 키리에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먼저 일러주지 않았다. 스스로 알게 될 때까지 달리고 깨닫고 난 뒤 찾아오라 했을 뿐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무리하는 것 같아 그렇습니다, 왕자님."
어느새 노을마저 지고 달이 밝아오고 있었다.
테시드까지 이렇게 키리에를 신경 쓸 만큼의 시간이 지났으나 칼리안은 그저 말 없이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곧 칼리안이 창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내가 저 정도를 견디지 못할 이에게 내 등을 맡기려 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표정은 여유로웠고 목소리에는 무한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때문에 테시드는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궁금해 할 영역이 아니었군요."
"대신 내가 자작에게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왕자님."
칼리안은 티스푼을 들어 주위를 환기시키듯 밀크티를 몇 번 저은 뒤 입을 열었다.
"자작의 가족들은 카이리시스에 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제가 간혹 오가고 있습니다."
칼리안의 시선이 이제는 어두워져 어슴푸레 보이는 호수를 향했다. 그러다 아침에 보았던 평화로운 광경이 떠오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런 조용한 곳이라면 자작의 손이 직접 닿지 않아도 유지하기가 어렵지 않을텐데. 굳이 이 성에 계속 머무르는 이유라도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테시드가 칼리안과 같은 곳을 바라보다 대답했다.
"책을 읽기에 이보다 좋은 곳이 없다보니 떠나있을 마음을 가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책이라······ 그렇군요. 이런 곳이라면 책을 보며 지내는 생활에 욕심을 내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이렇게 답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저 책만 보며 지내도록 두기에는 아까운 마음이 더 컸다. 때문에 칼리안은 조금 전부터 고민하던 말을 꺼내놓았다.
"자작의 마차. 정말로 축이 고장났을까요."
마차를 빌려달라던 그레이의 말에 태연한 얼굴로 축이 고장나 타실 수 없다 말하던 테시드의 얼굴을 떠올리며 묻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지어보였던 그레이의 얼굴이 생각난 테시드가 잠깐 웃는 소리를 냈다. 곧 테시드의 대답이 이어졌다.
"이런 작은 영지의 영주가 타는 마차를 함부로 내어주면 자칫 갈 곳이 없어집니다."
핑계를 대서 거절했다는 말.
칼리안의 얼굴에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거절한 것이 맞다는 것을 확인해서가 아니라 함부로 어느 쪽 편에 서기 어려웠다는 속마음을 칼리안에게 말했다는 것에 대한 만족이었다.
칼리안은 사려 깊고 진중한 그리고 상대를 구분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나서거나 빠질 줄 아는 이 자작이 꽤 마음에 들었다. 생각과 셈이 빠른 멜피르 폴룬과 썩 잘어울릴 것 같아서였다.
과거의 기억에서 떠오르는 적당한 인재가 없으면 찾아서 쓰면 되는 것을. 게다가 인재란 눈에 띄었을 때 아낌 없이 주우라 하였으니.
칼리안이 테시드를 깊이 응시하며 물었다.
"읽어야 할 책이 많이 남았습니까."
테시드가 한동안 말 없이 찻잔과 창 밖을 쳐다봤다.
그 후 테시드는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 때문에 하시는 말씀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같이 가시죠. 카이리시스에."
칼리안은 곧바로 이렇게 대답했다.
찻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칼리안의 눈에도 보였다.
"왕자님 일행의 말이 다 나을 때 즈음에는, 마차 축의 수리도 끝날 것 같습니다."
"시기가 좋군요. 다행입니다."
칼리안이 소리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폴룬 남작을 도울 만한 사람, 찾았습니다.
그리고 한 달 전에 전해진 앨런의 요청에 대해 대답했다.
* * *
칼리안이 이렇게 여유 가득한 자세로 앉아 인재 발굴에 힘쓰는 사이.
이미 발굴된 인재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사건도 많고 사고는 더 많은 칼리안을 보좌하느라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얀이었다.
그레이가 돌아간 뒤 얀은 그레이의 마차값부터 가늠하여 따로 적어두었다. 칼리안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아르센을 찾아가 마차의 변상은 칼리안이 할 것이라는 내용과 오늘은 '숙제'에 신경쓰지 말고 푹 쉬라는 칼리안의 말을 전달했다. 아르센이 마음껏 날뛴 덕분에 오늘 하루 얀의 심장이 얼마나 쇠약했는지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뒤에는 성의 주방장에게 부탁해두었던 아이스크림을 건네받아 히나의 방을 찾아갔다. 달래주기도 할 겸 키리에가 곧바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훈련장을 뛰게 된 이유를 설명해주려던 것이다. 그런데 히나의 반응이 꽤 의외였다.
- 이제 괜찮아요. 울어서 미안해요.
빈 말이 아니라 히나는 정말로 굉장히 멀쩡했다.
부어있는 눈이 아니었다면 아까 그렇게 울었다는 것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키리에가 무사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던 히나는 키리에가 벌을 받게 된 것에 대한 얀의 설명을 들은 뒤 덤덤하게 대답했다.
- 맞아요. 오빠는, 혼나야 돼.
곰 같은 키리에는 혼나는 그 이유를 몰라서 다친 몸으로 훈련장을 뛰고 있는데 히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떠먹었다. 잠시 할 말을 잊었던 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 일은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말아요."
히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 괜찮아요. 왕자님이 전부, 갚아줬어요.
얀은 몰랐지만 칼리안이 키리에 남매를 데려올 때 히나의 잘린 귀와 말을 하지 못하는 것 등을 갚아주겠다고 했던 적이 있었다. 때문에 히나는 칼리안이 기사들에게 왜 그런 벌을 내렸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야 그 이유를 달리 설명했지만, 사실 칼리안이 그들의 피를 본 진짜 이유는 히나를 희롱했기 때문이 아니라 말 못하는 것을 조롱했기 때문이며 기사 작위를 박탈한 것이 희롱에 대한 처벌이었다는 것을.
그러니 칼리안은 키리에를 때렸다는 이유로는 기사들을 처벌하지 않은 셈이었다. 오히려 기사가 아닌 키리에를 벌 주고 있지 않은가.
- 전부 갚아주셨으니까, 더 이상, 속상해 할 이유도, 없어요.
속사정을 모를 얀은 히나가 괜찮다 하니 그저 천만다행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 * *
"전하의 아드님께서 이번에는 남의 마차를 부쉈다더군요. 돈이 또 나가게 생겼습니다."
사실은 칼리안이 아닌 아르센이 저지른 일이었으나 앨런은 그냥 이렇게만 말했다.
당신의 망나니 아들이 또 사고를 쳤다는 듯한 말투로 전해진 소식에 르메인이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너무 당연한 것을 되묻고 말았다.
"설마 칼리안이 그랬다는 말인가?"
"설마 란델 왕자님이나 플란츠 왕자님이 그런 막돼먹은 짓을 하겠습니까."
란델이야 당연했고 아무리 그래도 플란츠가 밖에서까지 남들에게 해를 입힌 적은 없었다. 비록 얀에게 한번 식사용 나이프를 집어던진 적이 있지만 어쨌거나 얀이 다치지는 않았으니 수도에서 코끼리떼를 보게 될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러고보니 언제 슬레이만에게 그 일을 얘기해볼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앨런에게, 얀이 누구 아들인지는 꿈에도 모를 르메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칼리안이 그리 행동할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그렇게 믿음이 잔뜩 담긴 대답을 한 르메인이 서랍에서 수표지를 꺼냈다. 그리고 금액을 써 넣는 곳에 펜을 가져가며 앨런을 쳐다봤다. 칼리안의 금고에서 빠져나간 돈이 많았으니 마차값 정도는 르메인이 지불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자 앨런이 씩 웃었고 르메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앨런의 입을 쳐다봤다. 또 뭔가 한 소리가 나올 기세였으니까.
"마차 부순 값으로 막내 아드님 목을 내어드릴 셈입니까?"
또 혼났다.
"전하께서 마차의 값을 대신 지불하게 되면, 왕자님의 행동을 용인했다는 것을 마차 주인에게 알리는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즉 그것은 칼리안이 르메인을 등에 업고 있다는 것을 르메인 스스로가 증명해버리는 행동이었다.
"전하께서는 그냥 누구의 마차인지만 궁금해하시면 됩니다."
평상시의 르메인이라면 선뜻 돕겠다며 수표를 꺼내들기보다는 칼리안이 누구와 충돌했는지를 가장 먼저 물었을 터였다. 때문에 앨런은 지금 그 점에 대해 일침을 놓는 중이었다.
"누구의 마차였기에."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의 마차라 합니다."
그 뒤 이어진 앨런의 설명에 르메인의 얼굴에서 한 십년 쯤의 세월이 오르락 내리락 했다. 그레이가 데려온 열 명의 기사 중 넷의 작위를 박탈한데다 평생 말을 못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르메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해 카이리스 법도 내에서 가할 수 있는 가장 강한 벌을 적용했군.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새 손이 상당히 매서운 아이가 되었나본데."
"그만큼 제 사람을 아끼는 것이지요. 참을 때와 아닐 때를 구분할 줄은 알고 있으니 너무 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칼리안이 그렇게나 제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불러올 여파를 따져보던 르메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발칸에 소속될 마법사들의 명단이 얼추 만들어졌던가."
"네. 생각보다 적기는 하지만 왕자님께서 왕실의 두 기사단에 기가 죽지 않을 만큼은 됩니다."
심혈을 기울여 고른 30명의 마법사를 떠올리며 앨런이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 발칸의 창설은 두세 달 정도의 여유를 더 두고 시작하려 했습니다. 그들을 수용할 전용 건물도 없는 상태이니. 그런데 상황이 바뀐 탓에 우리도 조금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어간다.
이제 필요한 것은 마차값으로 칼리안의 행동을 용인해주는 배포가 아니라 브리센의 기에 눌려있지 않을 진짜 힘이었다.
르메인이 잠시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다 큰 숨을 내쉬었다.
"건물이 없으면 있는 것을 쓰면 되겠지. 기사단 파벨이 왕궁 내에서 사용하던 건물과 부지에 발칸을 들이게."
발칸의 창설을 앞당긴다.
그리고 실리케의 무기가 되어주었던 파벨의 구역에 마법사단 발칸을 들인다.
"파벨의 건물에 발칸을 들이시겠다니. 브리센에 대한 선전포고라도 하실 셈입니까."
"나쁘지 않겠지."
르메인의 말을 들은 앨런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눈으로 르메인을 보며 대답했다.
"축하드립니다. 머지않아 정말로 목이 간당간당하게 되셨으니."
머지않아 목이 간당간당하게 될 르메인이 같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