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찾았습니다 (2)
칼리안의 시녀인 메를린이 방 문을 열며 말했다.
"들어가십시오."
비어 있는 칼리안의 방을 찾은 것은 앨런이었다. 앨런이 안으로 들어가자 메를린이 밖에서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곧 앨런은 침실 옆의 금고로 걸어가 조금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그것을 열었다. 레넌과의 일로 금고가 꽤 많이 비워져 있는 것을 잠깐 확인한 앨런이 손에 들린 서류와 수표 몇 장을 그 안에 넣었다.
이제는 폴룬 상단이 된 옛 브리센 상단의 수익금 일부였다.
상단을 살 때 멜피르 폴룬의 이름이 쓰이긴 했어도 실질적인 돈은 모두 이 금고에서 나왔었다. 때문에, 받기만 하는 것은 질색이었던 멜피르는 상단 수익의 일정 금액을 멋대로 칼리안에게 보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것 역시 거래이니 칼리안도 거절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면서.
그래서 이렇게 앨런이 폴룬 상단의 첫 수익금을 넣어두기 위해 이렇게 주인 없는 방에 들어온 참이었다.
흥얼거림 같은 혼잣말이 앨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왕자님은 돈이 마를 날이 없으시니."
처음 금고 속을 들여다 봤을 때 얼마나 놀랐었는지를 잠시 떠올린 앨런이 혼자 피식 웃었다. 그 때의 놀라움은 오닉스 스톤으로 만들어진 욕조를 보았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칼리안의 금고에 대한 볼일을 모두 마친 앨런이 방에서 나와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메를린이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려올 즈음.
앨런은 때마침 계단을 올라오는 누군가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레딩턴 성의 창 밖을 보던 칼리안이 입 밖으로 내고 있는 것과 비슷한 말을 속으로 삼켰다.
'이런 우연이 있나.'
계단 난간 아래로 보이는 옅은 에메랄드 빛의 머리카락.
그 아래로 보이는 빛 없는 연두색 눈동자.
플란츠였다.
계단을 오르던 플란츠가 옆으로 비켜서는 이의 발 끝을 잠시 쳐다봤다. 그리고 다리를 움직여 앨런이 있는 곳까지 올라온 뒤에는 물끄러미 앨런의 얼굴을 봤다.
상대가 2왕자라 하여 상대하기 어려워 할 인물은 아니었던 앨런은, 그저 작게 웃는 표정을 한 채로 플란츠를 향해 여유롭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플란츠 왕자님."
그 말에도 플란츠는 대답 없이 앨런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조용히 서 있는 시간이 꽤 길었다.
아무리 플란츠가 왕자라 하더라도 앞에 서 있는 이가 앨런 마나실이었다. 브리센 후작조차, 아니. 국왕 르메인조차 앨런을 함부로 대할 수 없지 않던가. 때문에 앨런의 인사에 답하지 않고 이렇게 세워두는 것에 플란츠의 시종이 불안함을 느낄 때 쯤.
"마법사. 당신을 만나서 바뀐걸까. 바뀌어서 만난걸까."
플란츠의 입이 열렸다.
그런데 인사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칼리안이 로젤리타를 떠나기 전 플란츠가 자신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었다는 말을 앨런에게 전했었다. 따라서 앨런은 플란츠가 하는 이야기가 칼리안의 정체와 관련된 내용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그런데 주변에 듣는 귀가 있음을 의식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 말버릇이 그런 것인지 플란츠가 꺼내든 말이 상당히 추상적이었다. 그래서 앨런은 웃고 있던 얼굴 그대로 되물었다.
"바뀌다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신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한 앨런의 태도에 플란츠가 다시 말했다.
"내 아우님이 많이 바뀌었던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아직 대답을 못들어서. 당신은 알까, 하고."
굳이 대답이 필요하다면 '칼리안이 바뀌어서 앨런과 만난 것이다' 라고 해야 할 터였다. 하지만 앨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술을 물리시니 생각이 많아지신 겁니까, 아니면. 생각이 많아져 술을 물리신 겁니까."
2왕자인 플란츠에게 '술'을 직접 언급한 것은 르메인이나 실리케 그리고 란델이 전부였다. 그만큼 지금 앨런이 꺼낸 것은 상당히 무례한 말이었다. 물론 르메인이었다면 이 정도의 말은 이제 그저 일상적인 표현으로 듣고 넘기겠지만.
플란츠의 시종이 앨런을 쳐다봤다.
주의를 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앨런의 시선은 플란츠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그것을 본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말했다.
"······ 아쉬워하는 사람이 여기에도 있군."
플란츠가 더 이상 망나니같은 행동을 하지 않고 있음을 아쉬워할 이라면 란델 뿐일 것이다.
따라서 앨런은 언젠가 란델도 플란츠가 술을 끊었다는 것에 대해 말을 했었나보다 하는 정도로 이해했다. 그리고 플란츠의 첫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누구나 변합니다. 플란츠 왕자님."
플란츠가 다시 한번 앨런을 응시했다.
여전히 의심을 놓지 않는 것이다.
"변함의 방법이 술을 끊는 것이든, 형제들의 미친 짓에 집어먹었던 겁을 끊는 것이든. 차이가 있겠습니까."
순간 둘 사이에 정적이 맴돌았다.
생각지도 못한 앨런의 독설 때문에.
"하."
곧 플란츠가 헛웃음 소리를 냈다.
앨런은 날카로운 선을 지닌 눈으로 플란츠를 고스란히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누구나 변하니, 그저 그 뿐이지요."
그 말을 끝으로 앨런은 플란츠에게 가벼운 목례를 한 뒤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가 사라졌다.
화를 내는 대신, 플란츠는 가라앉은 연두색 눈으로 앨런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앨런의 독한 말을 한 번 곱씹었다.
"미친 짓이라······."
한참동안 플란츠의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 * *
레딩턴 영지의 영주인 테시드 레딩턴 자작은 40대 중반의 키 크고 마른 사내였다.
사려 깊고 진중하기로 유명하다던 얀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는 지금 상당히 깊은 생각에 빠진 얼굴로 창 밖을 보고 있었다.
테시드는 특별히 어떤 왕자의 편에도 서지 않은 몇 안되는 귀족 중 하나였다. 다만 르메인의 탄신일 축제에 나타난 칼리안의 모습을 꽤 인상깊게 느꼈던 바는 있었다.
때문에 예정에 없던 칼리안 왕자의 방문은 물론 갑작스럽기는 했으나 특별히 싫을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저 칼리안이 불편함 없이 머물다 가도록 조금만 신경을 쓰면 되리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지금 들어오고 있는 저 마차들이 없었다면 그 생각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을 터였다. 테시드의 입에서 지금의 심경을 나타내는 한 마디 말이 툭 튀어나왔다.
"낭패로군."
마차에 보란듯이 새겨 넣은 브리센의 문장을 알아보지 못할 테시드가 아니다.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카이리시스로 오는 중이라는 것은 몰랐으나 저 문장을 붙인 마차에 있는 이들과 칼리안의 관계가 그리 유쾌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무튼 이제는 창 밖이나 보며 고민할 시간이 더는 없었다.
결국 테시드는 아무래도 지금 들어오는 이들에게 칼리안 왕자가 이곳에 와 있음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돌렸다. 완곡한 말로 브리센의 사람들을 돌려보내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테시드에게 분명 좋지 않은 영향이 있겠지만 이미 먼저 와 있는 손님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나.
그런데 그때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
"칼리안 왕자님의 시종이 전해드릴 말이 있다고 합니다."
테시드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들어오라 하게."
곧 그의 앞으로 온 칼리안의 시종 얀이 테시드를 향해 간단한 인사 후 칼리안의 말을 전했다.
"왕자님께서 자작이 저들에게 왕자님이 이 곳에 계신 것을 미리 알리고 돌려보낼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물어보라 하셨습니다."
생각을 그대로 들킨 것 같은 기분에 테시드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그것을 보고 대답을 짐작한 얀은 별 표정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마차에서 내리는 것이 다른 이들이라면 그리 해도 괜찮지만 만약 브리센 변경백이라면 보내지 말고 함께 차나 마시자 하셨습니다."
그레이라니.
예상치 못한 이의 이름이 나오자 테시드가 다시 한번 놀란 눈을 하며 물었다.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아닌 가문의 다른 사람들이라면 돌려보내고, 만약 변경백이 맞다면 들여보내달라는 말인가."
"네. 맞습니다."
"······ 왕자님께서 나를 구해주시는군."
인사치레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그레이 쯤 되는 이를 돌려보내려 한다면 단순히 좋지 않은 영향을 받는 정도의 선에서 끝나지 않을테니까. 그러니 무리하지 말고 들여보내도 괜찮다고 칼리안이 이렇게 배려를 해 준 것임을 알아들었다.
"알겠네. 그렇게 하겠다 전해드리게."
할 말을 마친 얀이 밖으로 나갔다.
이제 정말 코앞까지 다다른 마차를 본 테시드가 다소 긴장한 얼굴을 했다.
* * *
칼리안이 가벼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브리센 변경백에 대해 알고 있는대로 얘기해줘."
얀의 머릿속에는 대부분의 귀족에 대한 정보가 완벽히 정리되어 있었다. 왕자의 상급 시종이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었다. 때문에 얀은 주저함 없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꽤 오래 전에 변경백으로 봉해졌는데 그 당시 브리센 후작과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변경백이라는 자리보다는 수도에서 기사들을 양성하다 후작 작위를 세습하고 싶어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리고 전형적으로 안하무인한 성격이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안좋은 소문은······."
그렇게 말한 얀이 조금 목소리를 낮추어 뒤를 이었다.
"집에 마련된 별실이 네 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지막 말에 칼리안이 실소했다.
집에 별실을 마련했다는 내용 역시 귀족들의 은어였다. 한 마디로 아내가 아닌 여자만 넷이 더 있다는 소리다.
"검을 잘 다루면서 안하무인하고 변경백의 자리에는 그리 애정이 없지만 후작의 자리에는 욕심을 냈었고. 한 편으로는 여자를 좋아한다. 이런 말이네."
"네. 맞아요."
얀의 평가를 기억해 둔 칼리안이 한 가지를 더 물었다.
"나는 변경백을 만난 기억이 없는데. 혹시 만났던 적이 있었어?"
"제가 왕자님의 시종으로 오기 전에 한 번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기억나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요."
얀이 없을 때였다면 칼리안이 11세가 되기 전이라는 소리였다. 칼리안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 때 만났었다면 지금 내 이런 모습은 상상도 못하고 있겠군.'
물론 실리케로부터 칼리안에 대한 많은 것을 전해듣기는 했을 것이다. 그가 칼리안에 대한 실리케의 말을 어디까지 믿고 있는지는 이제 곧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그때, 똑똑 하고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얀이 밖으로 나가 방을 찾은 이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칼리안이 언뜻 고개를 돌려 보니 레딩턴 자작의 집사인 듯 했다.
다시 한번 창 밖을 쳐다보니 여전히 같은 곳에 놓인 마차가 보였다. 그리고 하인들이 마차의 말을 풀어 마굿간으로 데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레이가 방문한 것이 맞다는 뜻이다. 때문에 칼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레이를 만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곧 얀이 돌아서 걸어와 칼리안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응접실에 브리센 변경백과 레딩턴 자작이 기다리고 있다 합니다. 바로 가시겠습니까?"
"그래야지."
칼리안이 선선히 대답했다.
먼 남쪽에서 열심히 달려온 칼리안과 대리인 발령이 지연되는 바람에 예정보다 늦게 출발한 그레이 변경백. 둘이 같은 날 한 장소에서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다시 한번 웃으며 응접실로 걸어갔다.
그리 호화롭지 않게 꾸며진 응접실에는 딱 둘만 있었다. 그레이 그리고 테시드. 테시드는 조금 긴장한 듯한 얼굴이었으나 그레이는 아니었다.
칼리안이 들어서자 테시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레이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말 위에 앉은 채로 혹은 자리에 앉은 채로 왕자를 맞이할 수 있는 귀족은 오로지 단 한명. 슬레이만 혼 지그프리드 공작 뿐이었다.
그 외의 모든 귀족은 기실 왕자보다 아래의 서열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문 앞에 선 채로 잠시동안 그레이를 쳐다봤다.
그런 칼리안의 시선을 한참동안 즐기던 그레이는 실리케를 닮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시는지 모르겠으나 제가 부상을 당했습니다. 하여 온전한 예를 갖추지 못하겠군요. 칼리안 왕자님."
당연히 핑계다.
저 멀끔한 얼굴과 옷매무새 그 어느것도 병자의 행색은 아니었으니.
'실리케가 나에 대해 상세히 전했을 그 내용을 전혀 믿지 않고 있다는 말이 되나.'
그러니 그레이는 지금 앨런 마나실 하나 등에 업고 천지분간 못한 채 날뛰는 3왕자 칼리안을 휘어잡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칼리안이 작은 미소를 띄워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군요."
칼리안이 당황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그레이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이며 대꾸했다.
"네 그러니 이해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칼리안의 얼굴에 담겨 있던 웃음이 지워졌다.
실리케를 대했을 그 때처럼 붉은 눈에 서늘한 빛이 어렸다.
카이리스 3왕자의 입에서 위압감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개라도 숙이거라. 변경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