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53화 (54/527)

제12장. 살고 있습니다 (1)

온통 숲 뿐이었다.

길잡이를 자처해 준 시아의 안내에 따라 달리다 멈추어 쉬고 일어나 또 달렸다.

그 푸름에 질려 눈이 시큰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쯤. 마지막 나무 사이를 지나자 멀리 작은 언덕이 보였다.

흙과 바위, 그리고 하늘이 있었다.

길고 긴 길을 비로소 벗어난 것이다.

그러니 시아의 길은 여기까지였다.

"대장! 이제 안녕, 해!"

방금 전 일행이 빠져나온 숲의 앞에서 시아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헤어지자는 뜻이었다.

"시아. 바로 돌아갈거야?"

"아니야. 근처에 엘프 많은 곳이 또 있어. 거기에 갔다가 마을로 돌아갈 거야."

"마을로는 꼭 돌아가야 하는 건가?"

아직 천진한 시아가 그 이상한 마을로는 돌아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우리 가족도 다 거기 있으니까 돌아가야해. 나 괜찮아, 대장. 걱정하지 마!"

"······ 그래."

작별 인사는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칼리안은 그저 시아의 머리를 오래도록 쓰다듬었고 다른 일행들도 한 마디씩 덕담을 건넸다. 그래도 한 달을 함께 해온 사이였으니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히나와 꼭 끌어안으며 가장 긴 인사를 끝낸 시아가 다시 칼리안에게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그 동안 일행들과의 원만한 대화를 위해 들고 있던 검은 조약돌을 내밀었다.

"이제 대장이 가져. 잘 썼어!"

사실 이 곳에 도착하기 얼마 전, 칼리안과 시아는 대답을 먼저 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시스파니안의 의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으니 혹시라도 그녀에게 이유를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때문에 그 때까지 동행을 계속 하는 것은 어떨지 시아에게 물었으나 시아는 거절했다.

- 어머니 나무가 그러셨어. 이렇게 대답하는 게 나한테는 제일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내가 혼자 다르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하셨어. 말하는 건 달라도 내가 엘프인 것까지 달라지지는 않으니까. 그러니까 알아봐주지 않아도 돼. 고마워!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은 조금 부끄러운 기분을 느꼈었다. 자신도 모르게 시아가 말하는 버릇을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날을 생각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돌을 돌려받았다. 그러자 시아는 아직 꺼내지 않은 칼리안의 말에 대한 대답을 했다.

"그래! 그럼 진짜 기쁠거야. 고마웠어! 구해줘서!"

이미 답을 들었지만 칼리안은 하려던 말을 멈추지 않고 꺼내놓았다.

"다음에 만나."

고개를 끄덕인 시아가 다시 한번 팔을 크게 흔들더니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가 사라졌다. 칼리안이 만난 여러 엘프 중 가장 착한 엘프와의 동행은 그렇게 끝났다.

시아가 들어간 풀섶이 흔들리지 않게 된 것을 확인한 칼리안이 레이븐을 다시 움직여 목적지를 향한 마지막 언덕을 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언덕의 정상에 올라선 칼리안이 큰 숨을 들이마셨다. 레이븐이 언덕 꼭대기에 한 발을 올려 놓은 순간 눈 앞에 펼쳐진 장엄함 때문이었다.

칼리안은 저도 모르게 감탄하며 레이븐의 발을 멈추었다.

"저곳이구나."

코끼리들의 땅.

지그프리드 공작령.

1년 전의 플란츠가, 3년 전의 란델이, 그리고 더 오래 전 언젠가의 르메인이 서 있었을 곳. 그 자리에 선 칼리안은 한참동안 말을 잊고 그렇게 지그프리드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드높은 성벽은 카이리시스의 외성보다 견고하고 웅장했다. 외성의 거대한 정문 양 옆에 높이 세워진 두 개의 석상은 절로 고개가 숙여질 만큼의 엄숙한 느낌을 주었다. 시스파니안의 땅을 지키겠다는 그 일념이 저 성벽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장담하건대 이 자리에 섰던 모든 카이리스의 왕자들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저들이 초식동물인 것에, 그리하여 결코 왕좌를 노리지 않았던 것에 감사하면서.

꽤 오랜 시간 동안 감상을 마친 칼리안이 결연한 얼굴로 옆을 쳐다봤다. 이 곳에 온 이상 코끼리의 땅에 발을 딛기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얀."

칼리안의 부름에 얀이 얼른 고개를 돌리며 싹싹하게 대답했다.

"네, 왕자님."

"들어가면 시종 노릇 하지 마."

제발.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칼리안을 보았을 때 그들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얀이 시중을 들고 있다는 그 왕자라는 놈을 어떻게든 혼쭐을 내주겠다고.

스무 기사의 마음이 그랬으니 저 안에 칼리안이 도착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을 기사들이 몇이나 될지 유란조차 가늠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이 곳에 오면 모두 밝혀질 일이었으니 얀은 키리에와 히나, 그리고 아르센에게도 자신의 고향이 어디인지를 알려주었었다. 때문에 셋의 얼굴에도 웃음이 어렸다.

칼리안의 말을 들은 얀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저 대답이 어떤 느낌을 주는지 이제야 깨달은 칼리안은 또 잠시동안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 * *

앨런이 깜짝 놀란 얼굴을 하더니 르메인을 향해 양해를 구했다.

"실례 좀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눈을 부비적거리고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그것을 본 르메인은 자신이 괜한 말을 했음에 대해 매우 후회하며 말했다.

"싫으면 말고."

그러자 앨런이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집무실의 테이블에 놓인 술병과 두 개의 잔을 보며 웃었다.

"전하께서 먼저 술을 찾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르메인이 별다른 말 없이 맞은편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하지만 앨런은 자리에 앉는 대신 창 밖을 가리켜 보였다.

사위는 어두웠고 가을 하늘의 달이 오롯이 밝았다.

"좋지 않겠습니까."

밖에서 마시자는 것이다.

르메인이 잠시 멈칫했다.

국왕의 위에 오른 이후 제대로 된 산책 한번 마음 편히 다니질 못했다. 이 거대한 나라를 홀로 떠안은 힘 없는 왕에게는, 넓은 궁에 놓인 책상 앞을 제외한 그 어떤 곳도 안전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달이 밝고 마법사가 옆에 있는 이런 날이라면.

좋지 않겠는가.

"······ 그러지."

르메인이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앨런이 웃으며 손가락을 튕기자 술병과 술잔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곧 앨런은 르메인을 데리고 아르피아 궁의 후원에 들어갔다. 지그프리드관에 만들어진 것보다 조금 더 큰 개울이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흐르고 있는 곳이었다.

잔디밭으로 저벅저벅 걸어간 앨런은 바닥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그 옆의 바닥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며 말했다.

"앉으시지요. 이 곳이 가장 좋습니다."

그 무례한 꼬락서니에 카에라의 단장이 어쩔 줄을 몰라했지만 이제는 그냥 저 무례함이 과연 어디까지 가는지 보기나 하자는 심정이 된 르메인이 앨런의 옆으로 가 앉았다.

그러자 조금 전 앨런이 챙겨둔 술병과 잔이 그들의 앞에 놓였다.

앨런이 직접 르메인의 잔에 술잔을 채우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라 넣었다. 그리고 르메인을 보며 말했다.

"안심이 되어 그러십니까. 아니면 다른 걱정이 되어 그러십니까."

그날 저녁.

칼리안이 지그프리드의 땅에 발을 올렸다.

무사히 슬레이만의 품에 도달한 것이다. 때문에 그것이 좋아 술을 청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걱정거리가 있는지를 묻는 말이었다.

르메인은 일단 술부터 마셨다. 그 뒤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카밀론의 불을 언제 켜야 할지 고민이 되어 그러네."

"왕세자위에 누구를 올릴지 말씀이십니까."

"칼리안이 돌아오면 세 왕자가 모두 성인이 되지 않나. 세자위를 정해야 할 날이 다가온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카밀론의 주인을 벌써부터 고민하고 계시는지요."

"가장 진중한 란델은 그 속이 깊고도 깊어 보이질 않고. 가장 강한 플란츠는 계속 엇나간 길로 가려 하는데."

그렇게 두 왕자를 언급한 르메인이 작은 한숨을 섞어 덧붙였다.

"칼리안은 아직 다 자라지 않았으니."

르메인에게 가장 도움이 되어 주는 왕자도, 가장 마음이 가는 왕자도, 칼리안이었다.

그러나 칼리안은 가장 어렸다.

나이도 어렸고 지닌 세력도 이제 막 자라기 시작했다.

앨런이 짧게 소리내며 웃더니 찬 소리를 했다.

"그리 급하시면 제일 마음에 안드는 놈을 먼저 올리시지요. 올리자마자 사라질테니."

성급한 고민에 대한 타박이라고는 하나 그 말에 돋힌 가시가 너무 노골적이었다. 르메인이 화가 반쯤 섞인 말투로 말했다.

"정말 그 입 좀 어찌 안되겠는가?"

앨런은 르메인의 질책을 무시하며 손가락을 들어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켜보였다. 헤이시아 궁, 바로 실리케가 있는 곳이었다.

"칼리안 왕자님이 저 궁을 비워내기 전까지 란델 왕자님은 얌전할겁니다. 들여다보이지 않는 속은 그때 가면 보실 수 있겠지요."

르메인은 앨런의 손 끝을 따라 헤이시아 궁 쪽을 쳐다봤다. 앨런이 말을 이었다.

"그 때까지는 속내를 보이시면 안됩니다. 그러니 누굴 앉힐지 벌써부터 고민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그것이 칼리안을 위해서든 아니면 다른 두 왕자를 위해서든. 한 명에게만 특혜를 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또 홀랑 까먹고 저기 저 친구 함부로 내보내시면,"

왕의 검. 그리고 모든 기사들의 우상.

국왕 친위대 카에라의 기사단장을 '저기 저 친구'라 언급한 앨런이 르메인을 보며 한 글자 한 글자 힘 주어 말했다.

"늙은 마법사는 정말로 남쪽 나라에 요양이나 갈 터이니."

언젠가 칼리안에게도 했었던 말.

칼리안은 그 말을 들으며 듣던 중 무서운 소리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르메인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진심이 담긴 긍정은 아니었다.

피식 웃은 앨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카밀론의 주인이 누가 되든 때가 되면 스스로 증명을 할 것입니다. 구태여 앞서서 고민하지는 마시지요. 오늘은 그저, 달이나 보시면 됩니다."

르메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법사가 시키는대로 달이나 보며 술잔을 비웠다.

* * *

지그프리드 공작령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꼈다.

외성을 통과하면 늦은 밤에는 슬레이만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했던 칼리안의 기대는 완벽하게 깨졌다.

"이제 이틀 정도만 더 가면 지그프리드 성에 도착하겠네요."

외성 정문을 통과하자 얀이 느긋한 말투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때문에 칼리안은 그 날 중에 슬레이만 보기를 포기하고 지그프리드의 외성 정문과 연결된 시트렌 시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이른 아침.

자리를 잡고 앉은 칼리안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주변의 마나를 끌어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운이 모여들자 칼리안은 항상 그랬듯이 정제된 마나를 심장으로 보냈다.

서클을 늘리는 것을 다시 시도하는 것이었으나 결국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마나가 단전에 흘러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때문에 오늘도 실패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실망하던 때. 문득 시아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말하는 건 달라도 내가 엘프인 것까지 달라지지는 않으니까.

그 말을 떠올린 칼리안의 눈이 빛났다.

마나가 오러로 전환되었다 하여 근원이 바뀐 것이 아니었다.

오러와 서클의 근원이 같은데 그것을 왜 다르다 생각했을까!

서클을 만드는 것은 서툴지라도 오러를 다루는 것은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 아니던가.

"마나를 오러로 바꾸는 버릇을 못버리겠으면 오러로 서클을 만들면 되는 것을."

옛 칼리안이 만들어 둔 서클.

서클에 쌓아 온 마력을 운용하는 대신 지금까지 칼리안이 단전에 쌓아왔던 오러로 네 번째의 서클을 만들려는 것이다.

엉뚱한 해결 방법을 떠올린 칼리안이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바로 단전에 둥글게 뭉쳐있던 오러의 힘을 풀어내어 조심스럽게 운용하기 시작했다.

곧 강인하고 날카로운 오러의 힘이 하나의 띠를 이루며 심장으로 흘러들어갔다.

본래의 따뜻한 온기를 품은 마나 대신 잘 벼려진 검날과 같은 오러의 기운이 조금씩 움직이다 점점 긴 형태를 이루며 칼리안의 의도대로 흐르기 시작했다. 칼리안은 계속 속도를 높여가며 같은 것을 반복했다.

잠시 후.

칼리안이 운용하던 마나가 비로소 하나의 고리 형태를 이루었다.

그리고 마침내 힘차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네 개의 서클이 서로 연결된 것이 확연히 느껴진다.

한동안 그렇게 서클의 회전에 집중하던 칼리안이 눈을 떴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심장 부근을 어루만졌다. 세 개의 서클을 가지고 있었던 때와 비교하지 못할 만큼의 마력이 심장에 담긴 것이다.

"아······ 드디어."

고작 그 작은 차이 하나를 깨달았을 뿐인데.

이 몸을 얻은 후 처음으로 얻게 된 새로운 성취에 칼리안의 눈에 큰 만족감이 들었다.

칼리안이 다시 자세를 바로하고 주변의 마나를 한번 더 모아 정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클을 만들어내느라 소모된 오러를 채워넣었다.

그런 칼리안의 방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아침부터 대기 중에 휘몰아치는 마나를 느끼고 얼른 이 곳으로 달려온 그는 바로 아르센 헤르츠였다. 지금 칼리안이 어떤 상태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괜찮으신 겁니까?"

그런 그의 옆에 서 있던 얀이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용히 물어왔다. 아르센이 칼리안의 방 앞에 서서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선 채로 한 시간이 넘어가고 있는 까닭이다.

아르센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갈무리 되고 있습니다. 걱정하실 일은 아니니 잠시 기다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따뜻하고 온화한 것과는 거리가 먼, 오싹하리만치 시린 칼리안의 마력이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음을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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