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62화 (63/527)

제13장. 찾았습니다 (4)

아르센은 자신에게 건네지는 말을 정말 진지하게 듣는다.

그렇다 해서 흘려들어야 할 말과 곧이곧대로 들어야 할 말을 구분할 줄 모른다는 것은 아니었다. 아르센은 자신에게 유리한 말에 한해서 진지하게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었다.

그에 대해 한 가지 설명을 덧붙이자면.

일전에 아르센이 칼리안에게 헤일 라트란 백작의 욕설을 그대로 전달했던 것은 칼리안에게 욕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 칼리안이 헤일의 무엄함을 제대로 느끼고 엄히 처벌하도록 하고자 한 행동이었다. 정말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아르센이 결코 구분 없이 진지한 바보가 아니라는 데에 있었다.

- 그 쪽에 경이 먼저 해를 입히면 안됩니다.

따라서 아르센은 얀이 자신에게 건넨 말에서도 진지하게 들어야 할 이야기를 잘 구분해냈다.

그러므로 아르센이 그레이의 마차를 시원하게 폭발시킨 것은.

그레이의 기사들이 히나에게 집적거리는 것을 막아선 키리에를 일방적으로 폭행한 것에 대한 화를 참지 못하고 저지른 일이 아니라 철저히 계산된 행동의 결과라 할 수 있었다.

정말이다.

* * *

아르센의, 폭음이라.

이보다 더 이상한 조합이 또 있을까.

칼리안의 눈이 바닥을 향해 조용히 내리떠졌다.

테시드 레딩턴이 곧바로 창가로 다가가 밖을 쳐다봤다. 하지만 응접실의 창문 쪽에서는 딱히 보이는 것이 없었다. 따라서 테시드는 집사를 불러 무슨 일이 있는지를 확인하도록 전달했다. 물론 그레이도 밖에 있던 기사를 불러 상황을 확인해오라는 지시를 했다.

그리고 칼리안은 섣불리 움직이는 대신 주변의 기운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르센의 마력이 더 느껴지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는데 그 이상의 무언가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런 칼리안에게 다가온 얀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왕자님."

여전히 아래를 향하고 있던 칼리안의 눈동자가 얀에게로 조용히 움직였다. 그리고 얀의 얼굴에 여실히 드러나있는 표정을 보게 되었다.

얀은 지금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밖에서 난 소리가 아닌 칼리안을 신경쓰고 있었다.

칼리안의 입에서 그레이를 상대하느라 가라앉아있던 목소리가 채 정리되지 못하고 흘러나왔다.

"폭음은 밖에서 났는데 너는 나를 살피네."

"아······."

"뭐야."

칼리안의 질문을 받은 얀이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듯한 얼굴을 했다. 키리에에게 일이 생긴 것 같다는 말을 하는 순간 칼리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칼리안의 앞을 살짝 가로막고 선 얀이 말했다.

"제가 지금 내려가서 확인해보고 올게요."

의도가 다분했다.

칼리안이 직접 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칼리안은 얀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그리고 얀을 피해 돌아간 뒤 계단 쪽으로 뚜벅뚜벅 발을 옮겼다. 잠시 후 방으로 향하는 오르막과 밖으로 향하는 내리막의 사이에 멈춰 선 칼리안이 손가락으로 바깥쪽을 가리켜 보이며 입을 열었다.

"헤르츠 경은 저 난리를 피우면서 나를 부르고. 너는 내가 저기 내려가지 않았으면 하고."

아르센이 칼리안을 '부르고 있다'고 판단한 이유는 하나였다. 아르센이 폭음을 냈기 때문이었다.

폭음이 들렸다는 것은 곧 화염 마법이 사용되었다는 말이 되었다. 그런데 아르센은 본래 얼음을 사용하는 마법사다. 그러니 폭음이 의미하는 바는 딱 하나 아르센이 일부러 화염을 써가며 폭발을 일으켰다는 소리였다.

만약 정말 긴급한 일이 있었다면 아르센은 잘 쓰지도 않는 마법을 쓰는 대신 상대방에게 얼음의 창을 날려보냈을 것이다. 그러니 저 폭발에는 다른 의미가 있을 터였다.

속마음을 정확히 짚어내는 칼리안의 말에 얀이 입을 다물었다. 대신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유를 물은 것인데 너는 대답을 하지 않으니. 내가 직접 가 볼 밖에."

그러자 얀이 잠시 말을 고르다 걸음을 빨리 하여 칼리안의 앞을 한 번 더 막아섰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걸음을 막아선 것에 대한 사과에 칼리안이 눈을 찌푸리며 얀을 쳐다봤다. 얀이 이렇게까지 나설 정도라면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런 칼리안이 다시 발을 옮기기 전에 얀이 작은 목소리로 재빨리 입을 열었다.

"왕자님. 여기서 변경백과 더 충돌하시면 안됩니다. 잘못 건드리면 왕자님만 불리해집니다. 잘 아시죠? 섣부르게 나서지 말아주세요."

얀의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쪽이 뭘 건드렸는지부터 보고."

그리고는 다시 발을 놀려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갑자기 나타난 허여멀건한 마법사가 일언반구도 없이 말 머리통만한 화염구를 만들었을 때 그레이의 기사들은 상당히 당황했다. 그러다 말 머리통만한 그 화염구가 자신들을 향해 날아올 때에는 모두 기겁하여 허리를 움츠렸다. 그렇게 기사들의 머리통을 스치듯 지나간 화염구는 그대로 그레이의 마차를 날려버렸다.

- 콰앙!

엄청난 소리가 고막을 뒤흔들었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숙였던 네 명의 기사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뒤에서 일어난 일을 확인했다. 세 대의 마차 중 하필이면 그레이의 마차가 '사라져' 있었다.

그것을 본 기사들 중 그레이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고 있던 기사 엑토르가 살기를 띄우며 아르센의 앞으로 달려왔다.

"이게 무슨······!"

그러거나 말거나 아르센은 엑토르로부터 등을 돌리고 섰다. 그리고 키리에의 지저분해진 옷부터 '클린' 마법으로 제대로 돌려놓아 주었다. 흙과 피로 지저분해진 옷은 다시 깨끗하게 되었으나 이미 난 상처까지 어찌하지는 못했다.

언뜻 보아 큰 상처는 없는 것 같았으나 여기저기 까지고 멍이 들어 그리 보기 좋은 꼴이 되질 않았다. 아르센이 혀를 차며 키리에를 향해 물었다.

"왜 맞기만 하였는가?"

키리에가 대답 없이 살짝 웃었다. 아마도 브리센의 기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칼리안이 곤란해질까 걱정했으리라. 아르센의 입에서 타박하는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자네. 모르긴 몰라도 왕자님한테 좋은 소리 듣긴 힘들 것이네."

걱정해주는 말이었으므로 키리에가 감사를 전하려는데 그런 둘의 대화를 더 두고보지 못한 엑토르가 한 발 더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땔감으로 쓰기 딱 좋게 변한 마차를 가리켜보이며 살기 등등한 기세로 소리쳤다.

"저게 무슨 짓이냐? 감히 저것이 누구의 마차인 줄 알고!"

그러자 아르센은 키리에를 가리켜보였다.

"감히 이 소년이 누구의 사람인 줄 알고 건드린 것인가?"

마차와 키리에를 같은 선에 놓고 비교하는 것이 조금 미안하기는 했으나 아무튼 아르센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엑토르가 피식 웃으며 다시 말했다.

"너도 3왕자의 따까리냐?"

자신 때문에 일에 말려든 아르센이 비난을 듣자 키리에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르센은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네."

말이 조금 거칠기는 하지만 자신이 칼리안의 따까리인 것은 맞지 않나.

"그러는 그대는 후작 아들의 개인가?"

이번에는 저 따위 놈과 개를 같은 선에 놓고 비교하는 것이 미안했으나 아무튼 아르센은 그렇게 물었다.

엑토르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당장 검을 뽑아 들 기세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르센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옆에 서 있던 키리에에게 내밀었다. 찢어진 눈가에서 피가 계속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키리에가 그것을 받아들자 엑토르가 한 발 더 앞으로 나왔다. 아르센이 자신을 그리 신경쓰거나 무서워하지 않는 것에 대해 화가 난 까닭이었다. 그러자 엑토르의 발 앞에 커다란 얼음창이 내리꽂혔다.

- 콰직!

깜짝 놀란 엑토르가 발을 물리며 아르센을 쳐다봤다. 엑토르의 발 앞에 얼음창을 날려보낸 아르센이 침착한 얼굴로 대답했다.

"마법사들은 칼 든 사람이 가까이 오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네. 거기서 말해도 다 들리니 더 다가오지 말게."

하마터면 얼음창에 그대로 발등을 찍힐 뻔한 그가 노기 어린 목소리를 터뜨렸다.

"이 새끼가!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그 말에 저 멀리서 대답이 들렸다.

"내 따까리가 말해줬잖아. 개라고."

칼리안이었다.

꽤 거리를 두고 걸어오는 칼리안의 목소리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칼리안이 한 말이 모두에게 또렷이 들리고 있었다. 덕분에 모두가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어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잠깐 고개만 돌렸다. 그리고 그레이의 마차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 후에는 아르센을 향해 짧게 물었다.

"마차값, 내가 변상해야 합니까?"

그러자 아르센이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며 공손히 대답했다.

"제 급여에서 제하시면 됩니다, 왕자님."

그 말에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아르센의 급여가 어느정도인지 칼리안이 모르지 않았다. 변경백의 마차값을 제하려면 아마 몇 달은 한 푼도 받지 못할 터였다.

칼리안이 웃자 칼리안의 뒤에 서 있던 얀이 매우 불안한 눈을 했다. 칼리안이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키리에의 얼굴부터 확인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저 기사들의 목을 치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일텐데 오히려 재밌다는 듯 웃고 있으니 불안할 수밖에.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안은 여전한 속도의 걸음으로 아르센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내 시녀가 여기에 있었을텐데. 어디 있습니까?"

히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얀이 할 수 있었으므로 얀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르센의 말이 먼저 나왔다.

그런데 아르센은 히나가 어디에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왜 여기에 없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왕자님의 시녀인 줄을 몰랐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칼리안은 그럭저럭 마음의 여유를 잘 유지하고 있었다. 매우 화가 나는 상황이기는 했으나 일을 더 키우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화를 다스리고 있었다.

"반반하게 생긴 벙어리 계집이 있으니 변경백이 좋아하겠다 싶었다더군요."

그런 칼리안의 이성을 정직한 아르센이 툭 건드렸다.

칼리안이 새하얗게 웃었다.

얀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주 조금만 이성을 잃은 칼리안의 손에 투명한 빛이 어렸다.

* * *

그레이가 건물 밖으로 나갔을 땐 이미 모든 일이 끝나 있었다.

왕자의 시녀를 추행한 기사 넷의 혀를 자르고 왕자의 시종에게도 해를 입힌 죄를 물어 그들의 작위를 박탈한 것에 대해 칼리안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제 부하들 잘못은 신경쓰지 않은 채 칼리안을 씹어먹을 듯 노려보는 그레이를 보며 칼리안은 일단 참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그레이의 목을 치고 싶었으나 우선 그 정도 선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담담한 눈으로 이렇게만 말했다.

"헤르츠 경이 실수로 부순 마차 값은 카이리시스에 가면 마나실 경이 지불해줄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리고는 그대로 자신의 방에 돌아갔다.

그에 대해 그레이는 단 한마디도 항변하지 못했다. 테시드의 마굿간 하인들과 병사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레이는 그 길로 레딩턴 성을 떠나기로 했다. 때문에 테시드에게 마차를 빌리고자 하였으나 테시드는 그런 그레이에게 하필 지금 마차의 축이 고장나 수리중이라며 사과를 전했다.

그레이는 그에 대해서도 화를 내지 못했다.

결국 그레이는 어여쁜 두 명의 애첩을 짐을 싣는 마차로 옮겨 앉도록 했다.

핑크색의 하늘거리는 커튼과 진주 구슬이 달린 장식을 모조리 뜯어낸 그레이가 카이리시스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괴성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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