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6화 (47/527)

제10장. 너무 멀리 왔으니 (5)

에일라의 손에 힘 없이 들려있던 검이 떨어졌다.

깊이 베인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잠시 시간이 지난 뒤 입을 연 에일라에게서 작열하는 태양 때문에 쭉쭉 갈라진 소금 같은 목소리가 간신히 나왔다.

"어떻게······?"

이름을 어떻게 아는지, 새 판매점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어떻게 벌써 검의 길에 올랐는지.

수많은 의문이 섞인 질문이었고 같은 의미의 빛이 그 눈에 떠올랐으나 칼리안은 단 하나도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곧바로 칼리안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가 에일라의 눈을 보고 섰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에일라의 턱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에일라가 저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냈다.

"윽!"

세작들이 항상 물고 다니는 독약을 꺼내려 한 행동이었으나 에일라의 입 속 어디에서도 독은 찾을 수 없었다. 이미 독을 삼킨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독약을 빼고 다녔던 것임을 안 칼리안이 실소했다.

"에일라."

칼리안이 다시 부르자 에일라가 어깨를 움찔했다. 칼리안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 증거."

그런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거짓을 말할까.

여기서 보내주면 건네주겠다고 말할까.

에일라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깜박이듯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대로 잡힌다면 그 길로 죽을 것임을 알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던 에일라가 넌지시 물었다.

"말해주면 풀어줄건가요?"

"이제와서?"

칼리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살기를 보내며 다짜고짜 공격을 하더니 이제와서는 살려달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기회를 더 줄 수 있겠는가. 칼리안이 다시 말했다.

"세크리티아인들은 독하다고 다들 그러던데 너는 아닌가보네."

그리고 혼잣말 같은 투로 덧붙였다.

"아닌 건지, 아니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에일라가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칼리안의 얼굴을 보니 살려줄 생각 같은 것은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곧 에일라가 칼리안을 향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섰다. 그리고 바닥에 흩어진 검의 파편을 가리켜보였다. 살려주지 않겠다 하니 살 길을 찾으려는 것이다.

"소드마스터의 칼이 오러 한번에 부서졌네요. 기사도 아닌 호위의 것보다도 못한 검을 들고 다니는데. 왜일까요?"

언제 키리에의 검을 보았는지 에일라가 그의 검을 언급하고 있었다. 칼리안은 대답 없이 에일라를 응시했다. 다음 말을 내놓으라는 뜻으로 해석한 에일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주변에서는 모르고 있는 거예요. 실력을 숨기고 있는거죠?"

그렇게 은근슬쩍 운을 띄운 채 칼리안을 관찰하던 에일라는 우월한 자리를 차지한 이들의 눈빛을 했다. 칼리안이 살짝 주먹을 쥐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에일라는 멈추지 않고 말했다.

"날 그냥 보내주는 게 좋을거예요. 안 그러면 당장 밖에 있는 기사들에게 내가 방금 뭘 봤는지 전부 말할거니까."

칼리안은 분명히 기회를 줬다.

전부 다 눈 감아 줄 테니 증거만 놓고 가라고.

어떻게든 살려주려고, 기회를 줬다.

말 없이 서 있던 칼리안의 입에서 결국 작은 웃음소리가 났다.

- 화악!

돌연 칼리안이 에일라의 멱살을 움켜잡고 앞으로 당겼다. 그리고 에일라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이를 악물고 사납게 말했다.

"살고 싶었으면, 이렇게까지 해 가면서 살려달라고 할 거였으면, 내 앞에서 죽을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칼리안의 살기가 폭발하듯 터져나와 에일라를 내리눌렀다. 붉은 눈이 당장에라도 에일라를 집어 삼킬 것 같이 번뜩였다.

에일라의 얼굴에 본능적인 공포가 어렸다.

"기대하지 마. 그러기엔 네가 너무 멀리 왔으니."

지금 칼리안의 속이 어떤지는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감히 공감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칼리안이 잠시 천장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쏟아지는 빗줄기를 쳐다봤다.

한참이 지난 후 서서히 살기가 흩어졌다.

평소와 같은 얼굴과 목소리로 돌아온 칼리안이 에일라를 보며 말했다.

"네 목숨이랑 바꿀 만큼 대단한 비밀 아니야. 그러니 증거나 말해. 그럼 다른 심문은 받지 않도록 해줄게."

왕족에 대한 암살 시도. 당연히 참수형이다. 세작인 것이 알려지든, 혹은 암살자로 알려지든, 숨긴 것을 모조리 뱉어내게 할 고문이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것을 피하게 해주겠다는 말이었다.

에일라가 피식 웃었다.

이렇게 잡혀 그대로 죽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던 탓이다. 때문에 그녀는 증거가 어디에 있는지 절대로 말하지 않고 죽는 것으로 억울함을 좀 풀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마치 그 마음을 읽은 것처럼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심문을 하게 된다면 우리가 안 해. 내가 누구를 좀 불러올 생각이라서."

에일라가 다시 한번 찌푸려진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이 무미건조한 얼굴로 말을 맺었다.

"하얀 수리. 심문은 그가 할 거야."

그 말은 진심이었다.

카이리스와 세크리티아 모두를 배신했으니 처벌의 권한도 함께 나누어야 할 터.

그제야 에일라의 눈에 뿌리 깊은 공포감이 들어찼다.

마치 칼리안의 살기를 대했을 때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배신자를 대하는 하얀 수리의 잔혹성은 칼리안도 잘 알았다. 하얀 수리가 추적해 잡아낸 배신자의 시신을 본 체이스는 사흘을 넘게 밥을 넘기지 못했었다.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이에게 생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자라는 것을 에일라 역시 모르지 않는 것 같았다.

"술집 옆 건물.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세 번째 칸."

곧바로 이렇게 말했으니까.

* * *

에일라는 포박당한 채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유란과 기사들이 직접 감시를 시작했다. 왕실의 기사단이 도착해 카이리시스로 이송 될 때까지 절대로 도망치지 못하게 하라는 칼리안의 엄명이 따랐다.

그리고 칼리안은 키리에와 함께 한슨 마을로 간 두 명, 그리고 에일라와 노튼을 감시할 여섯 명을 제외한 나머지 기사 모두에게 에일라가 말한 곳과 술집을 수색하도록 지시했다.

성의 하인들이 칼리안의 얼마 안되는 짐을 성에 마련된 또 다른 귀빈실로 옮기는 틈을 타 칼리안이 홀로 지하 감옥을 찾아갔다.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은 에일라가 아니라 노튼을 찾아 간 길이었다.

주변을 잠시 물린 칼리안은 종이에 싸인 작은 것을 노튼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노튼이 퉁명스레 물었다.

"뭐요, 이게?"

칼리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일 아침에 먹어."

그렇게 말한 칼리안은 더 이상의 말과 설명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펼쳐 보니 그것은 자신이 숨겨왔던 설탕 조각이었다. 노튼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으나 그냥 이제는 뭔들 못하겠냐는 심정이었으므로 그것을 잘 챙겨 품 속에 숨겼다.

방으로 돌아온 뒤 칼리안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종이 한 장을 들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카이리스의 중범죄자를 잡는 것에 매우 큰 도움을 준 말콤 체티쉬라는 이를 너그럽게 용서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그것을 봉인한 뒤 얀에게 건네주며 칼리안이 말했다.

"집사에게 전해주면 돼."

얀은 기꺼이 그리하겠다 대답했다.

* * *

한편 그 시간.

헤일 라트란은 불안한 표정으로 방 안을 걸어다니는 중이었다. 이미 전부 물어뜯어 사라진 손톱을 또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영 탐탁지가 않았다. 칼리안의 방에 암살자가 들었다. 온 성이 흔들리고 벽에 구멍이 나도록 싸움을 했다. 그런데 칼리안은 그에 대해 설명해주지도, 추궁하지도 않는 것이다.

게다가 말콤이 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기에 돌아오면 한 소리를 해야겠다 하고 있었는데 밤이 다 되어가도록 오지를 않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냔 말이다!"

답답해하며 다시 손톱을 물고 있는 헤일에게 한 명의 하인이 돌돌 말려 있는 작은 편지를 가져다 주고 돌아갔다. 바로 전서구를 통해 전해진 소식이었다.

"설마, 왕실에서 집을 수색했다는 내용인가."

있을 수 있는 일이었으나 집의 일은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어차피 헤일은 증거 자료를 남겨 두지 않았다. 게다가 헤일은 오전에 전서구를 보내 레넌 브리센에게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청해 둔 상태였다. 이런 일에 힘이 되어 달라고 지금까지 그렇게 공을 들여놓은 것이 아니겠는가?

미리미리 대비를 잘 해뒀다 생각한 헤일이 편지를 펼쳐들었다.

그리고 눈을 부릅떴다.

그의 집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 변호를 맡아 줄 이가 필요할걸세. 그래서 자네를 좀 도와 달라고, 실리케 왕비님께 자네가 무엇을 팔다 그리됐는지 내가 잘 설명해두었네. 그러니 마음 푹 놓게. <앨런 마나실>

헤일의 손에서 편지가 뚝 떨어졌다.

대체 칼리안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그것을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다. 앨런 마나실의 편지에 적혀 있는 '무언가'가 신물을 뜻하는 것이 정말 맞는지를.

헤일이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마음을 고쳐먹고는 다시 들어왔다.

"아니야. 그 능구렁이 같은 마법사 새끼는 이미 다 알고 저런 편지를 보냈을 테지. 그 평민의 자식에게 왕자님 소리하며 굽신거리는 것도 지친다. 일단 숨기기나 하자."

헤일이 방 문을 걸어잠궜다. 만에 하나 왕실에서 보낸 이들이 수색을 하다가 이 비밀공간이 드러날 경우를 대비해 꼭 숨겨야 할 물건이 있었다. 실리케나 브리센 후작이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되는 것.

신물!

그간 푸른 솔새로부터 구매해두었으나 아직 브리센 상단에 넘기지 못한 신물을 꺼내려는 것이었다.

- 드르륵!

침실 난로 위의 시계를 돌리자 침실 옆에 놓인 책장이 작은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그리고 그 안에 쌓여 있는 수많은 귀중품이 눈에 보였다. 헤일은 그것들에는 눈길을 주지 않고 서두르는 걸음으로 가장 구석에 놓인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잠시 뚜껑을 열어 그 안에 든 것을 확인했다.

꽤 많이 모인 신물들이 보였다. 이 정도면 한 재산 챙길 수 있었을 텐데 레넌 브리센과 조금 더 협상을 해보려 따로 모아 두었더니 이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아쉬운 마음에 쩝, 하고 입맛을 다신 헤일이 얼른 상자 뚜껑을 닫고 몸을 일으켰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런 소리를 들었다.

헤일이 깜짝 놀라 고개를 치켜 들었다. 그의 눈 앞에 어떤 남자의 머리가 둥둥 떠 있었다. 그러더니 마치 허공에 그림을 그리듯 머리부터 목, 어깨, 상체가 조금씩 나타났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을 마주한 헤일이 헛숨을 들이키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누, 누구냐!"

어딘가 낯이 익은 이였다.

전날 밤 비에 젖은 채로 칼리안을 찾았던 마법사······.

마법사!

곧 온 몸이 다 보여지게 된 그가 헤일을 보며 뒤늦은 자기 소개를 해주었다.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진중한 얼굴이었다.

"마법사. 아르센 헤르츠입니다."

에일라와 칼리안이 싸움을 벌이느라 마법으로 잠근 문을 아무도 열지 못했던 이유는 그것을 열어 줄 만한 단 한명의 마법사가 헤일의 방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이유는 집사 말콤도 숨긴 위치를 알지 못하는 빼도 박도 못할 증거인 신물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칼리안이 말하기를 증거는 차고 넘칠수록 좋다 하였으니.

종이에 적힌 거래 기록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렇게 눈에 잘 띄는 것이 있으면 더욱 좋지 않겠는가?

때문에 4서클의 투명화 마법을 유지하며 몇 시간째 헤일의 방에 숨어 있었던 아르센 헤르츠가 매우 정중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수고스럽게 찾아주신 만큼 잘 쓰겠습니다."

아르센이 넋을 잃은 헤일의 손에서 상자를 뺏어들었다. 그리고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백작께서 아무 저항 없이 순순히 전해주셨다고, 능구렁이 같은 마법사 새끼와 평민의 자식인 왕자님께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사양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헤일의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꺼질 듯한 숨소리가 그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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