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너무 멀리 왔으니 (6)
많은 일을 끝마친 칼리안은 자리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몸 속의 마나를 순환시키며 외부의 마나를 천천히 끌어와 정제시켰다.
곧 따스한 기운이 몸 속으로 모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칼리안은 그렇게 모여든 마나를 조심스럽게 심장 쪽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네 번째의 서클을 만들려는 것이다.
처음에는 마나가 띠를 이루며 무리 없이 심장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3서클을 마스터한 이후 지금의 단계까지는 항상 성공을 했었으나 이 다음을 넘기지 못했던 칼리안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더욱 집중하며 마나의 띠를 조심스럽게 심장으로 이동시켜갔다.
갑자기, 원활하게 이동하던 마나 띠의 성질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마나의 따스한 온기가 강인하면서도 날카로운 예기로 전환되는 것이다.
성질이 바뀐 마나가 빠르게 단전으로 흘러들어갔다. 마나 띠의 꼬리가 단전으로 들어가 사라지니 심장으로 가던 마나 띠 역시 거꾸로 움직이며 단전으로 빨려들어가듯 흡수되어 버렸다. 서클을 이루어야 할 마나가 오러의 근원으로 바뀌어 심장이 아닌 단전에 쌓인 것이다.
이번에도 서클을 만들어내지 못한 칼리안이 짧은 말을 내뱉었다.
"또."
오늘도 역시 같았다.
칼리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머릿속으로 앨런이 웃는 것이 느껴졌다. 앨런이 웃음기 어린 느낌을 굳이 지우지 않으며 말을 전해왔다.
- 더욱 강한 오러를 지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저것이 어찌 칭찬이겠는가? 저렇게 비꼬지 말고 차라리 개똥만도 못한 놈이라고 욕을 하면 속이라도 시원할 것 같았다.
- 칼 휘두르던 버릇을 아무리 잠시라지만 물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이해하고 있으니 성공하기 전까진 카이리시스에 발 못 들이시리라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앨런의 응원 같은 협박에 칼리안이 어색하게 웃었다.
오러와 마법을 운용하는 것 자체는 그 원리가 다르지 않았다. 축복의 힘 덕분에 칼리안은 오러와 마법을 모두 사용하는 것이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마나도 잘 모아두고 있었다. 때문에 이미 축적된 힘을 발현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모아 둔 마나로 서클을 만들려 하면 이 놈의 마나가 전부 단전으로 가버린다는 데에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오러를 쌓는 과정을 밟게 되는 것이다. 4서클을 만들질 못하고 있으니 아무리 옆에 아르센이 있다 한들 마법을 알려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시스파니안이 울고 갈 것이라고 앨런이 르메인에게 얘기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차고 넘치는 마나가 전부 오러로만 변해가고 있으니 보는 앨런도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그래도 마나가 단전으로 흡수되는 시점이 늦춰지고 있으니 아무리 늦더라도 지그프리드 영지에 도착하기 전에는 성공을 할 수 있으리라. 앨런이나 칼리안 모두 그렇게 기대하고 있는 상태였다.
- 아무튼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왕자님 부친께서 벌인 일 때문에 보름은 꼼짝 없이 궁에 있어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대화에 응해드리기 어려울 수 있으니 제 응답이 없더라도 걱정은 하지 마시지요.
그런 앨런의 말에 칼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껏 일을 벌인다면 칼리안이나 앨런이 벌였지 르메인이 일을 냈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칼리안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 전하께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앨런이 잠시 대답이 없었다. 조금 놀랐기 때문이다.
언제나 앨런과 대화를 할 때는 르메인의 이름을 부르던 칼리안이었는데 르메인을 부르는 칼리안의 호칭이 바뀌어 있었다. 그것이 아마도 이번에 푸른 솔새를 잡으면서 생긴 변화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으나 굳이 언급하지는 않고 대답만 전했다.
- 별 일 아닙니다. 그저 다 제 업이지요.
적당히 얼버무리는 말을 들은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웃는 소리를 냈다. 도무지 마법사의 입에서 나올 만한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찌됐건 칼리안이 알아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라면 앨런이 숨길 이유가 없으므로 칼리안은 그저 둘이 또 뭔 일이 있었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대신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 그래서, 레넌 브리센의 일을 어떻게 하실지 결정은 되었습니까?
칼리안의 질문에 앨런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헤일 라트란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헤일이 신물을 브리센 상단에 판매한 일이 알려질 터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나 분명했으므로 만약 그 사실이 공개된다면 그 순간 브리센 후작을 비롯한 모두가 레넌의 마음이 바뀌었음을 알게 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니 르메인은 그 사실을 숨겨둘지 공개하여 이득을 노릴지를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칼리안은 그 고민의 결과를 묻고 있었다.
앨런으로부터 침중한 느낌과 함께 말이 전달됐다.
-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번질 불인지 가늠하고 있는 듯 하니 우선 지켜보시지요.
그것이 단순히 부자간의 싸움이라면 마음을 바꿔먹든 말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싸움이 벌어지는 브리센이라는 집안의 몸뚱이가 너무 크다는 것이 문제였다.
둘의 싸움이 내전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자칫 1, 2왕자의 세력 싸움으로도 번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벌써부터 왕자들의 싸움을 걱정하는 전하도 고민이 크시겠네요.
일의 발단을 들고 온 칼리안이 그렇게 말하자 앨런이 웃었다.
- 르메인도 장자가 아니었으니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왕자님 앞길이나 잘 걸어가시면 됩니다.
레넌의 배신이 불러오게 될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가며 숙고하고 있을 르메인을 존중하여 칼리안은 그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는 대신 알겠다고만 대답했다.
곧 왕궁에 들어가야 한다 했으므로 그대로 이야기를 마칠 줄 알았는데 앨런이 다시 말을 전해왔다.
- 메를린이라는 시녀 아이가 찾아왔었습니다. 휘트린 영지에서 수익금을 보냈다는데 왕자님께서 부재중이시니 그것을 어찌 해야 할지 물어봐달라 하더군요.어떻게 처리해드리면 되겠습니까?
- 아. 시기가 그렇게 되었군요.
칼리안의 금고를 열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칼리안은 금고 관리를 잠시 앨런에게 부탁하며 금고의 위치와 마법 문양 해제 방법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반지에 불어넣던 마력을 끊었다.
* * *
앨런의 손에는 커다란 짐 가방이 들려 있었다.
분명 무엇을 넣든 그 크기와 무게가 늘어나지 않는 마법 가방을 가지고 있는 앨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신의 몸 만큼이나 큰 짐 가방을, 그것도 다른 이를 시키거나 마법을 쓰지도 않고 이렇게 낑낑대며 직접 들고 온 것이었다.
그 의도를 쉬이 눈치 챈 르메인이 높낮이 없는 말투로 물었다.
"미안하다 생각하라는 말인가."
"그나마라도 알아보시니 다행입니다."
굳이 들고 온 짐 가방을 르메인의 책상 옆에까지 들고 와 내려놓은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가방 손잡이 자국이 진하게 남은 손바닥을 르메인 앞에 펼쳐보이며 말했다.
"전하께서 아드님을 잠깐 과하게 아끼시는 바람에 늙은이가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시겠습니까?"
르메인은 보고 있던 서류로 눈을 가져가며 대답했다.
"나의 검이 아닌 이들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정말 카에라를 보내면 어쩝니까?"
앨런의 눈이 치켜올라갔다.
분명 기사단 카렌을 보내기로 했던 르메인이었다. 그런데 이번 일에 브리센이 깊이 얽혀있음을 알고는 곧장 카에라를 출정시켰다. 그것도 앨런이 칼리안이 시킨 일을 하기 위해 왕실 전서구 담당자를 찾아간 그 잠깐 사이에 말이다. 그야말로 날림 출정이 따로 없었다.
덕분에 앨런은 이렇게 짐을 싸들고 왕궁에 와야 했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처럼 꼴랑 열 명만 남겨둔 카에라의 기사들을 대신해서 르메인의 호위를 맡게 되었으니까.
"전하께서 이렇게 칼리안 왕자님에게만 특별한 대우를 하시게 되면 지금으로서는 왕자님에게 좋을 것이 전혀 없습니다. 편애한다 여기는 순간 순간마다 칼리안 왕자님 생명줄이 깎인다는 말입니다. 그런 일이 없게 하려고 아무에게도 관심을 안보이셨던 분 아니셨습니까?"
르메인이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 일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 둔 바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내일 점심은 두 왕자와 함께 하기로 했네."
"고작 밥 한끼와 카에라를 같은 무게로 두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두 아이의 사이도 좀 볼 겸."
왕자간의 세력 싸움이 일어날 조짐이 있는지 보려 한다는 말이었다.
"볼 것도 없지요. 당장 피바람이 안 부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니."
그렇게 말한 앨런이 소파로 걸어가서 털썩 앉았다. 그런 앨런을 보던 르메인이 안경을 고쳐쓰며 물었다.
"경이 볼 때 그렇게까지 사이가 안좋은가?"
하나하나 살펴보는 수준까지는 되었으나 셋을 한꺼번에 놓고 볼 정신까지는 없는 르메인을 향해 팔자에도 없던 호위 노릇이나 하게 된 앨런의 한쪽 입꼬리가 말아올려졌다. 그것을 본 르메인이 얼른 말을 막았다.
"아니야. 말하지 말게. 알아 들었으니."
투견장의 개들도 왕자들보다는 사이가 좋을 것이라 이야기 해주려던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었다.
대체 칼리안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놈을 주워다 놨느냔 말이다.
정작 앨런과 가장 많이 붙어 있게 된 르메인이 라트란이 있는 방향을 잠시 쳐다봤다.
* * *
잠에 들기 전.
얀과 마주 앉아 차가운 민트 차를 마시며 쉬고 있던 칼리안에게 아르센이 찾아왔다. 아르센은 헤일로부터 빼앗아 온 신물들을 내려놓은 뒤 고생했다 말하는 칼리안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켜보고 있으니 라트란 백작의 언행이 좋지 않았습니다. 감히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그에 대한 처벌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칼리안은 익히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무슨 말을 했습니까?"
그 말에 아르센이 난감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 불손한 내용을 제가 왕자님께 전해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대개 마법사들은 암기력이 좋다. 복잡한 주문식과 마법진 구성, 마나 배열 등등, 외워야 할 것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칼리안을 호위할 단 한 명의 마법사로 뽑힌 아르센은 마법사들 중에서도 암기력이 매우 우수한 편에 속했다. 그러니 헤일이 했던 짧은 말을 억양까지 완벽히 외우는 것 쯤은 아르센에게 있어 별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을 간과한 칼리안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욕을 먹었다.
그래서 칼리안은 그간 아르센에게 엄한 태도를 보였던 것을 얼른 반성한 뒤, 방에 구금하려던 헤일을 고문실 바로 옆의 옥사로 보냈다.
지하 감옥의 옥사 중 가장 습하고 어두운 곳이었다. 그런 곳에 깔린 짚풀 아래에 무엇이 살고 있을지 온 몸으로 배워보라는 의미를 담은 처사였다. 왕실 모독죄는 왕자의 권한으로도 충분히 처벌을 내릴 수 있는 죄목이었으니까.
그 후 칼리안은 아르센과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키리에와 검을 주고 받은 뒤 고쳐야 할 것을 일러주거나, 얀과 수다를 떨며 카이리시스에서 올 기사단을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후.
"카에라······ 같은데."
칼리안은 그 위용도 당당한 카에라의 기사들이 라트란에 입성하는 것을 보며 입을 딱 벌렸다. 앨런이 왜 왕궁에 있어야 했는지, 그것이 왜 앨런의 업이라 말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눈 깜빡할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카에라는 라트란에 도착한 뒤 딱 하루를 쉬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한 노튼을 제외한 두 죄수, 즉 에일라와 헤일을 데리고 곧바로 카이리시스를 향해 출발했다.
물론 사망 후 성 밖으로 내보내진 뒤 다시 잘 깨어난 노튼은 아내와 함께 휘트린 영지를 향해 가고 있을 터였다. 그의 새로운 신분 증명서는 앨런이 보낸 사람을 통해 영지로 전달 될 예정이었다.
"무탈한 여정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칼리안은 새로운 영주가 오기 전까지 영지 관리 대리인직을 맡게 된 말콤에게 감사 인사를 받으며 라트란을 떠났다.
다시 시간이 지났다.
헤일은 작위가 해제됐고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에일라에 대한 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제 막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히리스카 숲을 보며 앨런의 말을 전해들은 칼리안은 고개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