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살고 있습니다 (3)
눈부신 빛이 공동을 휘감고 있었다.
아침이었음에도, 이틀 거리에 있는 시트렌 시에서조차 그것을 볼 수 있을 만큼의 밝은 빛이었다.
칼리안이 공동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껏 단 한번도 없었던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분명 불길한 느낌의 빛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위산 아래에서 칼리안을 기다리던 일행들은 완전히 마음을 놓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얀은 안절부절 못하며 공동 입구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얀을 향해 누군가 소리 없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얀의 곱슬거리는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말을 건넸다.
"네 꼬맹이가 그리 걱정되느냐?"
여러 기사들이 있는 곳이었다.
기사들 뿐인가? 아르센을 포함한 칼리안의 사람들도 있는 자리였다. 이런 자리에서 칼리안을 그렇게 부를 만한 이는 당연 슬레이만 뿐이었다.
제멋대로 헝클어진 머리를 부여잡은 얀이 슬레이만을 보며 놀란 눈을 했다. 그가 도착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시찰 가신다면서요?"
슬레이만이 확인해야 했던 서쪽 구역은 한나절 거리에 있었다. 전날 저녁에 출발했다 해도 시찰을 마치고 벌써 올 만큼의 시간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얀의 질문을 받은 슬레이만이 살짝 옆으로 비켜서며 대답했다.
"운 좋게 반가운 손님을 마주쳐서 빨리 오게 됐다."
그 말에 얀이 고개를 돌려 슬레이만의 거대한 몸집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사람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슬레이만을 보았을 때의 몇 배는 더 놀란 얼굴을 했다.
얀이 만나보지 못했던 두 명이 서있었다. 하지만 얀의 또래로 보이는 소녀를 본 얀은 단번에 누구인지를 가늠했다.
"베로니카 마나실이라고 해요."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붉어지는 머리카락.
앨런 마나실의 손녀였다.
* * *
고요한 가운데 풀잎 스치는 소리가 지나간다.
그리 대단할 것 없는 풀내음이 가득 퍼졌다.
지금 칼리안이 디디고 서 있는 곳은 언덕 진 작은 들판이었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땅도 바다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하늘 아래 덩그러니 놓인 섬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이곳이 카이리스가 맞을지 아니. 인간의 땅이 맞을지를 가늠하지 못했다.
- 지극히 위대한, 시스파니안을 뵙습니다.
칼리안의 인사를 받은 시스파니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변의 모든 공기를 잠식할 것 같던 마력과 숨을 쉬는 것도 잊어버릴 듯한 공포감을 사그라뜨려 주었다.
처음 시스파니안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위압감이 한층 사라졌다.
시스파니안을 대하는 것이 확연히 편안해진 것을 느낀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칼리안을 보고 있던 시스파니안이 말 없이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들판의 끝자락으로 천천히 스치듯 걸어갔다. 길고 검은 머리가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흔들리다 내려앉기를 계속했다.
문득 시스파니안의 목소리가 칼리안의 귓가에 닿았다.
"세상에 없어야 할 아이가 나를 찾기에 무슨 일일까 하였다."
이미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던 칼리안이 어떻게 이 곳에 와 있는지를 궁금해했다.
"다른 시간을 살던 기억을 지니고 있기에 무슨 일일까 하였다."
칼리안이 베른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까닭을 확인하고자 했다.
"나의 축복을 칼날로 벼려두었기에 무슨 일일까 하였다."
시스파니안이 축복을 내려준 심장에 담긴 칼리안의 마력이 남들과 다른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여전히 들판의 끝에 선 채로 먼 곳을 좇던 시스파니안이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쳐다봤다.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 같은 신비로운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하여, 내가 너를 불렀다."
그제야 칼리안은 시스파니안이 왜 의지가 아닌 본신으로 칼리안의 앞에 나타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시스파니안은 지금 칼리안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직접 만나보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란델과 플란츠는 시스파니안의 본신을 만난 적이 없다는 말인가.'
이 특별한 만남이 성사되었음에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칼리안이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곧 시스파니안이 칼리안을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그러자 어느새 칼리안의 바로 앞으로 다가와 서 있었다.
그 움직임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덕분에 칼리안은 시스파니안이 갑자기 코앞에 나타난 것에 놀라지도 못했다.
칼리안과 마주보고 선 시스파니안이 말했다.
"보겠다."
무엇을 본다는 말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그저 그렇게만 말한 시스파니안은 자신의 것과 닮아 있는 칼리안의 눈을 오랫동안 쳐다봤다. 그 뒤에는 간혹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하고 작게 웃기도 했다.
'내 기억을 보는 듯한데.'
칼리안의 짐작대로였다.
시스파니안은 칼리안의 생을 직접 살펴보고 있었다.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기억을 뒤져보는 태도에 기분이 나쁠 법도 했건만 칼리안은 의외로 담담했다. 애초에 시스파니안이 누군가의 양해를 구해야 할 존재도 아니었거니와 시스파니안에게 자신이 겪은 일들을 숨겨야 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칼리안에게서 눈을 뗀 시스파니안이 말했다.
"이해하였다."
짧은 한 마디의 말.
베른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던 일에 대해 놀라기는 커녕 의구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그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았으니 되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맥 풀린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시스파니안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결국 무리한 짓을 벌였구나."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시스파니안이 읊조리듯 말했다.
그래.
시스파니안은 분명 그렇게 말을 했다.
하지만 그 말은 칼리안에게 닿지 않았다.
바로 앞에서 말했음에도 들리지 않은 것이다. 칼리안은 시스파니안이 입을 달싹이는 것도 보았으나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심지어 그 입모양조차 머릿속에 남지 않았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 때문에 의문이 가득 떠오른 칼리안의 얼굴을 본 시스파니안이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곧 방금 전의 일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나의 말을 네가 듣지 못하는구나. 그녀가 원치 않는 까닭이다."
칼리안이 시스파니안의 말을 듣지 못하도록 금제를 걸었다는 것이다. 시스파니안이 말한 '그녀'가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아직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세렌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리 불리더구나."
주신 세렌티가 아니라면 이 세상의 그 누가 감히 시스파니안에게 말의 제약을 가하겠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작스레 드는 궁금증이 있었다.
"세렌티는 악신을 봉인하는 과정에서 잠들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의 말을 막는 것입니까."
잠든 세렌티가 멀쩡히 활동하는 것처럼 시기 적절하게 나타나 시스파니안의 입을 막았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그러자 시스파니안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잠들었다 하여 존재가 가려지겠느냐."
"깨어있지 않다 해도 당신의 말을 가릴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나조차도 의지를 남겨두고 이곳에 있거늘."
시스파니안의 말이 조금 이상했다.
세렌티가 의지를 남겨두고 잠에 빠져든 것처럼 시스파니안 역시 의지를 남겨두고 '이곳'에 와 있다는 말이 아닌가.
칼리안이 다시 한번 질문했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디입니까."
"인간의 발이 닿을 수 없는 곳이다."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대답이 아니었다.
사실 이해를 하라는 뜻으로 한 대답도 아닌 것 같았다. 알려줄 생각이 아예 없다는 말처럼 들렸으니까. 때문에 칼리안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대충 알아들었다는 뜻을 보였다. 지금 칼리안에게 중요한 것은 시스파니안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가 아니었다.
곧 칼리안이 이 곳에 올 때 가지고 왔던 무언가를 꺼내보였다. 바로 엘프 루카가 누군가로부터 훔쳐온 검은 조약돌이었다. 그것을 본 시스파니안이 손을 내밀었다.
칼리안으로부터 건네 받은 돌을 들여다보던 시스파니안이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들이 만든 것이구나."
이 말 역시 들리지 않았다.
칼리안이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을 안 시스파니안이 조약돌을 돌려주며 다시 말했다.
"지니고 있거라. 때가 되면 알게 될 테니."
그 말에 칼리안은 또 세렌티의 금제가 있었음을 눈치챘다. 시스파니안 역시 세렌티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는 것 같았으므로 이번에도 칼리안은 고개만 끄덕였다.
물론 그것으로 궁금증을 모두 접을 생각은 없었던 칼리안이 잠시 입 속으로 말을 골랐다. 성인식을 빌미로 이렇게 오랜 시간에 걸려 시스파니안을 찾아온 진짜 목적 정말로 확인하고 싶어 했던 것을 꺼내놓기 위해서였다.
"궁금한 것이 많은 아이구나."
칼리안의 질문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시스파니안이 이렇게 말을 했다. 다행히 끈질긴 질문 세례가 귀찮아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어쩐지 칼리안은 그 말을 꺼낸 시스파니안이 웃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조금 더 편안해진 마음이 된 채로 질문을 했다.
"세크리티아에 시간의 축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알고 있다."
시스파니안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이 조금 전 칼리안의 기억을 뒤져볼 때 보였던 것과 매우 달랐다. 깊은 탄식이 어려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때문에 질문하는 것도 잊었던 칼리안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카이리스에서 시간의 축을 원했던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들은 시스파니안이 다시 입을 열었으나 이번에도 금제가 걸렸다. 이번에는 아예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것보다 훨씬 더 강하게 세렌티가 시스파니안의 말을 막아선다.
시스파니안은 이번에도 다른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는 네가 조급하게 굴지 않기를 원한다. 네 죽음 뒤의 상황에 대해 네가 섣불리 알아내어 앞으로의 일을 망쳐놓을까 우려하는 까닭이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거라."
그 말에 칼리안의 눈이 빛났다.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거짓이 아니었다.
칼리안은 실망하지 않았다.
계속하여 시스파니안에게 금제가 걸리는 그 모습에서 알게 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알려지는 것을 방해하려 세렌티가 직접 나설 만큼의 일이 벌어지기는 했었다는 말씀이시군요."
신의 개입이라니.
생각보다 판이 크지 않은가.
10년이나 시간을 거슬러 온 것이, 그것도 세크리티아를 멸망시킨 이 카이리스로 오게 된 것이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잠시 흥미로운 눈으로 칼리안을 보던 시스파니안이 답했다.
"네 말이 옳다."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문 채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곧 칼리안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고 싶습니다."
"듣겠다."
곧바로 허락이 나왔음에도 칼리안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주저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얼굴로 칼리안이 물었다.
"형님께서 저를 되살리고자 시간의 축을 사용한 것이 맞습니까."
시스파니안의 입가에 진짜 웃음이 떠올랐다. 웃는 것 같다는 느낌만 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웃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시스파니안이 칼리안을 질책하며 짓는 웃음처럼 여겨졌다.
시스파니안은 웃음이 채 지워지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
"네 생각이 깊지 않구나. 그 역시 차차 알게 될 일이다."
"형님께서 사용하신 것이 아니었군요."
그 말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하지만 시스파니안은 굳이 한번 더 입을 열었다.
"네 형제이기 이전에 왕이다. 이치를 거슬러가며 너 하나를 우선할 만큼, 네 형제가 그리 아둔한가."
그것은 분명한 질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