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의도한 건 아니었어 (1)
카이리스 북쪽에 위치한 카이리시스는 여름이 짧고 겨울이 길었다. 때문에 9월이 시작되자 곧바로 선선한 아침 바람이 불었다.
그렇다 하여 벌써부터 창문을 닫아 두어야 할 만큼의 서늘함은 아니었으므로 체르밀 궁의 두 왕자가 식사 중인 곳에도 아직은 창문이 열려 있었다.
열린 창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테이블을 장식한 화병의 꽃잎을 흔들었다. 그러자 말 없던 두 왕자의 눈이 똑같이 꽃에 가 닿았다.
결국 며칠동안 한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둘의 눈이 결국 서로를 향하게 되었다.
란델은 아침마다 한마디씩을 건네던 막내를 대신해 앉아있는 둘째를 보며 말했다.
"칼리안이 떠난 뒤로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들었다."
언뜻 들으면 칭찬이었다. 잘했다는 말일 수도 있었다.
어린 나이에 그렇게 줄창 술을 마셔댔으니 이제라도 그 좋지 않은 버릇을 고쳐 다행이라는 소리로 여길 만한 말이었다.
그것이 일반적인 형제였다면, 분명 그 뜻이 맞았을 것이다.
"아쉬우십니까."
하지만 그런 의미가 아님을 아는 플란츠는 이렇게 답했다.
란델은 대답 없이 잠시동안 플란츠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언젠가 칼리안이 느꼈던, 사람의 속내를 끝까지 헤집어보는 그런 시선이었다.
그 안에서 무엇을 찾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란델은 앞에 놓인 접시로 다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지나가는 소식이나 전해주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오늘 광장에 레니시타 잎이 깔렸더구나."
레니시타 잎은 그 생김이 나뭇잎과 유사하여 모두가 잎이라 부르고는 있지만 사실은 레니시타라는 이름을 가진 선인장의 넓적한 가시였다. 주변의 물기를 빨아들이는 성질이 강했다.
간혹 카이리스 왕실에서 하츠아라 광장 바닥에 이 레니시타 잎을 까는 경우가 있었다. 레니시타 잎 위에 단두대를 설치하여 광장의 하얀 바닥에 핏물이 들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란델은 칼리안을 습격했다 체포된 범인의 참형이 진행된 일을 입에 올린 것이었다. 아침 식사 자리에 올려두기에는 썩 좋은 화제가 아니었다.
란델의 말을 들은 플란츠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평소 말도 없던 란델이 굳이 먼저 입을 연 이유를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오해가 깊으신 것 같은데요."
그래서 플란츠는 실리케가 또 칼리안에게 손을 댔는지를 묻고 있는 란델에게 이와 같이 대답했다.
사실 란델도 이번 일이 실리케와 연관이 없으리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지금 실리케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따라서 란델은 플란츠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금만 더 조용히 지내자꾸나."
관계의 끝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언젠가는 서로가 서로에게 비수가 되겠지만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란델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플란츠는 잠시 앉아 있었다.
마지막까지 서 있는 것이 과연 란델일지, 혹은 칼리안일지. 플란츠는 그것을 가늠해볼까 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대신 연회장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칼리안을, 정확하게는 칼리안이 숨긴 것을 떠올렸다. 플란츠가 란델의 빈 의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 이상 어떻게 더 조용하라는 말씀이신지."
* * *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게 다 비 때문이야."
지금 이런 상황이 생긴 것은 순전히 비 때문이라고.
라트란에서 출발할 때, 칼리안은 분명 시아를 히리스카 숲 인근까지만 데려다주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내렸던 그 유난스러운 비 때문에 산에서 토사가 잔뜩 흘러내렸고 산을 통과하는 유일한 길이었던 왕도를 막아버렸다.
아르센과 칼리안의 마법으로 해결 될 만큼의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일행은 어쩔 수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아침에 작별 인사를 나누었던 햄프티쉬 자작의 저택에 다시 가서 하루를 더 머물렀다.
칼리안의 감정을 상당히 고생시켰던 바로 그 비 때문에 결국 몸까지 고생을 한 것이다.
"카이리시스로 돌아가면 공간이동 장치를 만들어야겠어."
칼리안의 말에 얀이 매우 좋아했고, 아르센은 못 들은 척 했다.
칼리안이라면 분명히 적임자를 찾아 맡겨놓고 감독만 할 테고 지금 칼리안이 가진 인맥 중에 가장 한가하면서 능력있는 마법사는 아르센 뿐이었으니까.
어쨌거나 당장은 공간이동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으므로 칼리안 일행은 조금 돌아가는 다른 경로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새로운 길로 쭉 내려오다보니 히리스카 숲의 코앞에 떡하니 도착해버렸다.
숲 앞에 시아를 데려다놓고 잘가라고 인사를 하려다 보니 그날 밤을 보낼 곳이 마땅치가 않았다. 예정에서 벗어난 길로 이동 중이기 때문이었다.
"마을에 같이 가. 루카 있어. 장로도 있어. 대장, 자고 내일 가."
그런데 마침 시아가 이렇게 일행을 초대했다.
그것은 그동안 시아가 꺼낸 말 중 가장 현명한 소리였으므로, 칼리안은 그리하겠다 대답을 했다. 노숙을 하기 싫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엘프 마을을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더 컸다. 물론 그런 마음이 비단 칼리안만의 것은 아니었는지 칼리안의 대답을 들은 일행들은 매우 좋아하는 얼굴을 했다.
엘프의 마을은 인간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무슨 수를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로지 엘프들만이 찾을 수 있는 길을 따라 들어가야 마을에 들어설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시아의 뒤를 따라 숲 속으로 굽이굽이 들어가자 정말 놀랍게도 어느 한 순간 마을이 딱 보였다. 한 발자국을 뒤로 물리면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는데 다시 한 발자국을 앞으로 디디면 커다란 계곡과 여러 채의 돌집이 모여 있는 멀쩡한 마을이 짠 하고 나타나는 것이다.
마을까지 일행을 안내한 시아가 장로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오겠다며 어디론가 사라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명의 엘프가 일행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인간들의 왕이 누구인가?"
그 말에 칼리안이 얀을 쳐다봤다. 무슨 말인지 몰라 잠시 어리둥절해서였다. 그런데 얀은 칼리안을 보고 있었다.
칼리안이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일행의 눈이 칼리안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엘프가 칼리안에게 다가오자 칼리안이 재빨리 해명했다.
"인간의 왕 같은 그런 대단한 사람은 여기 없어."
"그런가? 장로께서는 인간들의 왕을 만나고 싶어하신다."
"평생 못 만나겠는데."
분명히 르메인의 탄신 기념 축제 때 엘프들도 축하 사절을 보냈다 했는데 그들과 달리 이곳의 엘프들은 인간의 체계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 자리에서 그런 것까지 상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칼리안이 말했다.
"인간의 왕은 아니지만 내가 이 일행의 대표인 것은 맞아."
그러자 엘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칼리안을 향해 말했다.
"좋다. 나를 따라와라."
칼리안은 그렇게 엘프를 따라갔고 마을의 가장 큰 집에 있던 장로와 마주하게 됐다. 히나와 같은 은발을 가진 상당한 미남형의 장로는 칼리안을 만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히리스카 마을의 장로인 제르라 하네. 시아는 내 아들이네."
그 말에 칼리안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시아가 장로의 아들이어서 놀랐다기 보다는 장로의 아들이 조각품이나 팔러 다녔다던 사실 때문이었다. 한 마을의 장로라면 인간으로 치면 영주 정도 되는 것이 아닌가?
아무튼 인사를 받았고 상대는 인간도 아니었으니 칼리안은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통성명을 했다.
"칼리안.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그 말에, 제르의 뾰족한 귀가 한번 움직였다. 제르가 칼리안을 보며 말했다.
"반갑네."
"나를 보고 싶다고 했다던데."
적당히 시아를 데려다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나 받겠거니 하고 물어본 말이었다. 그런데 제르의 말은 칼리안이 생각한 것과는 아주 많이 달랐다.
"맞네. 그대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보자고 했네."
칼리안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오늘 처음 본 사이에, 그것도 아들을 구해다 준 은인한테, 고맙다는 인사는 못할 망정 대뜸 뭘 부탁하겠다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방금 이 곳에 도착한 내가 왜 엘프들의 부탁을 받아줘야 하는지 이해가 어려운데."
피로와 짜증이 딱 절반씩 섞인 칼리안의 말에 엘프 장로 제르가 대답했다.
"그대가 인간 일족의 왕이기 때문이다."
"일족 아니고 카이리스. 왕 아니고 왕자."
"그거나 그거나."
누가 잘못 들으면 칼리안 목 날아갈 소리를 하는 제르를 향해 칼리안이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조금, 많이, 다른 뜻이라서."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가는 통에 옆에서 한 마디도 못하고 이 꼴을 보고있던 얀은 제 머리를 다 쥐어 뜯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아무튼 그대가 우리 일을 좀 도와줬으면 한다."
상상 이상으로 상식적이지 않은 말을 꺼낸 제르는 칼리안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돌아왔던 루카가 이번에는 다른 두 엘프를 데리고 마을 밖으로 나갔네."
"아니, 잠깐만."
"그 후로 열흘이 넘게 돌아오지 않아서 사흘 전에 그들을 찾아오려고 두 명이 더 나갔는데 돌아오지 않는군."
그게 지금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물어보려는데 제르의 말이 끊이질 않았다. 도무지 중간에 끼어들 만한 틈이 없는 것이다.
"인간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그리 말을 했는데도 기어이 나가서 사라져버렸으니. 그래서 그들을 찾는 것을 그대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네. 이 곳의 엘프들은 인간 세상을 잘 모른다네. 더는 엘프만 내보낼 수가 없겠더군."
"여기 엘프 다섯 명이 사라진 것을 나더러 찾아달라는 말인가? 내가 왜?"
"그대가 인간 일족의 왕이니까."
도돌이표가 따로 없다.
엘프가 인간 마을에서 사라졌고 없어진 이들을 찾아오기에는 바깥 세상을 잘 알지 못해서 때마침 찾아온 칼리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뭐 그런 말인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칼리안이 해결을 해줘야 한다는 이유가 어딘지 엉성할 뿐더러 도움을 요청하는 태도도 영 좋지 않았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건지."
결국 칼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밖에 어둠이 내렸으나 칼리안은 그 길로 엘프 마을에서 밖으로 나가려 했다. 이런 곳에서 불편하게 하루를 묵느니 그냥 노숙을 하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자 제르가 다시 입을 열어 칼리안을 붙들었다.
"그냥 도와달라는 말은 아니네. 그에 대한 대가를 주겠네. 물론 시아를 구해준 것에 대해서도 대가를 치를 것이고."
칼리안은 얼핏 얀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엘프들은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뭐 하나라도 도움을 받으면 자신들의 기준에 맞는 대가를 주며 꼭 갚기는 한다고.
칼리안의 눈이 잠시 키리에를 향했다. 엘프의 피가 반만 섞였던 키리에도 그랬었으니까.
장로가 일어나 있는 칼리안을 보며 말했다.
"지그프리드의 땅으로 가는 길이라던데. 맞나?"
"맞아."
그러자 장로가 고개를 끄덕이다 대답했다.
"인간의 길은 너무 느리지만 숲의 길을 쓰면 날짜를 넷에 하나로 줄일 수 있을 것이네."
두 달을 넘게 가야 하는 길. 그 거리를 사 분의 일로 줄여주겠다는 말이었다.
'두 달 거리를 보름 안에 갈 수 있다고?'
칼리안의 어깨가 움찔했다.
칼리안이 재빨리 몸을 돌려 자리에 다시 앉았다.
엘프가 다섯 명이나 사라졌다니!
당연히 도와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