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50화 (51/527)

제11장. 의도한 건 아니었어 (3)

싸움의 징조를 확인한 칼리안은 곧바로 키리에를 영주성에 보냈다.

용병으로 지원을 하는 척 영주성에 간 키리에는 가장 만만해 보이는 병사에게 은화 몇 개를 건넸다. 그리고 임시 숙소에 다섯 명의 철없는 엘프가 옹기종기 모여있다는 사실과 이번 전쟁의 원인에 대한 내용을 전해 들었다.

"브리센 상단이 원인입니다."

브리센 상단.

"또 레넌 브리센이네."

칼리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하다하다 이제는 영지간의 싸움에까지 원인을 제공하는가 하는 마음이 든 까닭이다.

"이 주변에 들어오는 상단은 브리센 뿐인데 라트란 영지의 일로 인해 브리센 상단이 이쪽 지역으로는 발을 끊겠다는 말을 했다 합니다."

그렇게 이어진 키리에의 말은 이러했다.

두 영지 모두 밀 농사가 불가능한 지역이라 브리센 상단으로부터 밀과 호밀을 구매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브리센 상단이 멋대로 거래를 끊었다. 그나마 네리카 영지에 비축된 밀이 있어 스팅에서 밀을 좀 팔아달라 요청을 했고 네리카에서는 터무니없는 금액을 불렀다. 그로 인해 벌어진 다툼이 전쟁 준비로 이어졌다.

상황을 전해들은 칼리안은 '밀과 호밀'이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얼굴을 했다.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벌이는 싸움이니 오래 가지는 못하겠네."

당연한 일이다.

병사는 물론 용병까지 고용한 마당에 밀과 호밀 없이 어떻게 장기간 싸움을 이어가겠는가.

돌아가는 내용을 대충이나마 파악한 칼리안은 그 이상의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엘프 마을로 되돌아왔다.

"잘 다녀 오셨습니까?"

방에 도착해 문을 여니 의자에 앉아있던 얀이 반가워하며 일어났다. 그 인사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칼리안이 왕자의 인장을 꺼내놓으며 말했다.

"편지지 좀 가져와줘."

"네. 왕자님."

대답과 함께 밖으로 나갔던 얀이 곧바로 몇 장의 편지지와 펜, 봉랍을 가지고 돌아왔다. 칼리안은 얀이 보는 앞에서 똑같은 내용의 편지 두 장을 썼다.

'조만간 방문하게 될 테니 불편함 없이 머물다 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것을 본 얀은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대놓고 저렇게 대접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자신의 인장까지 찍어가며 쓸 사람이 아니니까. 다만 칼리안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던 탓에 얀은 우선 얌전히 옆에 서서 기다렸다.

칼리안이 다 쓴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 봉인하며 말했다.

"하루 이틀 내로 스팅과 네리카가 전쟁을 치를 분위기야. 장로는 그걸 막아줬으면 해서 나한테 부탁을 한 것 같아. 말로는 엘프 다섯을 찾아달라면서."

"왕자님을 속였다는 거네요?"

"그러게. 내가 속았네."

상황을 파악한 얀이 잠시 공작 아들처럼 굴었다.

깜짝 놀란 칼리안이 얀의 입을 막으며 욕도 막은 뒤에 재빨리 다른 말을 꺼내들었다.

"두 영주는 내가 이미 이 곳을 지나간 줄 알고 싸움을 준비하는 것 같으니까 내가 찾아간다고 하면 일단 멈출거야. 라트란에 기사단 카에라가 왔던 것을 다들 알고 있을 테니 나를 자극해서 좋을 것 없다는 것도 알겠지."

칼리안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속물 근성 가득한 편지를 썼는지 이해한 얀이 물었다.

"그럼 그 뒤에는요? 편지 받고 일단 전쟁을 보류한다 해도 시간이 지나도 왕자님이 방문하시지 않으면 다시 싸우려 할 텐데요."

"엘프 다섯 명 돌아오겠지."

칼리안이 얀을 보며 웃었다.

"전쟁 막아주는 것 말고 엘프 찾아주는 게 거래 조건이었잖아. 싸움이야 나든지 말든지."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방금 쓴 편지 두 장을 달랑달랑 들고 제르의 집으로 걸어갔다.

* * *

칼리안이 편지 두 장을 내밀자 제르가 그것을 쳐다보다 물었다.

"이게 무엇인가?"

"편지잖아."

칼리안이 제르의 맞은편에 편한 자세로 앉으며 대답했다.

"스팅과 네리카에 하나씩 보내. 그럼 전쟁이 한 달 쯤 미뤄질거야. 집 나간 엘프들이야 당연히 돌아올 거고. 그 후에는 다시 안 나가게 당신이 알아서 잘 관리 해."

그렇게 대답한 칼리안은 제르의 책상을 톡톡 치며 말을 이었다.

"여기가 남아 있다면."

"그럼 전쟁은······!"

제르가 입을 다물었고 그것을 본 칼리안이 웃었다.

"그래도 엘프니까. 그래서 설마설마 했는데. 두 영주가 싸우리라는 것 알면서 속였네."

칼리안이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그 모습과 썩 어울릴 법한 삐딱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를."

엘프들이 거짓말을 못한다는 말이 진실을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도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배웠다. 그것을 제대로 알려준 제르의 입이 한참만에 열렸다.

"설마 이대로 떠나겠다는 말인가?"

"엘프 다섯 찾아달라며? 그래서 찾아줬잖아."

화가 난 것인지 부끄러운 것인지 제르의 긴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제르는 입을 몇 번 달싹였으나 말을 하지는 못했다.

칼리안은 더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상 위에 올려진 자신의 편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그건 우리가 그 동안 먹고 잔 값으로 쳐. 우리는 내일 아침에 바로 떠날 거야. 숲의 길인지 뭔지는 필요 없으니까."

돌아서서 걸어나가는 칼리안을 보는 제르의 귀가 조금 더 빨갛게 변했다. 칼리안이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제르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대는 그대의 나라에서 전쟁이 나도 괜찮다는 말인가?"

"이유가 있으니 싸우겠지. 저러다 말 거고."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손가락을 들어 바닥을 가리켜보였다.

"여기가 그렇게 중요하면 네가 직접 지켜. 수작부리지 말고."

그 뒤 칼리안은 문을 열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제르는 한동안 말을 잊은 얼굴로 칼리안이 나간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예상한 것과 너무 다른 일이 벌어져버린 까닭이었다.

* * *

한편.

방으로 돌아온 칼리안은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표정이 그리 개운하지 않아 보여서 옆에 서 있던 얀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심기에 거슬리는 일이 또 있으셨어요?"

"레넌 브리센. 브리센에서 식량 거래 독점한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굴고 있으니까."

"밀 거래 끊은 일 때문에요?"

"응. 그런 일 생기면 굶는 건 영주가 아니거든."

이 주변은 광산이 많은 곳이지 대규모 농사를 지을 만큼 비옥한 곳이 아니었다. 그러니 식량은 무조건 거래에 의지해 왔을 것이 분명했다.

"먹을 것 가지고 함부로 굴면 안되는데."

칼리안이 이렇게 중얼거리는데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왔을지는 보지 않아도 분명했으므로 칼리안이 얀을 향해 문을 열어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칼리안의 방에 들어온 것은 예상한대로 제르였다. 정확히 말한다면 표정이 참으로 볼만하게 변한 제르였다.

'왕자 씩이나 된다는 사람이 코앞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그냥 두고 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제르는 그런 칼리안을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한참동안 기다려도 제르에게서 나오는 말이 없자, 칼리안이 눈썹을 찌푸렸다.

"내 얼굴 구경하러 왔어?"

제르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네. 내가 설명을 하겠네. 조금만 들어주게."

"짧게 해."

제르의 입이 열렸다.

처음 만났을 때나 조금 전 제르의 방에서 보았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매우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제르는 칼리안도 이미 전해들어 알고 있는 브리센 상단의 일을 말했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루카로 인해 그대가 라트란의 일에 엮인 것을 알고 있었네. 그런데 이번 전쟁의 발단이 라트란에서 일어났던 일이니 차마 먼저 말을 할 수가 없었네. 루카가 연관되었다 하면 도와주지 않을 것 같아서 숨겼네. 정말 미안하네."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염치 없지만 우리는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네. 그 문제는 우리가 해결을 할 수가 없어."

칼리안은 곧바로 답을 주지 않았다.

한동안 입을 다문 채 생각에 빠져 들었다. 제르는 초조한 얼굴이 되어 칼리안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칼리안은 속으로 한 명의 이름만 계속해서 되뇌고 있었다.

'레넌 브리센.'

란델에게로 진영을 바꾸어 문제를 일으키더니 멋대로 거래를 끊어서 전쟁을 유발하고 있었다. 그보다 앞서 다이아몬드 교역권을 두고 멜피르 폴룬을 없애려 들었던 것도 레넌이었고, 칼리안이 마신 독 타크리모사를 실리케에게 건넨 것도 레넌이었다.

계속, 계속, 계속!

발목을 잡는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칼리안이 낮고 빠르게 말했다.

"아직 네리카는 가보지 않았어. 아마 비슷할거야. 가서, 그 곳에서도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지 확인해. 만약 맞다면 그 편지를 주고 오면 돼. 그리고 밀 말고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도 알아 와. 그럼 내가 영주들을 만날 테니."

"도와주겠다는 말인가?"

"엘프 돕는 것 아니니까 착각하지는 말고."

레넌 브리센을 이제 잡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 한 말이었다.

어찌됐건 제르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난 누구 손바닥 위에서 노는 것 딱 질색이야. 그리고 꿍꿍이 있는 놈들이랑은 거래 안해. 그러니 이번에는 제대로 해."

"알겠네."

이렇게 답한 제르는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 * *

창 밖으로 햇살이 들었다.

칼리안은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 그리고 앨런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른 시간인 탓에 아직 집에 있었던지, 앨런이 곧바로 답했다.

- 밤을 새셨습니까?

칼리안은 은근히 아침 잠이 많았다.

때문에 이렇게 새벽같이 깨어 있을 때는 늘 밤을 샌 뒤였다.

- 네. 생각을 좀 했어요.

- 말씀하시지요.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용을 전했다. 말을 들은 앨런이 놀라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럴 만 하다고 생각한 칼리안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 정말 그리 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앨런이 이렇게 되묻는 것이 처음이다. 칼리안이 웃었다. 보지 않아도 앨런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 뻔했다. 분명 침대나 소파에 기대 앉아서 관자놀이를 주무르고 있을 것이다.

- 네. 전하께 말씀해주세요. 브리센 후작에게 레넌이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려달라고.

- 레넌 브리센이 텐실과 거래한 정황을 브리센 후작에게 전하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계시는 것 맞으신지요?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 앨런이 이렇게 말해왔다.

- 내전의 위험도 있고 왕자간의 싸움이 시작될 위험도 있다는 것 압니다. 그리고 브리센 후작이 돈을 좋아하는 것도 압니다.

이번에 헤일 라트란을 보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헤일이 번 돈을 브리센 후작에게 건넨 뒤에 영지 하나를 선물 받기로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 그럼 왕자님께서도 브리센 후작에게 뇌물을 주겠다는 말씀이십니까?

- 아뇨.

그렇게 말을 전한 칼리안이 밤새 생각한 내용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설명을 이었다.

- 브리센 후작에게 내용을 전하고, 다른 문제 없이 조용하게 레넌을 축출하면 브리센 상단을 사주겠다 해주세요.

앨런이 또 말이 없었다.

지금 칼리안이 뭘 사겠다는 말인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칼리안의 설명이 이어졌다.

- 실리케가 저에게 독을 썼다고 소문이 났을 때 브리센 상단 피해가 가장 컸어요. 레넌과 거래하던 헤일이 그것 때문에 타격을 입었을 정도니까 브리센 상단의 피해는 상상 이상일 겁니다. 브리센 후작이 그 골칫덩이 상단을 계속 끌어안고 싶어할 리가 없어요.

애초에 브리센은 기사 가문이었다.

검에 소질이 없는 레넌이 만들어 시작한 것이 브리센 상단이었다.

레넌의 아버지인 에반 브리센 후작은 돈이 된다는 이유로 레넌의 상단 운영을 그대로 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돈도 되지 않고 기사 가문의 간판에도 어울리지 않을 상단을 달가워 할 리가 없었다.

- 아무리 그래도 카이리스 제일의 상단입니다. 적자가 심하리라 한들 그것을 어찌 사겠다는 말씀이십니까?

- 운영 적임자는 이미 있지 않습니까. 폴룬 상단의 상단주인 폴룬 남작이라면 충분히 운영할 수 있을 겁니다. 상단 이름이 폴룬으로 바뀐다면 귀족들도 거래를 재개할 테니 적자 문제도 해결될 테고요.

- 운영할 이가 있는지의 문제가 아니지요. 지금 마법사단 발칸이 사용할 부지를 구매하고 건물을 세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발칸 유지에 들어갈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져 가치가 내려갔다고는 하나 왕실에서 상단을 구입할 만큼의 자금을 내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앨런이 뭘 오해했는지를 알아챈 칼리안이 말했다.

- 스승님. 아직 제 금고 열어보지 않으셨군요.

르메인은 프레이야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란델의 모친인 아이샤 왕비가 죽은 뒤 후궁 프레이야를 맞이한 르메인은 프레이야에게 퍽 괜찮은 영지를 하사했다. 실리케는 그 이후에 왕비로 들어왔다.

죽은 프레이야의 영지는 칼리안에게 상속됐다.

그리고 옛 칼리안은 영지 수익금을 쓰지 않았다. 그동안 금고에 얼만큼의 돈이 쌓였을지 브리센에서 궁금해하지 않았을 정도로, 옛 칼리안은 그 돈을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다. 돈은 전부 쌓이기만 했다.

- 레넌 브리센. 이제 치워주세요. 스승님.

카이리스 최대의 밀 생산지에 위치한 휘트린.

휘트린의 영주 칼리안이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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