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9화 (50/527)

제11장. 의도한 건 아니었어 (2)

칼리안이 마음을 바꾸자 장로 제르가 씩 웃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은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 전까지 계속 뻣뻣하게 굴다가 숲의 길이라는 말에 태도를 싹 바꾼 것이니까.

애초에 제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 앉았으니 어떻게 포장할 말도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제르를 보며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 숲의 길 때문에 하는 것이니까 약속은 꼭 지켜."

"인간 일족의 왕은 숨김이 없군. 걱정 말게. 엘프는 약속을 중히 여기는 종족이네."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약속을 지키겠다는 말 때문은 아니었고 아까부터 계속 입에 담는 호칭이 매우 거슬렸던 탓이다.

"이름 말해줬으니 더는 멋대로 부르지 말고."

제르가 다른 말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은 그런 제르를 향해 물었다.

"없어진 엘프들. 내가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나?"

"모두 20대 초반에서 중반의 남자 엘프라네."

"싸움은 할 줄 아는 이들인가?"

"그대의 기사들에게야 상대도 안되겠지만, 어느정도는 하네."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칼리안은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싸울 줄 아는 엘프는 이렇게 찾으면서 더 오랫동안 사라졌던 시아를 찾으러 온 엘프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시아는 왜 안찾았지?"

"그대가 보호하는 것을 루카가 보았다 했네."

"사람을 너무 믿는 것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아들이라면서."

제르가 자신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켜보이며 대답했다.

"시아의 얼굴이 겁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하기에 그 말을 믿었지."

처음 만났을 때 잔뜩 겁에 질렸던 시아의 얼굴을 잠깐 떠올리는데, 제르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 마을의 어린 엘프는 모두 나의 아들이며 딸이라네."

그 말을 듣고 오해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칼리안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아들이라는 말이 시아가 그의 진짜 친아들이라는 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을 '내 어린 영지민' 정도로 이해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루카라는 그 엘프는 무엇을 한다며 나갔는데?"

제르가 갑자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돈을 벌러 나갔을 것이네. 한번 인간 마을에 다녀오더니 그대로 홀려서는, 돈을 벌겠다고 마을 밖으로 도망가기를 벌써 몇 번을 했네. 그래도 이렇게 돌아오지 않던 적은 없었는데."

조각품을 팔고 비싸 보이는 신물을 훔친 이유를 알게 된 칼리안이 실소했다. 생각해보니 라트란 사건에 칼리안을 얽히게 한 진짜 원흉은 바로 루카가 아닌가? 칼리안이 약간의 원망을 담아 제르에게 사실을 일러바쳤다.

"루카라는 그 엘프가 인간의 물건을 도둑질했다는 것은 알고 있나?"

그러자 제르의 얼굴이 매우 심각하게 바뀌었다.

그럴만 하다. 엘프가 물건을 훔쳤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칼리안도 적잖이 놀라지 않았던가.

"찾아 오면 제대로 교육좀 시켜. 그 엘프가 훔친 물건 때문에 내 속이 꽤 시끌시끌 했으니까."

"알겠네."

"아무튼 조각품을 파는 엘프는 흔치 않을테니. 내일부터 우리가 바로 찾아보지."

그리고 제르가 손가락을 들어 각각 오른쪽과 왼쪽을 가리켜보였다.

"일단 숲의 양 옆으로 도시가 둘 있네. 네리카와 스팅이라는 이름의 도시인데 그 곳부터 찾아보면 조금 나을것이니 참고하게."

두 곳의 이름을 기억해둔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한 제르가 다른 엘프를 시켜 일행이 머물 곳과 저녁을 준비해주도록 말했다.

* * *

엘프들이 내어 준 저녁식사는 생각 외로 괜찮았다.

생풀만 뜯어먹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호밀 특유의 시큼하면서도 텁텁한 맛이 나는 흑빵에 오렌지 잼을 발라 맛있게 먹고 있는데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칼리안의 주변에서 들리기 시작한 대화 주제 때문이었다.

기사들 사이에서 얼마 전 라트란에서 있던 일들이 화두에 올라 있었다. 그다지 되새기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나오는 말을 막을 수는 없었던 칼리안은 그저 묵묵히 이야기만 들었다.

그런데 말이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어떻게 하면 검을 산산조각 낼 수 있는가?'

라는 것에 대한 토론이 마치 칼리안 들으라는 듯 시작된 것이다.

"마력탄을 막으신 거겠지."

"검에 그을린 자국이 없었잖아. 게다가 마력탄은 안 터졌어. 깔끔하게 잘려 있었던 것 봤잖아."

점점 목소리가 커진다. 아마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직접 설명해주기를 바라는 모양새였다. 칼리안은 못 들은 척 빵만 뜯어먹었다.

칼리안의 눈치를 보다 대답이 나올 기색이 없자 기사들이 이번에는 아르센을 쳐다봤다.

"자네라면 어떻게 할 텐가?"

칼리안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사실 칼리안도 궁금했었다. 과거, 아무리 오러를 사용해도 부서지지 않았던 검이 아르센의 손짓 한 번에 조각나지 않았던가?

질문을 받은 아르센은 대답 대신 손에 들린 나이프에 마력을 집중했다. 그러자 나이프에 곧바로 새하얗게 서리가 맺히며 얼어붙더니 '쩡' 하는 소리와 함께 긴 금이 생겼다.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아르센이 조용히 말했다.

"물론 이런 나이프와 검은 제련하는 방법부터가 다르니 이와 같이 빠르게 얼려 깨뜨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유사한 방법으로 파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는 있습니다."

아직은 그 방법을 깨우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말에 기사 한 명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검을 부순다니. 마음만 먹으면 소드마스터도 잡겠군."

그래. 잡혔다.

칼리안이 방금 말을 꺼낸 놈의 이름을 단단히 기억해두는 사이, 다른 기사들의 눈이 일제히 칼리안에게 와 닿았다.

"소드······?"

슬레이만의 기사들이다. 소드마스터라는 단어까지 나왔으니 칼리안의 부서진 철검에서 연상된 것이 어찌 없겠는가?

때문에 칼리안은 자연스럽게 웃으며 빵을 한번 더 뜯어먹었다.

어차피 슬레이만과 만나면 오러를 쓰는 것을 바로 들킬텐데 며칠 더 빨리 알게 되든 말든. 뭐 그런 심정이었다.

* * *

다행히 그 뒤로 기사들이 칼리안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사실을 묻거나 대련을 신청하는 일은 없었다. 칼리안이 자신을 대신해서 조사를 해오라며 모조리 숲 밖으로 내보내버렸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사들은 칼리안의 얼굴은 보지도 못한 채 평복을 입고 돌아다니며 수상한 정황을 보이는 도시가 있는지를 먼저 살폈다. 굳이 칼리안이 직접 나서지 않은 이유는, 우선 조심히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제르의 말을 듣자마자 칼리안이 생각했던 것은 바로 엘프 노예 밀매였다. 젊고 건장한 엘프였고 제르의 말을 들어 보아 싸울 줄은 알지만 출중하지는 않은 것 같았으니 충분히 타깃이 될 만하다고 여겼다.

만약 왕자가 직접 나서서 노예 밀매 정황을 살핀다는 것이 알려지기만 해도 모조리 꽁꽁 숨거나 도망갈 것이 분명했으니 기사들만 밖으로 보냈던 터였다.

"특별히 이 근방에서 노예 밀매가 이루어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용병인 듯한 이들은 간혹 보였으나 범죄와 연관 있는 것으로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조사를 마치고 숲으로 돌아온 유란이 이렇게 말을 했다.

그리하여 다음날에는 칼리안이 직접 밖으로 나왔다. 아직 조사에 참여하지 않았던 키리에만 대동한 채였다. 이미 마을을 뒤져본 기사들은 얼굴을 알아볼 수 있으니 함께 가지 않았다.

"어느 쪽으로 먼저 가시겠습니까?"

엘프 마을에서 나온 뒤 키리에가 이렇게 물어왔다. 숲을 가운데 두고 서로 반대편에 위치해 있는 스팅과 네리카 중 어디를 먼저 갈지를 묻는 말이었다.

질문을 받은 칼리안은 얀이 설명해준 것을 떠올렸다. 두 곳의 규모도 비슷한데다 두 도시의 영주가 비슷한 나이대의 자작이다 보니 서로 경쟁이 심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다보니 둘 중 어디를 먼저 갈지 고르기가 힘들었다.

"일단 이름 짧은 곳 먼저 가자."

별달리 고민할 것이 없었다.

가장 가깝고 가장 이름 짧은 곳에서 출발해서 발을 넓히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이런 생각이었다.

묵묵히 숲을 통과하여 두 시간 정도 말을 달리니, 스팅에 도착했다.

칼리안은 곧바로 로브를 걸치고 후드를 뒤집어 썼다.

스팅은 그리 큰 도시가 아니었다. 멀리서 보아도 라트란과는 확연히 다른 규모였다.

그래도 정돈은 잘 되어 있는 편이었고 오가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 행색들을 보아 크게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유란의 말마따나 겉보기로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으므로 칼리안은 일단 주린 배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칼리안이 키리에를 보며 짧게 말했다.

"고기. 고기 먹을래."

키리에가 평소보다 더 확실하게 웃음을 보였다.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하며 여기까지 와서 한다는 첫 마디가 고기라니. 짐짓 그것을 못본 척한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고기 먹고 무기 상점에 가서 쓸만한 검도 사고. 그리고 나서 조금 더 둘러보자."

"왜 더 좋은 검을 구하지 않으십니까."

"더 좋은 검이 필요한가?"

"일반적인 검은 왕자님께서 오래 사용하실 수 없지 않습니까. 오러를 담을 수 없으니까요."

키리에는 칼리안에게 검을 배우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키리에에게 자신이 어떻게 오러를 다룰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했고, 숨기는 것 잘 못하는 칼리안은 결국 키리에에게 자신의 비밀을 어느정도 알려주었다. 물론 베른과 키리에가 언제, 또 무슨 이유로 죽음을 맞이했는지까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궁으로 돌아가면 어차피 쓰지도 못할 뿐더러."

이렇게 운을 뗀 칼리안이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켜보였다.

"곧 좋은 재료가 저기서 떨어질 것 같아서."

키리에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지만 수수께끼 같은 그 말만으로는 이해가 어려웠다. 칼리안은 더 이상의 말 없이 레이븐을 움직였다. 다음 해 초에 제대로 된 운석이 떨어진다는 예언가같은 말을 하는 것이 그리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식당을 찾아 고기 많은 식사를 마친 뒤 밖으로 나와 무기 상점을 찾은 둘은 상점 주인이 하는 말에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해야 했다.

"검이 없소."

"검이 없다니. 다 팔렸다는 말인가?"

"용병이오? 아직 어린 것 같기는 한데."

칼리안을 슥 쳐다본 주인이 대답 대신 이렇게 물었다.

칼리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키리에와 자신을 순서대로 가리켜보이며 대충 대답했다.

"이쪽은 검사고 나는 마법사. 아무튼 검이 한 자루 필요한데 구하기가 어렵겠나?"

그러자 주인이 팔짱을 끼며 무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모양새가 말을 할까 말까 갈팡질팡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매우 잘 알고 있는 칼리안이 품에서 은화 두 개를 꺼내 주인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든 주인은 조금 더 망설였고 기어코 하나의 은화를 더 받은 뒤에야 주변을 살피며 조용히 말했다.

"얼마 전부터 암암리에 용병들이 모이는 것 같기는 했소."

"암암리에? 공고도 없이?"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더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더니 오늘 낮에 병사 둘이 와서는 오늘 밤에 무기를 가져갈테니 모두 넣어두라 했소."

칼리안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이 스멀스멀 차오르는 가운데 주인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 용병이면, 저기로 가보시오."

그렇게 말한 주인이 턱짓으로 가게 밖 어딘가를 가리켜 보였다. 그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은 바로 영주성이었다.

칼리안의 눈이 조금씩 빛났다.

비슷한 규모의 소도시 두 개가 가까이 있고 은밀히 용병을 모으고 있는데다, 성내의 무기를 징수했다면 의미하는 바는 딱 하나였다.

"······ 전쟁을 치르려는 것이군."

유란이 사흘을 걸려 알아내지 못한 것을 밥 한끼 먹고 알아낸 칼리안이 고개를 숙이곤 볼을 긁적였다.

"그것 참."

돈을 벌고 싶어 하고 적당히 싸움 좀 하는 엘프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또 이상한 일에 발을 담궜다는 것은 더 잘 알 것 같았다.

히리스카 숲 엘프 마을은 두 도시의 사이에 있었다. 둘의 싸움이 벌어지면 당연히 엘프 마을에도 피해가 생길 터였다.

그러니 제르가 왜 굳이 칼리안에게 도움을 요청했는지 역시 알 수 있었다.

'엘프 마을을 찾아온 카이리스의 왕자가 두 도시간의 싸움을 막아주기를 부탁한 거였어.'

후드 아래 가려진 칼리안의 미간이 매우 많이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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