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51화 (52/527)

제11장. 의도한 건 아니었어 (4)

르메인이 안경을 벗고 긴 숨을 내쉬었다.

레넌 브리센의 배신이라는 칼을 이번에 휘두르겠다는 칼리안의 말을 전해들은 까닭이다. 심지어 그 칼자루를 쥐는 것은 칼리안이 아니었다. 브리센 후작이 직접 자신의 둘째 아들을 잡도록 하겠다는 말이었다.

"후작을 돈으로 사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그것이 가능한 정도의 금액이 있는 것도 놀랍지만 후작을 돈으로 부리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도 놀라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앨런이 말했다.

"이번 일은 저와 폴룬 남작이 진행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전하와 칼리안 왕자님은 이 일에 개입하지 않은 것으로 해두는 것이 좋지 않을는지요."

칼리안이 나서서 란델의 사람을 공격했다는 것이 알려지지 않게 하겠다는 말이었다.

돈은 멜피르 폴룬이 지불하는 것으로 꾸미고 에반과의 협상은 자신이 나서서 진행하겠다는 것이 앨런의 계획이었다.

물론 그렇게 한다 해도 란델 측에서 눈치를 챌 수는 있겠지만 칼리안이 전면에 나서지만 않는다면 대놓고 문제를 키우지는 못할 터였다.

앨런의 말을 들은 르메인은 얼마 동안 더 생각을 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앨런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에반 브리센 후작을 만나러 가기 위함이었다.

* * *

그 날은 중앙 귀족의 정기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카이리스 왕궁에 가기 위해 저택 밖으로 걸어나오던 에반 브리센은 정문 쪽을 보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

시간이 지나도 그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뒤에 서 있던 집사가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하려 정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동안 가만히 있던 에반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집에 있겠다."

집사는 에반이 준비를 모두 마치고 출발을 하려다 마음을 바꾼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에반이 먼저 말하지 않는 것을 물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토를 달지 않고 바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런 집사의 고개가 다시 들릴 때 쯤, 저 멀리 저택 정문으로 작은 마차 한 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귀족들이 탈 만한 그 마차에는 폴룬 남작 가문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마차를 잠시 지켜보던 에반이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서재로 안내해라."

집사의 얼굴에 다시 한번 의문이 생겼다.

방문객들은 항상 응접실에서 만나오던 에반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서재로 데려오라는 말을 하니 이상하다 여겨진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다만 집사는 이번에도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에반이 들어간 뒤 느긋한 속도로 저택 앞에 도착한 마차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이를 본 집사가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동글동글한 인상을 가졌다는 멜피르 폴룬을 대신해 적은발의 머리를 하나로 묶어내린 매우 날카로운 인상의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앨런 마나실이었다.

굳이 자신의 마차를 타고 와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낼 이유가 없었던 탓에 멜피르의 마차를 얻어 타고 이 곳에 온 터였다. 멜피르를 영입할 때 칼리안이 써먹었던 방법을 앨런도 따라한 것이다.

그렇게 평생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곳에 발을 디딘 앨런은 자신을 경계하는 수많은 기사들의 시선을 유유히 받아 넘기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집사의 안내를 받아 에반이 기다리는 곳으로 들어갔다.

에반은 이미 서재에 마련된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나이만으로 따진다면 앨런보다 대여섯 살 정도가 많을 것이다. 흰 머리가 반쯤 섞인 청록색 머리카락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 에반의 얼굴을 향해 앨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앨런 마나실입니다."

어찌 모르겠냐만은, 에반은 처음 듣는 이름이라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는 짧게 대답했다.

"에반 브리센."

첫 만남에 대한 그 어떤 미사여구도 없이 대마법사와 소드마스터의 무미건조한 첫인사가 이렇게 오갔다. 에반은 앞 자리를 가리켜보이며 입을 열었다.

"미리 언질을 주었다면 준비를 해 두었을 것을."

"너무 많이 준비하실 듯 하여 그냥 왔습니다."

날카롭게 생긴 앨런의 눈이 아주 둥글게 휘어졌다.

브리센에서 앨런을 위해 준비할 것이 환영일지, 독일지, 검일지. 어떻게 알고 미리 알리겠는가.

에반이 권한 자리에 앉은 앨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곧바로 본론이 나왔다.

"후작님의 둘째 아드님이 전하의 첫째 아드님을 바라보더군요."

그렇게만 말한 앨런이 에반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에반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아들이 배신했다는 말임은 알아듣고 있었다.

에반은 여전히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입만 열어 말했다.

"생각지 못한 이야기군. 하지만 레넌은 그런 일을 벌일 만큼의 그릇이 되지 못하네."

아버지와 형, 그리고 동생을 배신해가며 다른 편에 설 만큼 용기가 있지 않다는 소리였다. 앨런이 웃으며 대꾸했다.

"둘째 아들에 대한 평가가 꽤 박하시군요."

레넌이 마음을 바꾼 것을 믿으려 하질 않는 것이다. 앨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가락을 튕겼고 아무것도 없던 곳에 가죽 가방 한 개가 나타났다. 그것을 본 에반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굳이 응접실을 두고 서재에서 앨런을 맞이한 이유는 이곳에 설치된 마법 방해 장치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앨런과 공방을 주고 받을 것을 대비한 일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마법을 쓰니 방해를 해도 소용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방 속에서 꺼낸 서류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 앨런이 에반을 한번 쳐다봤다. 그리고는 그가 무엇 때문에 인상을 찌푸렸는지 안다는 듯 여유롭게 말했다.

"마법 방해하는 그런 장난감에 제가 방해를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세월을 거슬러 사는 마법사를 그냥저냥 생각하진 마시지요."

곧 앨런이 서류를 들어 에반에게 내밀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 아드님보다는 믿을만 할 겁니다."

에반이 묵묵히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 들었다.

헤일과 말콤, 그리고 에일라에게서 확인한 내용들을 추린 것이었다. 서류를 넘겨가는 에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손이 조금씩 떨리는 것은 볼 수 있었다.

매우 화가 난 것을 숨기는 듯한 얼굴이 된 에반이 말했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가."

"이미 레넌을 물러나게 할 생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낱 마법사가 간섭할 일은 아니지."

"······ 그것은 한낱 칼잡이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군요."

그 말을 들은 에반의 기세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당장이라도 앨런의 사지를 조각낼 것 같이 날카로운 살기가 앨런의 온몸을 향해 쏘아졌다.

"이런."

살기를 느낀 앨런이 조금 당황한 듯한 얼굴을 했다.

말 한마디에 자신을 향해서 살기를 보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앨런 마나실이 아닌가.

"생각 외로 제가 만만하게 보이고 있었나 봅니다."

앨런이 그렇게 말하며 슬쩍 웃었다.

지금 에반이 무엇을 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싸움이 벌어져 보아야 서로 좋을 것이 없었으니 정말로 공격을 하겠다는 행동은 아닐 터였다. 다만 거슬리는 소리를 하는 앨런의 기를 누르려는 심산인 것이다.

"감당할 수 있으실지."

언젠가 앨런은 르메인에게도 이 말을 했었다. 의미는 달랐지만.

앨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변을 맴돌던 공기가 순환을 멈추었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를 담아냈다. 에반의 동공이 확장됐다.

칼을 쥐는 이들은 살기를 다룬다.

그리고 마나의 이치를 아는 이들은 피어를 내보낸다 하였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둔 공포감을 끌어내는 힘이다. 그 방법은 서로 달랐으나 결국 상대방을 짓누른다는 것에는 차이가 없었다. 살기를 밀쳐내며 에반의 숨을 틀어막은 앨런이 말했다.

"우선 오늘은 조용히 대화나 나누시지요. 나는 내 제자와 달라서 그리 무르지 않으니."

앨런의 미소는 바뀌지 않았다.

에반을 옥죄는 공포감도 줄어들지 않았다.

잠시 앨런의 반응을 떠보려던 에반이 살기를 거두었다. 그러자 앨런 역시 평소와 같은 만만한 마법사로 돌아왔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기싸움에서 물러난 에반의 귓가에 앨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드님은 알아서 잘 거두시리라 믿습니다만 조금 덜 부담스러우실 방법을 하나 제안드리지요."

에반이 눈을 조금 찌푸렸고 앨런의 설명이 이어졌다. 란델을 포함한 모두가 레넌이 왜 축출되는지를 알지 못하도록 조용히 마무리를 지어주면 브리센 상단을 사겠다는 말이었다.

"상단을?"

에반이 되물었다.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기는 했다. 후작 가문의 이름을 딴 상단을 항상 마음에 들지 않아 하지 않았던가. 다만 그것을 구매하겠다고 나선 이가 앨런, 아니. 칼리안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3왕자에게 득이 될 일을 왜 내가 해야 하지?"

어느새 평정심을 찾고 이렇게 말하는 에반을 향해, 앨런이 무슨 말이냐는 듯한 얼굴을 보이며 대답했다.

"왕자님에게 브리센 상단을 살 만한 돈이 있을 것 같습니까? 애초에 이 곳에 계시지도 않는 것을."

"칼리안 왕자가 아니면 누가?"

"카이리스 제일의 상단을 운영하고 싶어하는 이가 있지요."

물론 이렇게 꾸며내는 것에 대해 멜피르의 동의는 이미 구해 둔 상태였다. 이름이 한 번 팔리고 브리센 상단이 생기는데 멜피르가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 파시지요. 그렇게 하시면, 그럴싸한 가격에 살 겁니다."

그와 함께 앨런이 제시한 금액을 본 에반은 적잖이 놀랐다.

에반은 잠시 고민했고 곧 고개를 끄덕였다.

모자란 아들 한 명, 그리고 처치 곤란한 상단 한 개와 바꾸기에는 충분한 액수였다.

* * *

헤일 라트란이 잡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레넌 브리센은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행여라도 그와 자신의 관계가 들통날까봐 당장 전 재산을 팔아 텐실로 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매일매일 걱정을 했다. 그런 헤일 라트란이 감옥에 갇혔고 자신에게는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이런 일을 또 겪고 싶지는 않았던 레넌은 그 길로 라트란이 있는 쪽으로는 두 번 다시 발을 붙이지 않겠노라 선언도 했다. 그와 거래하던 몇몇 영지가 있었지만 그리 신경을 쓸 만큼 대단한 곳들도 아니었다.

'그깟 영지 몇 개쯤, 식량난이 대수인가?'

그리고 오늘, 헤일 라트란이 모아서 보내왔던 신물을 무사히 텐실의 신관에게 넘겼다. 란델 왕자와의 만남을 주선해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레넌은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흥얼거림을 멈추지 않으며 창가에 두고 키우던 화초에 직접 물을 주고 잎을 닦았다. 며칠 동안 신경을 쓰지 못했더니 화초 잎이 영 비실비실한 것이 보였다. 그 꼴을 보고 얼마 전의 칼리안을 떠올린 레넌이 재밌다는 듯 큰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보자. 영양제가 어디 있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뒤로 돌아선 레넌의 발이 멈췄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두 명의 기사가 레넌의 앞에 서 있었다. 레넌이 아는 이들이었다. 왕궁을 지키던 파벨의 기사들이었다.

때문에 레넌은 움찔 놀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창가에 등이 닿았다.

"뭐야? 네 놈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레넌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기사들이 레넌의 벌어진 입 속에 천쪼가리를 욱여넣었기 때문이다. 레넌을 꽁꽁 묶은 기사들은 검은 천 하나를 꺼내 그의 몸을 뒤집어 씌웠다.

레넌은 끝까지 발버둥쳤다. 결국 기사들이 레넌을 기절시키기 직전까지 온 몸을 뒤틀며 저항했다.

그 바람에 조금 전까지 레넌이 애지중지 키우던 화분이 창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화분의 가치가 어느정도인지 알았다면 기사들이 조금쯤 아쉬워했을까. 레넌은 그런 생각을 하며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방 안이었다. 브리센 후작 저택 지하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레넌의 고함소리가 공허하게 울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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