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52화 (53/527)

제11장. 의도한 건 아니었어 (5)

레넌이 사라졌다.

그 후 앨런의 일처리는 신속했다.

- 멜피르 폴룬을 통해서 상단 인수 작업을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스승님.

- 해당 지역에도 곧바로 물건을 보내도록 말을 해두었으니 혹시 다른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시지요.

- 식량 말고는 아직 부족한 것이 없는 듯 합니다. 곧 영주들을 만날 생각이니 만약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면 전해드리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생각보다 앨런과 멜피르가 빠르게 대처해 준 덕에, 한결 가벼워진 마음이 된 칼리안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스팅과 네리카의 영주를 엘프 마을로 불러냈다. 두 영지의 싸움 중재를 위해서였다.

영주들과의 일이 마무리되면 더 이상 엘프 마을에 머물러야 할 필요도 없었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던 칼리안은 두 영주를 만난 뒤 곧바로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 물론 장로 제르가 열게 될 숲의 길을 통해서였다.

영주들을 기다리는 동안 얀이 잠시 말을 건넸다.

"우리 왕자님 이제 상단까지 가지게 되셨네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어."

"그래도요. 기분은 좋잖아요."

브리센 상단을 소유할 생각은 정말 없었다.

그저 거슬리는 레넌을 치웠을 뿐인데 상단 하나를 통째로 사들이게 될 줄이야. 피식 웃은 칼리안이 손에 올려진 것을 내려다봤다.

"그나저나, 이건 또 뭘까."

칼리안의 손 위에는 검은 빛의 조약돌같은 것이 올려져 있었다. 마을로 돌아온 엘프 루카에게서 찾아낸 물건이었다.

신물로 보여지는 것들과 함께 있던 검은 조약돌을 손에 쥔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돌이 시아에게 일으킨 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조금 전, 루카의 짐에서 그가 훔쳤던 물건을 골라 칼리안에게 전하려던 시아가 입을 열었을 때 칼리안은 적잖이 놀라야 했다. 시아의 독특한 말버릇이었던 '대답을 먼저 하는 능력'이 사라진 것이다.

숲의 길을 안내해주기 위해 잠시동안 더 동행하게 된 시아에게 돌을 건네 준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시아. 밥 먹었어?"

"응. 먹었어."

시아의 대답이 제대로 나오자 칼리안의 눈꼬리가 가늘게 변했다. 옆에 서 있던 아르센이 큰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그만큼 이상한 일이었다.

곧 칼리안이 조약돌을 다시 건네받았다.

그리고 한번 더 시아에게 말을 걸었다.

"응. 저 쪽에 있어."

"히나 봤어?"

다시, 대답이 먼저 나온다.

칼리안은 자신의 손바닥에 놓인 것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황금색의 문자가 새겨진 작고 검은 조약돌이었는데 보기에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시아 외에는 그 돌에 영향을 받는 이들도 없었다.

시아의 이상한 말버릇을 고쳐주고 있는 그 돌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칼리안에게 아르센이 물었다.

"이것 역시 신물일까요?"

"가능성은 크겠지만. 조금 더······."

그렇게 말하던 칼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아르센은 눈치채지 못했으나 칼리안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비슷한 것을 맡은 유란 역시 칼리안의 손에 들린 것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위험해 보이네요. 피 냄새가 짙게 배어 있습니다."

멀쩡하던 이가 죽게 될 때 흘리는 피.

생명력 강한 피에서 느껴지는 그 독특한 기운. 기사들은 그것을 느끼는 훈련을 한다.

저 돌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직 살아갈 수 있을 생명이 강제로 꺼져가며 흘린, 생명력 강한 피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은 곧 조약돌의 원래 주인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됐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것도 신물 훔칠 때 같이 훔쳤어?"

"기억 안 나."

안 날 만도 하다.

훔친 것이 한 둘이 아니었다.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엘프는 거짓말을 못하니 기억이 안 난 다는 것은 사실일 터였다.

그보다, 루카는 전혀 반성하고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뭘 잘못했는지를 모른다기보다는 인간이 엘프를 인간의 법으로 다스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겠지.

곧 제르가 다가와 칼리안의 시선을 돌리려는 듯 말했다.

"어머니 나무께 내가 이미 청을 해두었네. 곧바로 숲의 길로 출발할 수 있을 걸세. 그러니 이 곳의 일은 더 걱정하지 말게."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한 눈에 보였다.

이제 와 알았지만 루카는 장로 제르의 진짜 아들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이 혹시라도 루카에게 화를 내거나 검을 휘두를까 걱정하는 것이다.

검을 뽑는 대신 칼리안은 손에 든 돌을 시아에게 건넸다.

"일단 네가 써. 가는 동안 의사소통은 해야 하니까."

"이건 루카 꺼 아니야?"

칼리안이 루카 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니야."

"알았어, 대장. 그럼 숲의 길 반대편에 도착하면 돌려줄게."

"그래."

시아가 그것을 제 주머니에 집어넣었고, 곧 두 명의 영주가 칼리안을 찾아왔다. 그런 그들을 앞에 둔 칼리안이 한 말은 딱 한 마디였다.

"폴룬 상단이 곧 거래를 하러 올 겁니다."

참으로 간단하지 않은가.

거래만 재개되면 두 영지가 싸울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니 말이다.

물론 칼리안이 싸움의 원인인 레넌 브리센에게 화가 난 나머지 브리센 상단을 사버렸다는 것을 영주들이 알 리가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그저 좋아하며 감사의 말을 건넬 뿐이었다. 이 일을 가지고 싸움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다.

딱 거기까지.

칼리안은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라는 불필요한 말은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영주들간의 힘 싸움에는 왕실이 깊이 개입하지 않는다. 서로서로 견제하는 것에 힘을 낭비하기라도 해야 '지나치게 사이가 좋아진' 이들이 힘을 합쳐 왕실을 향해 검을 겨누는 일이 줄어드니까.

잠시 고개를 돌려 장로 제르와 루카를 보던 칼리안이 영주들을 향해 물었다.

"혹시 엘프들과 거래하는 것이 있습니까."

"네. 인근에서 구하기 어려운 채소를 포함한 몇몇 식료품을 이곳에서 구매하고 있습니다."

"공정한 거래였는지 궁금한데. 어땠습니까."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다 보니······."

더 듣지 않아도 뻔하다.

서로 곁눈질을 하는 두 영주의 얼굴이나, 새빨갛게 변한 대장로 제르의 귀만 봐도 대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다른 지역의 몇 배는 될 금액으로 엘프들과 거래를 했다는 뜻이리라.

"왕자인 나도 이용해먹으려 들었는데 나 아닌 다른 사람 상대로는 오죽했을까."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제르를 쳐다봤다.

"뭘 사고 있는지 알려줘요. 폴룬 상단 거래 품목에 넣을 테니 최소한의 법도 안 지키는 놈들 상대로 거래하지 말고."

"그 일은 사과했잖소. 이런 피해를 우리 엘프들에게 주는 것은,"

"네 아들이 저지른 짓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했지. 필요한 것 다 얻어냈으니 미안한 마음도 사라진 것 같은데."

제르가 입술을 달싹였으나 칼리안은 제르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았다.

"원래 엘프들이 그랬던 것처럼 너희들끼리 잘 살아봐."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말에 오르자 제르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귀가 빨갛게 변한 제르가 칼리안의 앞을 막아섰다.

"잠깐, 잠깐만 기다리지. 얘기를 좀······."

"나도 더 할 말 없어."

얼결에 칼리안을 붙들려던 제르의 손이 레이븐의 목덜미에 살짝 닿았다. 그리고 항상 고고한 자태를 뽐내던 왕자의 말이 눈을 까뒤집는 것을 보곤 경악하여 손을 뗐다.

그것을 본 체 만 체, 칼리안은 제르가 미리 열어둔 숲의 길로 유유히 들어갔다. 그 뒤를 이어 칼리안의 일행들도 하나 둘 칼리안의 뒤를 따랐다.

황망해하는 제르를 뒤로 한 채였다.

* * *

숲의 길은 정말 숲 속의 길이었다.

푸른 나무들이 가득하여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길을 걷는 레이븐의 등 위에서 칼리안은 검은 조약돌을 손에 든 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글씨가 새겨진 것 외에는 그다지 특이할 것이 없는 돌이었다.

그런 모습을 본 유란이 말의 속도를 늦춰 칼리안의 옆으로 왔다. 그리고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왕자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칼리안은 그 말에 대해 대답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피 냄새는 조금씩 옅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묻는 칼리안이 의미 모를 웃음을 짓고 있었다.

순간 무슨 말이냐며 되물을 뻔했던 유란이 칼리안을 다시 한번 살펴보는 듯한 눈빛을 했다.

"기사들이나 맡을 법한 냄새라서 왕자님께서도 알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어쩌다보니 맡아보게 되었습니다."

어쩌다보니 조금 많이.

"아무튼 피냄새가 나는 돌이라는 이유 때문에 멀리하기에는 이상한 물건이라서요."

칼리안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시아의 말버릇을 고쳐주고 있으니 일반적인 것은 아닌 듯 해서."

남들보다 앞선 대답을 하던 모습을 떠올려 본 유란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아이는 다른 이들보다 조금 앞선 시간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지도 않은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겠습니까."

"예지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내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능력을 사라지게 하는 돌일까요."

"글쎄. 어떠려나."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레이븐의 안장을 톡톡 치며 잠시 생각에 잠겨들었다.

"시간이라······."

조금 앞선 시간. 시간의 뒤틀림.

그것과 관련된 시아의 능력을 무효화 시키는 효과를 지닌 돌.

- 시간의 축.

혹시 시간의 축과 연관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시간의 축 역시 시간과 관련된 신물이라 여겨지지 않았던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중요한 것인 듯 합니다. 그러니 불쾌한 냄새가 좀 나더라도 참아야겠죠."

이렇게 말하며 생긋 웃어보인 칼리안이 돌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 *

카이리시스의 왕궁, 그 중에서도 체르밀 궁.

가장 높은 층에 마련된 란델의 방에서 시종이 말을 전했다.

- 상당량의 신물을 텐실로 전달하게 되었다. 그 일에 굉장히 큰 도움을 준 것은 레넌 브리센이다.

- 그런데 레넌이 갑작스럽게 행방불명 되었다. 브리센 후작이 백방으로 조사하고 있으나 찾을 수 없다고 한다.

- 브리센 후작은 앨런 마나실과 멜피르 폴룬을 가장 먼저 의심했으나 관련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때문에 돈을 노린 집단의 소행이 아닐까 조사중에 있다.

바로, 에반 브리센 후작이 적당히 만들어 퍼뜨린 내용이었다.

란델은 소식을 알려준 시종에게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는 이만 나가보라는 뜻을 보였다.

그리고 시종이 나간 뒤 읽던 책을 다시 펼쳤다.

한참이 지나도록 책장이 다음 페이지로 넘겨지지 않았다.

문득, 아무 소리도 나지 않던 방 창가에 새 한마리가 날아와 지저귀기 시작했다. 조용히 일어난 란델이 창가로 걸어가니 놀란 새가 포르륵 날아갔다.

란델은 조금 아쉬운 기분을 느끼며 창문을 열었다.

하늘이 맑았다.

란델의 구불구불한 황금색 머리카락이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렸다.

눈을 감고 한동안 바람을 즐기던 란델의 눈이 살짝 떠졌다.

맑은 하늘, 새 소리.

날씨가 좋지 않아 잠을 설쳤다 하고 새 소리가 그립다 했던.

장미가 곧 피어날 것이라던 말이 생각난 까닭이다.

'칼리안. 이번에는 레넌을 물린 것이구나.'

잠시 창 밖을 보며 동생을 생각하던 란델이 밖으로 나갔다.

곧바로 시종들이 따라왔다.

"정원에."

짧은 말이 나왔고 따라오던 이들 중 한 명이 화초들을 관리할 도구를 챙기러 달려갔다. 란델은 서두르지 않는 발걸음으로 호수를 지나 장미가 심겨 있는 정원에 도착했다. 곧 뒤따라온 시종이 그에게 정원 가위를 전해주고 우산을 펼쳐 해를 가렸다.

란델은 조용히 앉아 잔가지를 쳐내고 잡초를 뽑아냈다.

꽃은 없었다. 이미 가을이었으므로 이미 모두 피고 졌다.

그런 란델의 눈에 나무 아래에서 자라난 작고 약한 꽃가지 하나가 보였다. 다른 가지들에 눌려 차마 곧게 뻗어나오지도 못한 꽃가지.

그것은, 오래 전의 칼리안과 같은 가지였다.

그 가지를 가만히 바라보던 란델이 소매 속에서 목걸이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목걸이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와 그 작은 가지에 가 닿았다. 휘어진 가지가 곧게 펴지고 꽃봉오리가 생겼다.

그 뒤에는 작고 붉은 장미가 한 송이, 피어났다.

"아직은 보기 좋으니. 조금만 더 그렇게 있거라."

홀로 핀 붉은 장미를 내려다보던 란델이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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