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살고 있습니다 (5)
- 참. 한가지 전해드릴 일이 있습니다 스승님.
- 네. 말씀하시지요.
- 레이첼 그레이스와 베로니카 마나실이 이곳에 있습니다. 오늘 잠시 만났어요.
리베른은 카이리스와 달라서 결혼을 하더라도 가주의 성으로 바꾸지 않는다 하더니 레이첼 역시 같았다. '마나실'이 아닌 자신의 성을 사용했다.
칼리안의 말을 들은 앨런이 반겨하는 목소리를 냈다.
- 아주 잘 되었습니다.
- 함께 수도로 돌아갈 것 같습니다.
- 함께 오셔야 할 겁니다. 함께 오시면, 엘프들이 다니는 숲의 길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나마 살만 할 겁니다.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 레이첼도 유능한 마법사입니다. 마법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동 마법을 연구하고 있지요.
- 아, 그럼. 지그프리드 공이 예정보다 빠르게 도착한 것이 혹시······.
- 벌써 도움을 준 일이 있었습니까.
시찰에 나섰던 슬레이만이 예정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 있던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슬레이만이 시찰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에 레이첼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아주 마음에 드는 소식을 접하게 된 칼리안은, 앨런과의 대화를 마치고 성에 돌아오자마자 레이첼과 아르센을 응접실로 불렀다.
"준비했으면 하는 일이 있어 두 분을 불렀습니다."
"네, 왕자님. 무엇을 준비했으면 하십니까."
"카이리스의 땅이 너무 넓어서요."
칼리안이 이렇게 운을 뗐다.
카이리스는 넓다. 너무 넓다.
지그프리드의 영지로 오면서 이 사실을 여실히 깨달았다. 수도에서 공작령을 오가는데 몇 달이 걸린다니. 상상 이상의 크기가 아닌가.
그런데.
시스파니안이 칼리안에게 '다시 오라'고 했다.
시스파니안을 만나는 것이야 그리 거부감 드는 일은 아니었으나 지그프리드에 다시 오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길 위에서 또 허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수도에서 다른 곳을 오가는 것에 낭비되는 시간이 아깝습니다. 그 길을 단축하기 위해 엘프들을 또 만나는 것은 고려해 볼 가치조차 없는 일이고."
아르센이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지역간의 이동 시간을 좀 단축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만약 각 지역을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면 마법사단 발칸도 훨씬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왕자들의 싸움이 어떻게 번질지는 몰라도, 만에 하나 그것이 내전으로 바뀐다면 이동 시간이 빠른 쪽이 당연히 몇 배는 더 유리할 터였다.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을 잠시 떠올린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이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공간이동이고, 공간이동을 위해 있어야 할 것은 당연히 이동 마법진이 아닙니까. 그래서 나는 카이리스 이곳저곳에 공간 이동 마법진을 구축할 생각입니다."
카이리스 각 지역을 순식간에 오갈 수 있도록 해 줄 공간 이동 마법진. 그것을 만들려는 생각을 했고, 마법진 구축을 위한 적임자 둘을 찾았다.
이동 마법을 연구하는 마법사.
그리고, 할 일 없는 마법사.
"아······."
아르센이 올 것이 왔다는 얼굴을 했다.
쉽게 말해 당분간 잠을 자기는 글렀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실 칼리안이 공간 이동에 대해 관심을 처음 가졌을 때 그 일이 자신에게 올 것 같다는 불안한 예측을 이미 했었다. 게다가 칼리안이 공동에 들어갔던 사이 아르센은 레이첼이 어떤 것을 연구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런 아르센의 얼굴을 짐짓 모른척한 칼리안이 먼저 레이첼에게 말을 건넸다.
"리베른에는 각 지역으로 통하는 이동 마법진이 있다 들었습니다."
"네. 단순히 있다고 할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 만들어져 있다고 해야겠지요. 비싸기는 해도 돈만 있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수준이니까요."
칼리안은 아직 공간이동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마법진은 옛 칼리안의 전문 분야도 아니었다. 따라서 레이첼의 답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보인 칼리안이 다시 한번 질문을 했다.
"말했듯이 나는 그것을 카이리스에도 구축하고자 합니다. 다만 리베른보다 이동 거리가 멀 수 있는데. 혹시 어렵겠습니까."
레이첼은 리베른의 이동 마법진 구축에 이미 여러 차례 도움을 주었던 적이 있었다. 때문에 장거리 이동에 대한 해결 방법도 잘 알고 있었다.
"거리가 멀더라도 그리 문제가 될 것은 없어요."
별 것 아니라는 그 표정을 본 칼리안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르센은 매우 안심하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칼리안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칼리안이 가장 중요한 조건을 덧붙였다.
"좋군요. 그런데 당장은 내 세력만 쓸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두 형님의 세력과 어떤 식의 다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누구나 쓸 수 있을 마법진을 구축하는 것은 득이 될 것이 없으니까요."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생각하던 레이첼이 물었다.
"리베른에서는 마법진 자체를 경비합니다. 그런데 왕자님 말씀은······ 이동 마법진이 있는 지역의 보안 설비가 아니라 외부인은 마법진 자체를 이용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 맞나요?"
칼리안이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좋은 것은 독점해야 더 좋으니까요."
만고불변의 진리다.
웃고 있는 칼리안의 얼굴이 어쩐지 앨런과 좀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레이첼이 대답했다.
"그런 조건을 적용했던 적은 없었어요. 당장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한 번 생각을 해볼게요."
마법사단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찾아온 레이첼이 카이리시스에 도착도 하기 전에 숙제부터 안겨준 셈이었다. 그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던 칼리안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 고맙습니다."
그 뒤, 칼리안은 아르센을 향해 입을 열었다.
"헤르츠 경도 함께 생각해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아르센이 물었다.
"혹시 수도에서는 반대할 이가 없겠습니까? 전하께도 말씀을 먼저 드려야 함이 맞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말씀을 드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만, 전하께서는 반대하지 않으실 겁니다. 다른 세력들도 언제까지고 반대하지는 못할 테니 괜찮습니다. 그러니 당장 진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때가 되면 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미리 계획을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만들어 놓기는 할 테니까 다른 말 말고 일단 고민이나 해보라는 소리다.
그러는 왕자님 너도 마법사 아니었냐는 말은 차마 할 수 없던 아르센은 그 길로 지그프리드 성의 도서관으로 갔다.
* * *
레이첼과 아르센을 만난 뒤, 칼리안은 슬레이만을 찾아갔다.
"조용히 이야기 나눌 수 있을 만한 딱 좋은 곳이 있습니다."
대화 요청에 흔쾌히 응한 슬레이만이 간 곳은 칼리안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응접실이나 서재 혹은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던가.
칼리안은 은은한 차 향이나 묵묵한 책 내음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땀 냄새가 강하게 밴 슬레이만의 개인 수련실을 어색하게 둘러봤다.
"이게 또 은근히 앉을 만 합니다."
칼리안의 어색함을 눈치채지 못한 슬레이만이 수련실 한 쪽에 놓인 통나무를 가리켜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결국 칼리안의 웃음보가 터졌다.
얀이 그 모습을 보았다면 당장 난리를 쳤을 테지만 칼리안은 사양하지 않고 통나무 위에 기분 좋게 걸터앉으며 말했다.
"생각 같아서는 함께 왕궁으로 가자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스승님과 함께 계시면 어떤지도 보고 싶고."
묘하게 닮은 듯 아닌 듯한 둘이 함께 있으면 어떨지 도무지 상상이 안되는 까닭에 한 말이었다.
다른 뜻이나 의도 없이 순수한 호의에서 나온 말.
곧 지그프리드의 땅을 떠나야 하니 슬레이만을 자주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보인 그 말에, 슬레이만 역시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생각 같아서는 저도 왕자님께 이 곳에서 저와 검이나 겨루며 지내시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곧 둘 사이에서는 누가 듣는 자리에서 나누기는 어려울 대화들이 오갔다. 얀의 둔함이 주 이야깃거리가 됐다. 얀은 칼리안이 호신술 수준의 검술만 조금 익힌 것으로 믿고 있다는 말에, 슬레이만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웃었다.
그러면서도 슬레이만은 칼리안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오러를 다룰 수 있게 되었는지 의심하거나 궁금해하지 않았다. 의심할 곳이야 널렸지만 특별히 중요한 일이 아니라 생각하는 까닭이었고, 같은 이유에서 칼리안도 굳이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 후로도 최근 르메인이 왕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졌고 그것이 앨런의 독설 덕분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더 꺼내둔 뒤에야 칼리안의 입에서 본론이 나왔다.
"오늘 시스파니안을 만났습니다, 지그프리드 공."
"네. 알고 있습니다. 시스파니안의 의지와 무슨 대화를 나누셨습니까."
"아니. 의지가 아니었어요."
칼리안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눈치 챈 슬레이만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설마 본신을······."
채 입에 올리지도 못하는 질문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본신을 만났습니다."
슬레이만의 얼굴에 항상 드리워져있던 큼지막한 미소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그러더니 곧 큰 웃음소리가 되었다.
"으하하하! 그럴 줄 알았습니다! 살아있을 줄 알았습니다!"
실존하는지조차 모르는 고룡의 빈 둥지를 500년이나 지켜온 가문의 가주였다. 시스파니안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 기분이 오죽 기쁘겠는가.
때문에 슬레이만은 그 후로도 한참을 웃다가 말했다.
"다행입니다. 우리 가문이 의미없이 고집을 부린 것이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본래 하려던 말을 다시 꺼내들었다.
"시스파니안이 이 곳으로 직접 올 지는 모르겠지만 머지않아 시스파니안을 한번은 더 만나게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슬레이만이 한번 더 놀란 얼굴을 했다.
칼리안이 조금 전 아르센과 나눴던 이야기의 연장선에 섰다.
"그래서 말인데. 카이리시스와 지그프리드를 조금 더 빠르게 오갈 수 있는 길을 만들고 싶습니다. 북쪽에 위치한 카이리시스와 남쪽의 지그프리드를 연결하는 것을 시작으로 카이리스 곳곳에 이동 마법진을 늘려나가고 싶은 생각을 하는 중입니다. 그 일로 공의 허락을 구하기 위해 대화를 요청했고요."
"이동 마법진이라······ 제 의견도 중요하지만 전하께서 허락을 하시겠습니까."
슬레이만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카이리스에는 왕도가 있기 때문에, 이동 마법진까지 있으면 외부의 침입에 노출될 위험이 높아진다는 의견이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
"알고 있습니다. 만약 공께서 동의를 해주신다면 카이리시스가 아니더라도 휘트린 영지와 경로를 연결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칼리안의 영지인 휘트린은 카이리시스에서 나흘 거리에 있었다. 그러니 수도와 연결이 어렵다면 칼리안 개인의 땅에 마법진을 만들겠다는 소리였다.
칼리안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구축을 하게 된다면 나의 허락을 받은 이들만 이용할 수 있도록 제한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곳에 세워질 이동 마법진은 지그프리드 외성과 하루 이상 떨어진 거리에 구축하게 될 테고요. 마법진으로 인해 이 곳의 안전에 위해가 된다고 판단된다면 언제든지 없애셔도 무관합니다."
여기까지 설명이 되자 슬레이만은 잠시 생각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승인을 하신다면, 하루 이상의 거리에 구축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을 드릴 것이 더 있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슬레이만의 말에 칼리안이 씩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예리한 기운의 마나가 칼리안의 손 끝에 응집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슬레이만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련 신청을 하시는 겁니까. 안 그래도 그런 생각으로 왕자님을 이 곳에 뫼셨는데 먼저 말씀을 꺼내시니 아주 좋습니다!"
"대련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잠시 말을 멈춘 칼리안의 손에 응집된 마나가 어느새 커다란 사과 정도의 크기로 커져 있었다. 그것을 본 슬레이만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어렸다.
지금껏 단 한번도 보지 못한 형상.
그것은 불도 얼음도 바람도 아닌 전혀 새로운 힘이었다.
칼리안이 속성을 모두 지우고 서클의 근원이 되었던 순수한 오러의 기운만 남긴 덩어리였다.
칼리안은 수많은 유리 파편이 서로 뒤얽히며 휘몰아치는 듯한 응집체를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오러의 기운으로 만든 것입니다. 일반적인 오러는 매개체 위에 덧입혀야 하지만 운 좋게도 저는 마법을 함께 사용할 수가 있어서요. 마법사들이 이용하는 방법으로 마력을 집약시킨 뒤에 오러를 응집하니, 매개체 없이 오러 발현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칼리안은 며칠동안 깊이 고민해가며 생각해낸 힘을 슬레이만의 앞에 처음으로 보이고 있었다.
말은 쉽게 하였으나 오러와 마력을 함께 운용해야 하니 결코 수월한 방법은 아니었다.
"그런 것을 만들어 내시는 것을 보니 시스파니안의 본신이 남아있는 것은 우리 가문에 다행한 일이고,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제대로 일을 하는 것은 왕자님께 다행한 일인가 봅니다."
칼리안이 말없이 웃음을 지었다.
사실상 소드마스터였던 베른이 마법에 재능을 지닌 옛칼리안의 몸에 들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으나 그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해줄 수는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내가 부탁드리려 했던 것은."
칼리안이 잠시 눈을 감고 집중하자 마나 응집체의 형태가 바뀌기 시작했다. 서서히 길이를 늘려가며 얇아지더니 곧 하나의 '검'과 같은 모습을 만들어냈다.
그것을 본 슬레이만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이것을 제 '검'으로 쓰고자 합니다만. 아직 제대로 써 본 적이 없습니다. 때문에 강도도 예리함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것을 확인하고자 하십니까."
"네. 내가 가진 힘이 어느정도일지 가늠이 어려워서요. 공을 만났으니 정확히 확인을 해보고 싶습니다."
이제야 칼리안이 뭘 원했는지 제대로 깨달은 슬레이만이 강렬한 투기를 보였다. 그 얼굴에 만연한 웃음이 칼리안의 '검'을 향하고 있었다.
슬레이만이 짧게 말했다.
"오십시오."
어느새 뽑아 든 슬레이만의 검에 푸른 오러가 맺혔다.
동시에 칼리안의 신형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