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59화 (60/527)

제13장. 찾았습니다 (1)

시스파니안을 만난 지 열흘이 지났다.

그리고 칼리안은 여전히 지그프리드의 성에 있었다.

- 그냥 영영 안 오실 요량이십니까?

절반 쯤의 타박과 절반 쯤의 서운함이 섞인 앨런의 말을 들은 칼리안이 웃었다. 칼리안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는 앨런에 대한 절반 쯤의 미안함과 절반 쯤의 고마움이 섞인 웃음이었다.

- 왕자님 일정이 늦어질수록 실리케가 준비해두는 것이 많아집니다. 가능한 서둘러 돌아오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 네. 저도 본래부터 이렇게 오랫동안 머물 예정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말씀드렸던 문제를 아직 해결하질 못해서요.

칼리안이 지그프리드 성에 열흘이나 머물게 된 것은 얀으로 인해 떠올리게 된 한가지 생각 때문이었다.

시스파니안을 만난 후 슬레이만과 거하게 칼을 맞댄 그날 칼리안은 '과연 얀이 칼리안의 본 모습을 알고 있는가'에 대해 슬레이만과 아주 잠깐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러다 슬레이만을 향해 질문 하나를 했다.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은 내 오러를 알아볼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변경백이 에반 브리센 후작보다 검술이 뛰어나다 알려졌으니 아마도 왕자님의 몸 속에 오러가 있다는 것을 눈치챌 가능성은 높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같은 생각을 한 슬레이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오러를 숨길 방법은 역시 없을까요?'

소드마스터가 걷는다는 '검의 길'이란 곧 깨달음의 길이다.

각자 제각기 다른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고 검의 길에 들어선다. 오러를 깨우치는 방법이 서로 모두 달라 그것을 교육할 수도 없었다. 대륙에 소드마스터가 고작 여섯 뿐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름난 가문에서 나고 자라거나 소드마스터에게 검술을 교육받는다면 검의 길에 오를 확률이 늘어날 뿐. 반드시 깨우침을 얻게 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 수가 극히 적다 보니 서로가 서로의 실력을 대충이나마 아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오러를 숨겨야 할 필요성도 없었다. 베른이었을 적에도 마찬가지였으니 칼리안도 처음에는 오러를 숨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베른이 아닌 칼리안은 경우가 달랐다.

칼리안.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소드마스터가 아닌가.

그러니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과 싸울 땐 싸우더라도 열 다섯 살의 '마법사'가 검의 극의를 깨달았다는 사실을 되도록 숨겨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칼리안의 정체에 대해 얀에게 굳이 이야기 하지 않은 것처럼.

'오러를 숨기는 것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슬레이만도 다르지 않았던 터라. 슬레이만은 묵직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칼리안의 눈이 아르센에게 가 닿았다.

오러 자체를 숨길 방법은 없었으나 어쩐지 유사한 해결 방법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칼리안이 아르센을 불렀다.

'헤르츠 경.'

또 무슨 일을 시키려 그러나 하는 표정의 아르센이 칼리안 쪽으로 왔고 칼리안은 간단한 질문을 했다.

'혹시 마나를 숨길 수 있는 마법 알고 있습니까.'

그 말에 아르센이 곧바로 대답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네 개의 서클을 가지고 계시니 이제 왕자님께서도 사용하실 수 있는 마법입니다.'

마법사이자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소드마스터.

그리고 서클과 오러의 근원이 같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칼리안이 웃었다.

'알려주세요, 그 방법.'

이렇게, 칼리안은 마나를 숨기는 마법을 배웠다.

마법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문제는 유지에 있었다. 걷고 말하고 먹고 자는 동안에도 마법을 유지하는 것에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그리고 그것으로 오러를 완전히 감추는 것에 다시 사흘이 걸렸다.

칼리안에게서 오러의 기운이 새어 나오는지를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슬레이만 뿐이었으니 지그프리드 성을 떠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열흘을 머물렀다.

'이제 정말 감쪽같습니다! 칼 근처에도 못 가본 얌전한 왕자로밖에 안보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 아침 오러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을 슬레이만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따라서 칼리안은 이제 조금 익숙해진 공동묘지를 찾아 이렇게 앨런과 대화를 하게 된 터였다.

칼리안이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여전히 수두룩한 비석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조용히 서서 칼리안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얀이 보였다.

- 준비가 길었습니다. 내일은 정말로 출발할 겁니다.

그렇게 말을 전한 칼리안이 앨런에게 물었다.

- 혹시 브리센 변경백은 이미 수도로 출발을 했을까요.

- 변경백령에 대리인을 보내는 것을 최대한 늦췄습니다. 보름은 더 지나야 출발할 수 있을겁니다.

그레이가 빨리 도착해봐야 좋을 것이 없으니 카이리시스에 당도할 날을 가능한 늦추도록 수를 썼던 모양이었다.

- 감사합니다.

- 그리고 곧 마법 학원의 예비 수련생 모집 시험을 치를 예정입니다. 아마 왕자님께서 도착하실 즈음이면 학생들을 만나보실 수 있을 터이니 기대를 해보시지요.

- 브리센 상단 인수로 바쁠텐데 마법 학원까지 벌써 준비가 되었습니까.

멜피르 폴룬에게 맡겨두었던 마법 학원의 진척 상황이었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칼리안이 꽤 놀란 얼굴을 했다.

- 네. 일처리가 아주 빠릅니다. 그래도 손이 모자라는 듯 보입니다. 마법 학원 일을 도와줄 이는 제가 적당히 골라 맡기겠으니 상단의 인재가 될 만한 인물이 있는지 한번 찾아봐 주시지요.

- 찾아본다고 해도, 지그프리드령에 있는 이를 수도로 데리고 가기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 좋은 것을 자꾸 잊으십니까.

앨런이 장난 가득한 목소리를 계속 보내왔다.

- 앨런 마나실이나 키리에를 데려왔던 것처럼 말입니다. 왕자님께서 알고 있는 '미래'에 이름이 날 인재가 있는지 기억을 한 번 뒤져보시지요.

- 제가 상단 쪽으로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던 터라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없네요. 당장은 떠오르는 인물이 없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앨런과의 대화를 마친 칼리안이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가며 성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지그프리드 성에서는 다시 한번 성대한 석찬이 열렸다. 이제 떠나겠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칼리안의 볼 일이 모두 끝났으니 곧 출발하리라는 것을 안 슬레이만이 준비해 준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칼리안은 슬레이만과 드미레아의 환송을 받으며 지그프리드령을 나섰다. 유란을 포함한 기사들은 함께하지 않았다. 레이첼의 이동 마법을 통해 빠른 이동이 가능했으나 마법을 적용할 수 있는 인원에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칼리안과 키리에, 그리고 아르센만으로도 충분한 전력이었으니 크게 위험할 일은 아니었다.

"또 오실 때는 봐드리지 않겠습니다."

얀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슬레이만을 향해 칼리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 때는 지금처럼 만만하지 않을 겁니다."

"으하하! 그야말로 기대되는 소리입니다."

르메인과 앨런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말을 끝으로 칼리안과 슬레이만은 다시 잠시 헤어졌다.

카이리시스로 돌아가기 위해서.

* * *

수도 카이리시스의 아스트리샤 거리가 아침부터 모여든 귀족들로 북적였다. 카페마다 삼삼오오 모인 귀족들의 대화 주제는 속속 도착하고 있는 전서구에 묶인 편지 내용이었다.

- 칼리안이 시스파니안의 공동에 들어서자 찬란한 빛이 번쩍였다.

시스파니안을 닮았다는 이유로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는 칼리안이었다. 그랬으니 지금 전해진 내용의 의미가 대체 무엇일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시스파니안이 다음 대 국왕으로 칼리안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는 식상할 정도로 많이 들렸다. 심지어 칼리안이 바로 시스파니안이 아니냐는 허무맹랑한 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랬으니 마치 이맘때 쯤 소식이 전해질 것이라 알고 있었다는 듯이 하필 딱 그 날부터 시작된 '폴룬 마법학원 예비 수련생 모집 시험'에 카이리시스의 모든 청소년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구경 잘했어요, 마나실 님. 그럼 저는 이만."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는 마법 학원 시험장을 보며 마법사 협회의 협회장 에우리아가 이렇게 말하며 재빨리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앞에 서 있던 앨런의 몸이 슉 사라지더니 에우리아의 등 뒤에서 다시 슉 나타났다.

"세 보 앞으로 워프 쓰지 마요!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데!"

어느새 자신의 뒤에 서서 웃고 있는 앨런을 보며 에우리아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텔레포트가 아니라 워프다. 무려 6서클의 스킬이다.

에우리아는 쓰고 싶어도 못 쓰는 고레벨의 마법을 앨런은 고작 에우리아 한 명 붙들자고 쓰고 있는 것이다.

에우리아의 말을 들었는지 안들었는지 앨런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한 가운데 놓인 의자를 가리켜보였다.

시끄러우니 빨리 가서 앉으라는 뜻이었다.

에우리아가 울상을 지었다.

"마나실 님. 멜피르 폴룬 남작이 마법 학원을 세우려는 건 저도 당연히 알고 있었어요. 예비 수련생 모집 시험이 오늘부터인 것도 알았고요. 카이리스에도 마법 학원이 생긴다니 정말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도 생각해요."

진심이었다.

에우리아는 앞으로 카이리스의 마법이 발전할 생각에 매우 기뻐하며 멜피르 폴룬에게 응원의 말도 성의 있게 건넸다.

"그런데 제가 직접 돕기에는, 저 진짜 바쁘다니까요."

그 학원의 입학 시험일 아침이 되자 앨런이 찾아왔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갈 데가 있다며 에우리아를 질질 끌고 여기까지 왔다.

마법사 협회의 협회장 에우리아가 아닌가.

학원 입학 시험이 있다는데 함께 앉아 자리를 빛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질질 끌려 시험장까지 오기는 했지만 그런 생각이 든 에우리아는 도망가려던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임시로 만들어진 시험장의 긴 테이블로 걸어가 한 자리 채워주는 것에 동의했다. 만약 시험 감독을 볼 사람이 부족하면 도와주겠다는 생각도 했다.

- 폴룬 마법학원 교장 에우리아 세이렌 그런데 테이블 한 가운데 놓인 저 명패는 뭐란 말인가.

다섯 개의 자리에 놓인 명패들 중에 왜 가운데 놓인 저것만 가장 크고 심지어 저것만 금색으로 칠해져 있다는 말인가?

에우리아는 단호한 목소리로 거절 의사를 표했다.

"다른 사람 시키세요."

그 말에 앨런은 고개를 대충 끄덕끄덕하며 다시 한번 의자를 가리켜보였다. 에우리아의 입에서 깊디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앨런은 말 한마디 안한 채 마법 학원의 일을 도와줄 이를 적당히 골라 앉혔다.

* * *

다시 시간이 흘렀다.

수도 카이리시스로 돌아가는 길. 칼리안은 호숫가의 낮은 절벽에 세워진 레딩턴 성에서 사흘을 머무르게 되었다.

왜 하루가 아닌 사흘이 되었느냐면 앨런의 손녀 베로니카의 말이 다리를 다쳤기 때문이었다. 레이첼의 마법으로 빨라진 속도 때문에 바닥의 구덩이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넘어진 것이다.

다행히 키리에가 곧바로 베로니카를 잡아내어 사람은 다치지 않았고 베로니카의 말은 히나가 치료 할 수준은 되었다. 물론 히나의 치유가 한번에 모든 상처를 아물게 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말이 다 낫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덕분에 레딩턴 성을 찾아오게 된 칼리안은 이른 아침 영주성 밖으로 보여지는 모습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고요한 물안개가 피어오른 거대한 호수와 푸른 하늘이 상당히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떼 지어 날아오르는 물새들을 보던 칼리안의 뒤에서 작은 감탄이 흘러나왔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입니다."

키리에였다.

무려 키리에가 이렇게 먼저 말을 꺼낼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 말에 동의하듯 얀이 따뜻한 민트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영주인 레딩턴 자작도 이 곳에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사려 깊고 진중하기로 유명해서요. 곧 카이리시스에 들어갈텐데 사흘 동안 푹 쉬고 간다 생각하세요."

"그래. 그래야지."

칼리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얀의 말대로였다.

이제 이 곳에서 나흘만 더 가면 카이리시스다. 앨런과 르메인, 그리고 실리케와 란델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왕궁에 도착하면 당분간 이렇게 먼 곳까지 나올 일도 없을 뿐더러 지금 같이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하루만 보내고 가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들 곳이도 하니까. 여유롭게 보낼게."

"네, 왕자님."

그 여유.

굳이 마음먹고 가져보려던 그 여유는, 하지만 딱 한나절동안만 이어졌다.

"······ 이런."

그날 오후, 창 밖으로 레딩턴 성에 세 대의 마차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마차의 옆에 새겨진 검을 쥔 그리핀 문장을 본 칼리안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이렇게 반가운 우연이 있나."

그것은 바로 브리센 가문의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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