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살고 있습니다 (4)
그 날.
지그프리드 공작령에서는 하루종일 새가 날아올랐다.
온갖 색의 전서구와 전서응이 카이리시스를 향해 출발한 것이다. 새들의 생김은 모두 달랐으나 편지의 내용은 모두 같았다.
- 칼리안이 시스파니안의 빈 둥지에 들어서니 밝은 빛이 뻗어나왔다. 그 빛이 지그프리드 외성 밖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지그프리드에 머무는 귀족의 가신들이 적어낸 소식은 거기까지였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나 빛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으니 다른 내용이 담길 수가 없었다.
그것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칼리안은 산책이라도 다녀온 듯한 얼굴로 산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성인식을 온전히 마쳤음을 간단히 선언한 뒤 곧바로 지그프리드 성으로 돌아갔다.
공작 슬레이만은 그런 칼리안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칼리안의 방에 점심식사를 따로 올리도록 전한 뒤 응접실과 연결된 테라스에 나와서 유유자적 바람을 쐬고 있었다.
테라스에 서 있던 중에 몇 마리의 전서구가 창공을 날아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된 슬레이만이 허허 웃었다. 그리고 순수한 놀라움을 담아 말했다.
"내 영내에 저렇게 많은 입이 있는지 이제야 알았다!"
지그프리드의 땅에 거주하며 밖으로 소식을 전달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도 파악하지 않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때문에 슬레이만의 옆에 있던 이가 핀잔을 주었다.
"이것이 지금 감탄만 하실 일입니까."
얀의 동생이자 지그프리드 공작가의 소가주인 드미레아였다.
드미레아는 얀처럼 동그란 눈매를 가진 귀여운 얼굴이었는데 어색한 것 같지만 또 묘하게 잘 어울리는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느새 훌쩍 커서는 잔소리까지 하기 시작한 딸을 보며 슬레이만이 부드럽게 말했다.
"감탄만 하고 넘어가도 괜찮지 않겠느냐?"
그러자 드미레아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큰 힘을 시기하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 아닙니까. 저들이 우리 가문과 엮일 일이 영영 없겠습니까. 어떤 가문의 가신들이 이 곳에 있는지 미리 알아두고 경계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를 들어가며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전달하고 있었다. 지그프리드의 다음 주인으로 조금씩 커가고 있는 드미레아의 모습을 본 슬레이만이 흐뭇하게 웃었다.
"좋구나. 너도 나를 조금만 닮은 모양이다. 내가 아무튼 결혼을 잘 했다!"
자식들이 자신을 많이 안닮았다며 좋아할 사람은 아마 슬레이만 뿐일 것이다. 항상 생각이 깊은 지그프리드 공작부인을 떠올리며 한바탕 웃은 슬레이만이 드미레아를 쳐다보다 말을 이었다.
"하지만 레아야. 우리 가문이 저들을 경계하면 그것은 정치가 된다. 우리는 지키는 이들이지 다스리거나 옹립하는 자가 아니다. 우리가 힘을 기르는 것은 방패를 들기 위함이 아니냐."
드미레아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슬레이만과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조금 뒤 드미레아가 멀리 보이는 창문 하나를 가리켜보였다. 칼리안이 머물고 있는 귀빈실 쪽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얀이 왕궁에 있었다.
그것도 칼리안과 아주 깊이 관계되어 있었다.
그래서 하는 말임을 슬레이만이라 하여 모르지는 않았다. 심지어 얼마 전 왕궁을 찾았을 때 이미 한번 얀에게 이름을 팔리지 않았던가.
그러니 얀이 다음 번에 필요로 하는 것이 과연 슬레이만의 이름 뿐일지 그의 검일지. 그것은 슬레이만도 장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경계하지 않더라도 대비는 하고 있지 않느냐."
그렇게 대답한 슬레이만이 성내에 마련된 훈련장 쪽을 쳐다봤다. 수많은 기사들이 어김없이 검을 맞대며 훈련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막 그렇게 매가리가 없지는 않다!"
얼빠진 것처럼 말하고 있기는 해도 자만이라기 보다는 자신감이 어린 소리였다.
다만 슬레이만은 무조건 자신의 생각만 고집할 인물은 아니었다. 때문에 드미레아의 머리를 얌전히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누구의 가신들이 여기 살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두마."
그제야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슬레이만에게 자신의 의견을 들어주어 고맙다는 말을 꺼내려는데, 테라스 문이 열리며 얀이 밖으로 나왔다.
"와. 전서구 진짜 많던데요?"
순수하게 감탄만 하는 인간이 한 명 더 늘어났다.
드미레아는 얼굴을 굳혔고 슬레이만이 다시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 많지 않더냐? 나는 매도 보았다!"
그 말에 대한 대답이라도 하듯 새가 또 날아올랐다.
그것을 보며 '또 간다, 우와!' 따위 말을 지껄이는 부자를 보는 드미레아의 눈에 시름이 깊었다. 언젠가는 이 가문을 짊어져야 할 어깨가 매우 무거워진 탓이었다.
* * *
- 충분한 준비가 되었다 생각되는 날에 다시 찾아오거라.
시스파니안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던 칼리안이 실소했다.
"또 무슨 말을 해주려고 그러시는지."
잠시 슬레이만을 만나고 돌아와 칼리안과 마주 앉아있던 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칼리안은 그 시선에 대답하는 대신 테이블에 놓여 있던 차가운 민트차를 들어올렸다. 컵 속에 든 얼음이 맑은 소리를 냈다.
"······ 충분한 준비라."
여전히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얀은 칼리안을 보던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쳐다보고 있는 것이 괜히 대답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일까봐서였다.
그러자 칼리안도 창 밖을 쳐다봤다.
슬레이만의 기사들이 잔뜩 있는 훈련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거기까지 찾아갔는지 키리에가 기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튼 열심이라 생각하며 시선을 돌리자 이번에는 정원에 앉아 있는 히나가 눈에 들어왔다.
히나는 무언가를 계속 쓰다듬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브론즈 색 곱슬거리는 털을 가진 푸들이었다. 얀을 하도 닮아서 이름까지 '얀'이 되어버렸다던 슬레이만의 강아지였다. 해맑게 웃는 히나의 얼굴을 본 칼리안이 중얼거렸다.
"새보다 강아지를 더 좋아하네. 체르밀궁에 개를 키워도 되나."
이제껏 한마디도 붙이지 않고 같이 차만 마시던 얀이 말했다.
"자꾸 히나에게 뭘 해줄까 하는 생각을 하시네요. 지난번에는 새를 생각하면서 관심을 보이시더니요."
그렇게 말하는 얀의 목소리가 꽤나 의뭉스러웠다. 무슨 생각에서 저런 말을 하는지 뻔했으므로 칼리안이 곧바로 오해를 풀어주었다.
"그런 관심 아니야."
연애를 꿈꾸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얀이 다시 히나를 쳐다보다 웃었다. 히나가 푸들 얀의 눈 앞에 대고 손짓을 하는 모습을 본 까닭이다.
"강아지한테까지 수어를 쓰네요. 귀엽다고."
그 말에 문득 궁금해진 것이 생긴 칼리안이 물었다.
"넌 어떻게 수어를 알아?"
별 생각 없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얀으로부터 대답이 없었다.
괜한 것을 물었음을 깨달은 칼리안이 말을 돌리려 할 때 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창 밖을 보던 눈을 떼지 않은 채였다.
"형이 있었어요."
있었다는 말.
그 말만으로도 설명이 되었다.
하지만 얀은 꺼낸 말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해주었다.
"건강하지 못해서······ 같이 지내려면 배워야 할 것이 많았어요. 곧 전부 소용 없게 됐지만요."
그렇게 말한 얀이 차를 들어 한모금을 마셨다. 대답할 만한 말을 찾지 못하는 칼리안의 얼굴을 보던 얀이 웃으면서 말했다.
"오래 전 일이니 괜찮습니다. 지금은 왕자님도 계시고요."
"······ 그래."
곧 얀은 다른 화제를 찾는 것이 분명한 목소리로 창 밖의 강아지를 가리켜보였다.
"쟤 겁 엄청 많아요. 얼마나 짖는데요. 체르밀에서 키웠다가는 플란츠가 가만 있지 않을겁니다. 란델 왕자도 그렇고요."
오래 이야기하며 침울해하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어색해하는 칼리안을 위해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죽은 형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 집어넣으려는 의도임은 분명했기 때문에 칼리안도 더 묻지 않고 새로운 화제에 대해 대답했다.
"그럼 카밀론으로 가야겠네."
카밀론궁.
왕세자의 거처였다.
얀이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물었다.
"지금껏 한번도 세자위에 대해 언급한 적 없으셨잖아요."
"체르밀에서는 못 키운다며. 그러니 가야지, 카밀론에."
얀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개나 키우겠다고 카밀론에 가겠다는 사람은 왕자님 밖에 없으실 겁니다."
칼리안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놨다.
민트 특유의 청량한 향이 썩 마음에 든다.
입 안을 가득 채우는 향을 잠시 음미하던 칼리안은 여유로운 얼굴로 창 밖을 보며 입을 열었다.
"시스파니안의 본신을 만난 왕자도 나 밖에 없을걸."
얀이 동그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칼리안의 말을 이해하기까지 몇 초가 흘렀다.
그 뒤 얀의 손에 들려 있던 유리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 *
지그프리드의 내성은 카이리스 왕궁과 마찬가지로 시스파니안의 힘이 닿는 곳이었다. 때문에 앨런과의 소통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칼리안은 앨런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한 적당한 곳으로의 안내를 얀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얀은 시스파니안이 정말 살아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칼리안을 직접 불러들여 대화를 나누었다는 소식을 접해 놀란 마음을 다 진정시키지도 못한 채 칼리안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시스파니안의 힘이 닿지 않으면서 인적이 드물고 내성에서 가장 가까운 적당한 장소를 가까스로 생각해낸 뒤 칼리안을 안내했다.
"여기는 사람들이 잘 안 와요."
칼리안이 주변을 둘러보다 작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다는 듯 웃는 모습과 참 어울리지 않게도, 주변에는 망자들의 비석이 온통 가득했다. 얀이 안내해온 곳이 지그프리드가의 중요 인물들을 위한 묘지였던 것이다.
"확실히 다른 어떤 곳보다 사람이 없기는 하네."
"네. 편하게 계셔도 됩니다."
그나마 조금 높은 곳으로 가니 비석이 놓이지 않은 너른 땅이 있었다. 그곳까지 올라간 칼리안이 앨런을 불렀다.
- 로젤리타는 잘 마치셨습니까?
기다렸다는 듯한 앨런의 대답이 들려왔다.
분명 앨런도 궁금했을 것이다. 시간의 축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시스파니안을 만나보라고 조언한 것이 모두 앨런이었으니까.
- 네, 스승님. 성인식은 마쳤고 시스파니안은 잘 만났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칼리안이 공동 안에서의 일을 모두 전했다.
앨런의 첫 반응 역시 얀과 다르지 않았다.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칼리안은 앨런이 얀보다 몇 곱절은 더 놀랐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텐실의 신관들에게 세렌티가 있다면 세상 모든 마법사에게는 시스파니안이 있다 하지 않던가.
- 시스파니안의 본신을 만나셨다니. 함께 갈 것을 그랬습니다.
역시나 앨런이 이런 말을 했다.
놀라움과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물론 함께 왔다 해도 앨런이 시스파니안을 만나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공동의 빛이나마 볼 수는 있었겠지만 그래서야 아쉬움만 커질 뿐이다.
- 준비가 될 때 다시 찾아오라 하였으니 다음 번에는 꼭 스승님과 함께 오겠습니다.
- 듣던 중 감사한 말입니다. 그래서, 무슨 준비를 한 뒤에 만나자는 이야기였습니까.
- 지금 제가 해야 할 준비는 하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잠시 주변을 느긋하게 훑었다.
숱한 죽음의 흔적이 남은 곳. 망자를 기억하려는 이들의 마지막 정성이 담기는 곳을 바라보다 말을 전했다.
- 살아남아야죠. 우선은.
흔적조차 남겨지지 않은 왕제의 영혼을 지닌 이가 삶을 말했다.
- 돌아가면 다시 일어나 있을 실리케부터 상대해야 할 테니 우선은 제 자리부터 잘 지켜야죠. 살아남는 것에 신경을 조금 덜 쓰게 되어야, 앞길이 좀 보이지 않겠습니까.
- ······ 그래요. 애석하지만 맞는 말씀이기는 합니다.
- 브리센 쪽은 분위기가 어떻습니까. 실리케 쪽도 어떤지 궁금하네요. 레넌이 사라졌는데 어떻게 하고 있는지.
칼리안의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앨런이 곧바로 대답했다.
- 열흘이 지나도록 레넌을 찾지 못하니 아무래도 이상한 점을 느낀 듯 합니다. 오늘 아침에 에반 브리센이 궁에 들었다 나갔습니다.
- 브리센을 후작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나 보군요.
- 그리 하였으리라 생각됩니다.
- 하긴. 수족처럼 부리던 레넌 브리센 자작이 갑자기 사라졌으니 답답하기는 하겠네요.
잠시 웃던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 브리센 후작이 직접 브리센 자작이 사라진 이유를 알릴 걱정은 없는 겁니까.
- 저와 맹세의 인을 나누었습니다. 실리케에게 그 사실을 말하면 후작의 목숨줄이 끊어질 터이니 절대로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합니다.
앨런의 말대로였다.
에반 브리센은, 자신이 레넌을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 실리케에게 알리지 않겠다는 내용을 두고 앨런과 '맹세의 인'을 나누었다. 만약 어긴다면 맹세의 인에 의해 심장이 짓눌려 죽을 테니 비밀이 새어나갈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 그렇다면 실리케는 레넌을 대신할 다른 수족을 찾으려 할 겁니다. 왕궁 밖을 마음대로 나다닐 수 없는 것은 저나 실리케나 마찬가지니까요. 분명 자신을 도와 줄 다음 사람을 찾으려 들 테니 잘 지켜봐주세요.
앨런의 대답 대신 웃음이 전해졌다.
이런 반응에 눈을 가늘게 뜬 칼리안이 물었다.
- 설마, 벌써 왕궁에 새로 드나드는 브리센 측 인물이 있습니까.
- 지금 제 손에 편지 한 장이 있습니다. 전하를 꽤나 골치아프게 한 편지인데, 안그래도 이것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 하였습니다.
- 편지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편지를 펼쳐보는 것인지, 아니면 할 말을 고르는 것인지. 앨런으로부터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멀리 서 있던 얀을 보며 기다리고 있으려니 앨런의 이야기가 다시 들려왔다.
- 야만족들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카이리시스로 돌아와 잠시동안 요양하고자 하니, 자신의 자리를 임시로 맡아 줄 이를 영지로 보내달라. 이런 요청이 적혀 있습니다.
- 혹시······ 브리센 변경백의 편지입니까.
그레이 브리센.
에반 브리센 후작의 첫째 아들. 텐실과 인접한 곳에 영지를 둔 변경백이기도 한 이의 이름이었다.
- 맞습니다. 아마도 실리케가 레넌이 사라진 것을 알자마자 부른 것 같습니다. 부상 핑계를 대고 수도로 돌아오려 하는 것이겠지요. 아직 왕궁에 드나들고 있지는 않지만 왕자님보다 조금 빨리 왕궁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 역시.
칼리안의 얼굴에 흥미 가득한 표정이 들어섰다.
- 드디어 얼굴을 보겠네요.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돌려 카이리시스가 있을 방향을 쳐다봤다.
또 한 마리의 전서구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전할 소식과 그레이 브리센. 그리고 칼리안.
- 또 다른 소드마스터라······ 재밌겠네요. 만나면 어찌될지.
셋이 만날 날이 벌써부터 기대가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