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찾았습니다 (3)
- 고개라도 숙이거라.
칼리안이 응접실 문 바로 앞에 선 채로 말을 했기 때문에 밖에 있던 얀은 칼리안이 무슨 말을 했는지를 고스란히 듣게 되었다. 때문에 불안한 마음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키리에라도 있으면 안심이 될텐데 칼리안은 성 내에서는 키리에의 호위를 받지 않았다. 자유롭게 수련을 하도록 시간을 주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늦게 오더라도 기사들을 데리고 올걸.'
그동안 특별히 무력 충돌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빠르게 돌아가는 것만 생각하여 기사들을 두고 오자는 의견에 동의한 것이 이렇게 아쉬울 줄은 몰랐다.
왕자를 만나는 자리였으니 응접실 안에 들어간 그레이가 무장을 하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평소 슬레이만을 잘 보고 자라온 얀이 아니던가. 소드마스터에게는 손에 들린 그 어떤 것도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변경백이 혹시라도 이성을 잃고 날뛰면 어떡하시려고 저런 말씀을 하셨을까.'
얀은 계속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응접실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칼리안에게 이동 마법에 대한 숙제를 받은 아르센과 레이첼이었다. 아마도 그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응접실로 오는 듯 했으나 응접실은 이미 사용하는 이들이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가서 이야기 나누세요."
그래서 얀은 이렇게 이야기하며 둘을 돌려보내려 했다.
얀이 밖에 있다는 것은 닫힌 문 안쪽에 칼리안이 있다는 말이었으므로 아르센은 다른 것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에게 테시드의 집사가 다가와 눈치 빠른 소리를 했다.
"윗층에도 대화를 나누실 만한 곳이 있으니 제가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어디인지 알고 있으니 굳이 수고해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렇게 말한 레이첼이 아르센을 향해 눈짓을 했다.
곧 둘은 집사가 이야기했던 곳으로 가기 위해 발을 돌렸다.
- 타다닥!
그러나 둘은 곧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발을 멈추어야 했다. 멀리 복도를 허겁지겁 뛰어오는 사람이 보였기 때문이다.
내딛는 걸음 걸음마다 흔들리는 은발이 눈에 확 띄었다.
"히나?"
그것은 바로 히나였다.
평소 히나는 절대로 저렇게 뛰어다니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저 모습은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말과도 같았다.
히나를 부른 얀이 표정을 굳힌 채로 성큼성큼 걸어가 물었다.
"무슨 일이예요?"
히나는 온 얼굴이 눈물 범벅이었다.
얀을 보며 수어를 했는데 그 손이 많이 떨리고 있어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얀은 허리를 숙여 히나의 얼굴에 눈을 맞추었고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히나. 천천히요. 괜찮으니까 천천히."
그 말에 히나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리고는 조금 더 느려진 속도로 손을 움직였다.
- 오빠, 기사들.
수어를 많이 잊어버린 탓에 모두 알아볼 정도로 잘 하는 것은 아니었던 얀은 히나의 손짓 중 딱 두 가지 단어를 알아봤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대충 무슨 상황인지를 알 수 있었다.
"키리에, 브리센의 기사들?"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얀이 표정을 굳히며 한번 더 물었다.
"싸움이 났어요, 혹시?"
히나의 고개가 다시 위 아래로 움직였다.
"어디죠?"
- 말.
"마굿간."
이제는 더 물을 것도 없어진 얀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잠시 응접실 쪽을 쳐다봤다.
아직 칼리안과 그레이의 대화가 끝나지 않았으므로 히나가 전해온 것을 확인하러 직접 찾아갈 수가 없었다. 그러자 아르센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내가 가보겠네."
함부로 자리를 비우기 어려운 상황에서 선뜻 나서주는 아르센에게 얀이 고맙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며 말했다.
"키리에와 브리센 기사들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마굿간에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옆에서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얀의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 그것까지 확인한 아르센이 바로 마굿간 쪽으로 가려는데 얀이 말을 이었다.
"헤르츠 경. 그 쪽에 경이 먼저 해를 입히면 안됩니다."
"그 정도를 모르고 있지는 않으니 걱정 말게."
이렇게 말한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그런 아르센의 뒤를 따라 레이첼도 가보려 했으나 얀이 만류했다.
"헤르츠 경이 혼자 처리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레이스 경은 히나를 좀 봐주세요."
아르센은 칼리안의 사람이 맞았으므로 문제가 생겨도 칼리안이 해결할 수 있었으나 레이첼은 아직 아니었다. 게다가 레이첼은 이제 막 리베른에서 카이리스에 들어온 이방인이 아닌가. 브리센과의 일에 얽히면 곤란한 일이 생길 터였다.
그런 이유임을 모두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레이첼은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히나의 어깨를 감싸쥐고 같이 방으로 가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는 히나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히나의 뒷모습을 보던 얀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레이의 기사들이 하필이면 칼리안이 제 핏줄처럼 아끼는 키리에와 히나를 건드렸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왕자님께서 이 일을 아시면 그냥 넘어가지는 않으실텐데······ 이를 어쩐다."
칼리안이 절대로 좋게 넘어가지는 않을 일이 생긴 듯한 예감이 든다. 얀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채 응접실 안에는 태풍의 눈과 같은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고요한 가운데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은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미소가 사라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덕분에 다소 부자연스러운 모습이기는 했지만 웃음 비슷한 것을 얼굴에 걸어두는 것에는 성공했다.
"무엇을 숙이라는 말씀이신지."
"왕자의 말에 되물음이라니. 무례하구나."
완전한 하대.
지금 그레이는 화를 내기보다는 제 귀를 의심하는 편을 택했다.
이런 말을 들을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붓을 들어 그려 넣은 것 같은 어색한 웃음을 띄운 채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은 그런 그레이의 눈을 아까부터 응시하고 있었다. 한기가 어린 눈을 그대로 둔 채였다.
그레이를 내려다보는 표정 역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칼리안이 또렷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변경백."
그레이 브리센은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에반 브리센 후작의 장자. 실리케 브리센 왕비의 오빠.
검술에 한해서라면 대륙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이자 변경백.
그런 자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뻔하다.
시종이나 하고 있는 공작가 맏아들이 정말 이상한 것이다. 대부분은 당연하다는 듯 그레이같은 사람이 되고 살아간다.
칼리안 아니 베른은 그런 이들을 수도 없이 보아 왔다. 착해 빠진 체이스를 대신해 그들을 상대하고 다스렸다.
그래서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그대에게. 고개를 숙이라 하였다."
이런 부류는 바닥 끝까지 끌어내려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 배를 보이든 발톱을 내밀든 선택을 한다.
르메인조차 하지 않는 완벽한 하대에 그레이가 저도 모르게 험악한 얼굴을 했다. 옆에 서 있던 테시드가 침묵을 지키는 사이 그레이가 입을 열었다.
"방금 뭐라······."
"그대가 움직여야 할 것이 입이 아닐텐데."
칼리안은 그레이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았다.
그런 칼리안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표정에는 어무런 변함이 없었다.
그것을 본 그레이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키가 큰 편인 테시드보다도 머리가 한 개는 더 큰 장신이다. 그렇게 큰 몸을 꼿꼿이 한 그레이의 눈이 칼리안을 향했다.
'살기를 꺼내놓으려나. 혹은 이성을 놓고 어딘가 숨겨두었던 검이라도 뽑아 들려나.'
아니면 예상 외의 현명한 대처를 보여주려나.
칼리안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들이 오갔다.
그레이의 다음 행동을 예상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칼리안이 예측하던 이런 수들은 곧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일어나셨으니 예를 보이고 앉으십시오. 브리센 변경백님."
테시드가 이렇게 그레이의 행동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테시드를 향한 칼리안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레이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으나 지금 테시드가 돕고 있는 것은 칼리안이 아니라 그레이였다. 더 이상 실수하지 않도록, 이 사소한 감정 싸움이 더 큰 사고를 부르지 않도록, 중재를 하는 것이다.
고작해야 자작인 자가 변경백을 말리고 서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터였다.
아쉬운 점이라면 그런 테시드의 의도와 마음가짐을 칼리안만 파악했다는 것. 그리고 칼리안은 테시드가 나서지 않기를 바랐었다는 것 뿐.
칼리안이 잠시 테시드를 향했던 고개를 돌려 그레이를 다시 똑바로 쳐다봤다. 멀찍이 서 있었으므로 저보다 키가 큰 그레이를 딱히 올려다 볼 필요는 없었다. 그 눈빛을 본 그레이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 예전의 3왕자를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실리케가 보내왔던 편지의 한 줄 그 의미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실리케로부터의 소식 뿐 아니라 이곳 저곳에서 들려오는 칼리안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헌데 그것이 과장이 아니었을 줄이야.
그레이는 당장 칼리안의 목을 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만약 그런 일을 벌였다면 브리센 후작가 전체가 도륙을 당할 터. 아직은 섣불리 검을 들 때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했다.
"일어났으니, 그럼."
다만 그렇다 하여 얌전히 물러날 생각까지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레이의 얼굴이 비틀린 웃음을 만들어냈다.
검을 뽑아드는 대신 그레이는 아주 과장된 팔동작을 만들어 보였다. 누가 보아도 거짓이 가득한 예절이 그레이의 손끝에서 만들어졌다. 마치 서커스단의 광대가 할 법한, 윗사람을 향한 조롱의 의미가 가득 들어간 인사였다.
"그레이 브리센이 위대한 카이리스의 3왕자님을 뵙습니다."
그 후 그레이가 고개를 들어 칼리안을 쳐다봤다.
인사를 시켰고 인사를 했으니 그 모습이 경박한들 칼리안이 할 말이 있을리가. 그러니 이런 인사에는 과연 어떤 대응을 할 것인지를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든 그레이의 표정은 완전히 일그러졌다.
칼리안의 고개가 테시드를 향해 있었다.
그레이의 인사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칼리안은 그레이에 대해 더는 볼 것이 없다는 듯 테시드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피곤하다는 표정을 한 채로 입을 열었다.
"고단하여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변경백은 레딩턴 자작이 잘 챙겨주세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의 고개가 그제야 그레이를 향했다.
칼리안이 담담한 말투로 말을 맺었다.
"많이 아프다 하니."
그리고는 더이상 그레이를 상대할 필요를 못 느끼겠다는 것처럼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완전히 무시를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레이의 눈빛이 변했다. 결국 참지 못한 그레이가 칼리안의 뒤를 따라 한 발을 내딛었을 그 때.
- 콰앙!
생각지도 못한 굉음이 성을 흔들었다.
유리창이 흔들거릴 만큼의 큰 폭음을 들은 칼리안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순간적으로 느껴진 마력.
그 기운은 바로 아르센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