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살고 있습니다 (2)
아침부터 좋은 일이 둘이나 있었다.
4서클을 완성했다.
그리고 시트렌 시의 시장이 준비한 조찬에 굴이 나왔다!
세크리티아나 리베른과 비교적 가까운 이 지역의 사람들은 해산물을 즐겨 먹는다 하더니 특유의 바다 비린내가 나는 커다란 생굴이 올라 있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은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려놓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칼리안이 네 번째 서클을 만들었다는 것보다 생굴에 더 감격했다는 사실을 앨런이 알았다면 참으로 많은 말을 해주었을 터였다.
아무튼 지그프리드에서의 첫 날은 그렇게 기분 좋게 시작됐다.
항상 칼리안의 옆에서 말을 몰던 얀은 유란과 함께 일행의 가장 선두에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얀을 반겨하며 인사를 올리는 여러 사람을 대해야 했던 탓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칼리안의 옆에 아르센이 붙어 있었다는 이유가 더 컸다.
아르센은 아침에 느꼈던 칼리안의 기운을 떠올리다 말했다.
"왕자님의 기운이 마치 칼날과 같았습니다."
그 말에 칼리안이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이유가 있습니다."
아르센은 무슨 이유가 있는지 설명해주기를 기다렸으나 그 후에 달리 이어지는 말이 없었다. 이유가 있지만 이 자리에서 알려주기는 어렵다는 뜻 같았서 아르센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 후 몇 개의 거리를 지나는 동안 말 없이 있던 칼리안이 아르센의 손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헤르츠 경."
"네, 왕자님."
"경이 만드는 얼음은 어느 정도로 강합니까."
그 말에 아르센이 잠시 생각을 하다 물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말씀하신 강함이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설명을 요청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르센의 말은 항상 뒤가 길었다.
그냥 설명해달라고 하면 될 것을 무엇이 그리 어려운지.
"경의 얼음이 얼마나 큰 힘에 부러지는지. 그리고 얼마나 단단한 것을······ 꿰뚫을 수 있는지."
소드마스터의 단단한 육신을 관통했던 아르센의 얼음창을 생각하면서, 칼리안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아르센은 다시 한번 고민을 했다.
아직 그런 것까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도 했지만 칼리안이 굳이 마법의 강도를 묻는 까닭을 몰랐던 이유도 있었다.
곧 대답이 될만한 것을 떠올린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얼마 전 베른과 잠시 겨루었던 적이 있습니다."
칼리안이 어깨를 경직시키며 아르센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베른이라는 이름이 이제 키리에의 성이기도 하다는 것을 가까스로 떠올렸다.
아르센이 말하는 것이 자신이 아닌 키리에라는 것을 깨달은 칼리안이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네. 계속 얘기해요."
"그때 제가 베른에게 얼음의 창을 보냈습니다만."
하필 또 그것을 썼다!
칼리안이 어색하게 웃었고 아르센은 매우 아쉬워하는 얼굴을 하며 말을 이었다.
"베른의 검에 제 얼음 창이 부러졌습니다."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키리에를 쳐다봤다. 그리고 키리에는 갑자기 칼리안이 왜 저렇게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보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런 상황을 알지 못하는 아르센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얼음창으로는 통나무를 꿰뚫었던 적이 있습니다. 베른의 검이 어느 정도 되는지는 알고 계시니 이렇게 설명을 드리면 가늠하시는 것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네. 충분합니다."
키리에의 검술이 빼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그간 열심히 가르쳐놓기도 했고 스스로의 재능이나 노력이 결코 적지 않았다. 칼리안이 보기에 유란을 제외한 지그프리드의 기사들과 붙어도 쉽게 지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아직 칼리안이 '강하다' 여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데 키리에의 검에 얼음창이 부러졌다면 얼음창의 강도가 칼리안이 원하는 만큼이 되지는 못한다는 말이 되었다.
"흠."
아르센이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지 여쭤보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잠시 고민을 접어놓고 웃었다. 공손하기 짝이 없는 저 말투 때문이다.
이제 칼리안도 아르센과 언제 처음 만났는지를 알고 있었다.
망자가 죽음의 강을 건너가는 자리에서 죽음을 선사한 자와 죽음의 강을 되건너온 자가 다시 만났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하고, 한참을 웃었었다.
아무튼 칼리안이 누구인지 몰랐을 그 때에도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하던 아르센이었다. 보기에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발칸의 단장에게 썩 어울릴만한 모습도 아니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시도 때도 상대방도 가리지 않고 지나치게 공손한 저 태도를 조금만 고쳐보라고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런 생각을 마치고 문득 옆을 보니 여전히 아르센이 칼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아르센이 방금 전 자신에게 질문을 했다는 것을 상기한 칼리안이 얼른 대답했다.
"아. 나는 검을 지니고 다니질 못하니까요. 마법으로 검을 대신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오러로 만들어진 마력까지 지니게 되었으니까.
"다만 경의 마법으로도 그 정도의 강도로 그친다면 검으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고민을 조금 더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칼리안의 말에 아르센은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 저런 고민을 하는지야 당연히 이해할 수 있었으나 쉬운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특별히 아르센의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레이븐의 갈기를 흩트리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 * *
다음 날 저녁.
칼리안은 다시 한번 레이븐의 발을 멈추었다. 멀리 보이는 바위산 때문이었다.
때마침 석양이 들었다. 저무는 햇빛에 닿아 주홍색으로 신비롭게 물들어가는 바위산은 그 아래 자리한 고성의 위엄이 바로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웅대하고도 아름다웠다.
지그프리드 공작령의 내성 안에 위치한 존재 자체로 이미 하나의 역사가 된 그 바위산을 가리켜보인 얀이 말했다.
"저 곳입니다, 왕자님."
다른 설명은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매우 담백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 곳에 시스파니안의 빈 둥지가 있다는 충분한 설명이 되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석양이 거의 사라지고 하늘이 어둠에 물들기 시작했을 때 쯤, 일행은 내성 앞에 도착했다.
성문 안쪽으로 수많은 기사들이 도열한 채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칼리안을 이 곳까지 호위해 온 기사들과 똑같은 검은 색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칼리안이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
그리고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채 그들의 사이를 지나갔다.
그 길의 끝에 하얀 말에 올라 있는 중년의 기사가 있었다.
왕자의 앞이지만 굳이 말에서 내려 인사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이 나라 카이리스의 유일한 공작.
바로 슬레이만 혼 지그프리드였다.
"어서 오십시오!"
칼리안과 그 옆의 얀을 확인한 그가 이렇게 말하며 양 팔을 벌렸다. 딱히 달려와서 안기라는 뜻은 아니었고 이 땅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대충 그런 의미의 제스처였다.
칼리안이 씩 웃으며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슬레이만의 얼굴에도 비슷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지그프리드 공."
둘은 지금 두 번째 만나는 것이었고 처음 보았을 때에는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었다. 그저 슬레이만은 칼리안이 귀족들을 향해 신나게 뿜어내던 서슬을 느꼈고 칼리안은 슬레이만이 그것을 눈치 채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집어넣지 않았다. 그것이 둘이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그러므로 둘은 이제야 처음으로 말을 나누게 된 것이었으나 어색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이미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슬레이만이 잠시 칼리안을 살펴보더니 상당히 감탄한 눈을 했다. 그리고 그 놀라움을 굳이 숨기지 않고 입에 담았다.
"이야! 정말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그것이 겉모습일지 아니면 속에 담아둔 힘일지.
무엇이 달라졌다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칼리안은 여유롭게 웃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달라진 것은 맞았으니 말이다.
"네. 그때보다는 조금 나아졌습니다."
칼리안의 대답을 들은 슬레이만이 유쾌하게 웃으며 말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칼리안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흑마인 레이븐의 위에 올라 있는 호리호리한 체격의 칼리안과 백마를 탄 근육질의 슬레이만이 나란히 걷고 있으니 둘의 모습이 완벽하게 대비되었다.
그러면서도 굉장히 오랜만에 만난 막역한 사이와 같은 분위기가 감돌아서, 뒤에서 그들을 바라보던 얀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칼리안과 슬레이만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 막돼먹은 입의 마법사를 꽉 붙들어 두셨다고 들었습니다."
참 한결같은 앨런 마나실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던 슬레이만조차 이렇게 평가를 하니 말이다. 때문에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여섯 번째 검이 마법까지 다루고 있으니 그놈의 마법사가 제자 하나는 잘 뒀습니다."
슬레이만의 작은 목소리.
물론 칼리안은 놀라지 않았다.
검의 길에 오른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브리센 후작은 몰라도 슬레이만이라면 단번에 알아볼 것이라 이미 예상을 하고 있었으니까.
"역시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이래보여도 제가 허투루 살지는 않았으니, 차곡차곡 쌓여있는 왕자님의 오러를 못 볼 리 있겠습니까. 왕자님께는 제것이 보이지 않으시겠지만 제 눈에는 또렷이 보입니다."
이 말대로 슬레이만은 칼리안의 오러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칼리안의 눈에는 슬레이만의 오러가 보이지 않았다.
지닌 오러의 차이.
슬레이만의 오러가 칼리안의 것에 비해 월등히 많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마법사 아주 신이 나 있겠습니다. 소드마스터가 마법까지 다루게 되었으니."
"신이 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생은 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칼리안이 그의 스승을 떠올리며 즐거운 대화를 이어나가는 동안 어느새 둘은 성의 입구 앞에 도착했다. 슬레이만이 말 머리를 다시 돌리며 말했다.
"조금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서쪽 구역의 시찰을 미룰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남은 이야기는 아무래도 내일로 미뤄야 하겠습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내가 지나치게 빨리 도착했기 때문에 일정이 틀어진 것이니까요."
불쾌해하지 않고 대답한 칼리안이, 멀리 보이는 바위산을 한 번 바라본 뒤 슬레이만을 향해 말했다.
"내일 시스파니안의 의지를 만난 것까지 보태서 이야기를 나누면 되겠네요."
슬레이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쪼록 몸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다녀오시면 풀어놓을 이야기가 아주 많으실 겁니다."
그리고는 아주 유쾌한 소리로 웃었다.
* * *
지그문트 칸 시스파니안.
지극히 위대한, 시스파니안.
시스파니안의 이름 앞에 붙어 있는 두 개의 칭호는 자존감 높은 용들이 자발적으로 붙여준 것이었다. 그 정도의 대우를 받을 자격은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한때는 온 대륙을 공포에 떨게 하였고 한때는 악신을 봉인하여 대륙을 지켜냈으며, 또 한때는 인간을 사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
누군가는 생의 권태를 이기지 못해 자연으로 돌아갔다 했고 누군가는 잠든 세렌티를 대신해 신이 되었다 했다.
그런 시스파니안이 남겨둔 의지를 만나고자 아주 먼 길을 온 칼리안이 눈 앞의 거대한 공동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드디어 만나보겠네."
왕자의 성인식은 홀로 치뤄진다. 시스파니안의 뜻이었다.
다른 이들은 산 아래에 남았다. 따라서 칼리안 역시 혼자였다.
잠시 머릿속으로 시스파니안에게 물을 것을 정리한 칼리안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공동 입구로 발을 디뎠다. 밝은 아침이었으나 공동에 한 걸음을 내딛기가 무섭게 어둠 뿐인 곳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때문에 잠시 발을 멈칫했던 칼리안은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하는 발걸음 소리가 공동을 둔중하게 울리다 아련하게 사라졌다.
그렇게 얼마나 들어갔을까.
얼만큼의 길을 걸어왔는지 문득 궁금해진 칼리안이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와 동시에 빛이 폭발했다.
적막한 어둠을 사납게 쫓아내는 것 같은 황금색의 빛이 온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때문에 칼리안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렇게 또 얼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눈부심에 익숙해졌다고 느꼈을 때 쯤.
- 사아아······.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바람결을 타고 함께 날아온 풀냄새가 코 끝을 맴돌았다. 공동 안에서 느끼기에는 힘들 그 감각에 칼리안이 눈을 떴다.
그리고 숨을 멈추었다.
칼리안은 앨런처럼 마나의 이치를 깨달은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마나 그 자체를 느낄 수는 있었다. 때문에 알 수 있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심대한 마력.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을 듯한 공포감.
'의지가 아니다.'
의지가 아니었다.
의지 따위가 아니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허리를 숙였다.
"지극히 위대한."
검은 머리.
붉은 눈.
"시스파니안을 뵙습니다."
시스파니안이 칼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