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5화 (46/527)

제10장. 너무 멀리 왔으니 (4)

히나가 나간 뒤 칼리안은 키리에와 두 명의 기사를 한슨 마을로 보냈다. 혹시라도 헤일 라트란이 노튼의 아내를 데려다 협박을 할까 우려됐기 때문이다. 물론 헤일이 노튼을 해치려 할 가능성도 많았으므로 감옥 역시 제대로 지키도록 해 두었다.

그리고 이제 막 르메인을 만나고 궁에서 나온 앨런에게 연락을 취한 뒤 이렇게 말했다.

- 스승님. 브리센 상단으로 가시면 안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앨런이 의문을 가지는 것이 느껴졌다.

헤일이 브리센으로부터 등을 돌린 것을 넌지시 알려주기 위해 브리센 상단을 찾으려던 것이었지 않나?

브리센에서 자신을 어찌 맞이할지 모르니 걸음이 시끄러울 것이라 르메인에게 미리 말도 하지 않았던가. 헌데 그것을 가지 말라 하니 이상할 수 밖에.

- 다른 것이 확인되었습니까?

- 네. 다른 것들은 그대로 진행해주시면 되는데, 상단 쪽은.

말을 잠시 멈춘 칼리안은 조금 전 지하 감옥에서 나온 뒤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칼리안이 감옥에서 올라온 뒤.

방으로 돌아오기 전에 만난 것은 바로 집사 말콤이었다. 텐실의 신관이었음에도 헤일에게 너무 저자세를 취하는 것이 이상했던 터라 헤일 몰래 그를 찾아갔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칼리안은 그저 헤일이 말콤의 약점을 잡고 있을 것이라는 정도로만 예상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것을 해결해 준다면 헤일이 숨겨둔 무언가, 이를테면 거래를 입증할 만한 장부같은 것을 찾는 일에 말콤이 도움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살려주십시오, 왕자님!"

그랬으니, 방 안에 들어와 있던 칼리안을 본 말콤이 이렇게 말하며 발 밑에 엎드리는 것을 보고 적잖이 당황할 수 밖에.

결론부터 말하자면 말콤에게 약점이 있기는 있었다. 대단할 만한 것은 아니었고 흔하디 흔한 돈 문제였다. 헤일에게 큰 빚을 지게 되어 그것을 빌미로 그리 잡혀 지냈다고 했다.

따라서 칼리안은 이제 텐실에서 신관들을 다시 데려가게 되었으니 빚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질 않는다고 말을 해주었다. 그 말을 들은 말콤은 후련해하는 대신 이렇게 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살려달라 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번 일로 백작님이 정말 처벌을 받으면, 그래서 신물을 사고 판 일에 제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들키면, 저는 텐실에 가자마자 죽습니다."

헤일을 압박하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두었던 것이 오히려 말콤을 더 겁먹게 한 모양이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말콤의 말에 칼리안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신물을 산 건 알겠는데. 팔았다니. 텐실의 환심을 사려고 신물을 사다 텐실에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는 소리야?"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해오지 않았던가.

헤일이 푸른 솔새에게서 구매한 신물을 텐실에 보냈다고. 그렇게 란델과의 끈을 이어놓은 것이라고.

"텐실에 보낸 것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말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목숨 살릴 구명줄이 칼리안 뿐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백작님은 완전히 미움을 받고 있어서 텐실 측과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아무래도 플란츠 왕자님께서 세자위와 멀어진 것 같자 끊어진 줄을 다시 연결할 방법을 이리저리 찾으셨습니다."

헤일이 텐실로부터 한 번 돌아선 뒤 플란츠의 미래가 영 어두운데다 칼리안 역시 헤일에 대한 반응이 시원치 않았으니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때문에 다시 란델과의 끈을 이으려 했으나 란델이나 텐실 측에서 헤일을 만나주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물론 여기까지는 흥미롭기는 해도 놀라운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리 놀라지 않은 칼리안의 얼굴을 잠시 살피던 말콤이 결심한 듯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푸른 솔새는 백작님에게 완전히 매수되어 있습니다. 카이리시스에서 얻어지는 정보로 신물을 찾아다가 백작님에게 파는데 그 양이 꽤 많습니다. 그래서 그 일이 혹시 들통날까봐 왕자님께도 제가 신관인 것을 숨기자 하였습니다. 아무튼 백작님은 그것을 사서 다른 곳에 싸게 되팔았습니다. 텐실과 연결을 시켜주면 그때부터는 그냥 주겠다고 거래를 했었습니다."

"어디로 되팔았는데?"

그 후 이어진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을 다시 떠올린 칼리안이 앨런에게 말했다.

- 아무래도 브리센 후작이 자식 교육을 잘못 시킨 것 같은데요.

"브리센 상단의 상단주, 실리케 왕비의 오빠인 레넌 브리센 자작입니다. 그가 텐실에 신물을 선물하고 있습니다."

레넌 브리센.

그가 텐실에 줄을 댔다.

플란츠를 배신하고 란델의 편에 선 것이다!

그것은 곧 레넌이 자신의 아버지인 브리센 후작과 동생 실리케에게서 등을 돌렸다는 소리와 같았다. 칼리안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헉 하는 소리가 났다.

엘프 꼬마 하나 만난 뒤 비 때문에 발이 묶였을 뿐인데.

카이리스에 두 번째 태풍을 몰고 올 바람길을 찾은 칼리안이 조용히 물었다.

- 어쩌죠?

현명한 마법사 앨런 마나실은 제자의 짧은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앨런은 마차를 돌렸다.

막내 아들이 여우 잡겠다 놓은 덫으로 곰을 잡은 것 같다는 말을 르메인에게 당장 전해줘야 했다.

* * *

앨런과 르메인이 얼결에 걸린 곰을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에 대해 매우 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문제의 발단이 된 칼리안은 석찬을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레넌도 레넌이지만 헤일부터 잡는 것이 우선이니 칼리안은 일단 계획한대로 일을 계속 진행하기로 했다.

오전 중에 만난 히나를 통해 이 시간에 새장을 열어놔달라 부탁해 두었던 칼리안이었다. 그러니 만약 새가 곧바로 주인을 찾았다면 지금쯤 저 안에는 아주 반가운 손님이 와 있을 터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방문을 열어주려 하던 얀을 불러세웠다.

"나, 차 한잔만 가져다 줘."

"네.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얀은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가고 칼리안이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한대로, 있었다.

열린 새장과 열린 창문이 보였다. 그리고 하얀 비둘기 대신 푸른 솔새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혹시나 누가 들어올까 싶어 마법으로 방문을 잠궈버린 칼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엄청 빨리 왔네."

푸른 솔새는 이전처럼 여유롭게 굴지 못했다. 칼리안을 도울 만한 두 명의 검사가 없음에도 그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의 전서구가 가져온 칼리안의 편지를 읽은 탓이다. 푸른 솔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칼리안에게 말했다.

"편지 내용이 너무 감명깊어서요."

카이리스인을 도와 제 실속을 단단히 차렸다는 사실이 나에랑샤 새 판매점에 전달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찾아오라고. 칼리안은 그렇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럴 것 같았지."

칼리안이 부르는대로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얀 수리가 이 사실을 아는 순간 평생을 쫓기며 살텐데 어떻게 무시하겠는가? 생각지 못한 일을 마주한 푸른 솔새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로 저를 협박하는 건가요?"

"헤일 라트란이 신물을 거래한 증거. 그리고 정보를 팔았다는 증거. 그것들이 필요해서."

"백작에게 확인하면 될 것을, 굳이 저에게?"

말콤의 말에 따르면 헤일은 거래 증거를 남겨두지 않았다고 했다. 발각되어 제 목을 조를까 우려한 듯 싶었다. 물론 말콤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으니 수색은 하게 될 것이지만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푸른 솔새를 다시 불렀다.

헤일에게 증거가 없다는 것을 굳이 푸른 솔새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으므로 칼리안은 그냥 웃으며 대꾸했다.

"일단 네 것 부터."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푸른 솔새가 앉아있던 곳에 올려두었던 서약서를 가리켜 보였다. 실리케와 거래했을 때 사용한 것과 같은, 맹세의 인을 담은 것이었다.

"증거를 넘기면 네 비밀은 지켜줄게."

푸른 솔새가 발 끝으로 바닥을 톡톡 쳤다. 정보를 넘기고 돌아갈지 칼리안을 죽여 입을 닫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푸른 솔새의 발이 잠시 멈추었다.

그와 함께 숨 막힐 듯한 살기가 칼리안을 향했다. 칼리안은 살기에 짓눌리는 대신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

"이게 대답인가?"

"귀찮은 관계가 만들어졌으니까요."

칼리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내가 너 때문에 어떤 일에 얽혔는지 알면 그런 말 못할텐데."

푸른 솔새가 생긋 웃었다.

그와 함께 딸깍,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고 세 개의 구슬 같은 것이 칼리안을 향해 쏘아지듯 날아왔다.

화염구의 힘을 응축시켜 만든 마력탄이었다.

하나라도 정통으로 맞는다면 시신을 수습할 때 집게를 써서 한조각씩 모아야 할 정도의 화력을 지닌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으나 칼리안은 재빨리 실드를 펼치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 쾅! 쾅! 콰앙!

마력탄이 벽에 닿아 터지며 세 번의 폭발음이 울렸다.

건물이 흔들렸다. 자욱한 먼지가 칼리안과 푸른 솔새의 시야를 방해했다. 칼리안이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아예 죽일 생각으로 온 거야?"

꽤 비싼 물건인데 이렇게 준비해온 것을 보면 애초부터 칼리안의 거래에 응할 생각은 없었다고 보아야 할 터였다.

공격을 해 올 것은 대비했지만 마력탄은 예상하지 못했다.

'본래 칼을 썼었는데, 왜 마력탄을!'

그녀는 검을 매우 잘 다뤘다. 마력탄 같은 것을 이렇게 쏘아보내는 싸움을 하지는 않았다.

급한 와중에도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푸른 솔새에게 검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강해질 수 있다 조언했던 것은 다름 아닌 베른이었다.

젠장!

곧 다시 한번 딸깍 하는 소리가 나며 칼리안의 그림자가 보이는 곳을 향해 마력탄이 날아왔다. 칼리안은 다시 피했고 폭발음이 또 울렸다.

- 콰아앙!

결국 네 번의 마력탄에 직격당한 벽이 무너졌다.

커다란 구멍을 통해 라트란 시의 전경이 그대로 보였다. 창문이 필요치 않게 된 귀빈실 벽을 보며, 칼리안이 실소했다.

"다 죽이겠네."

방문 밖으로 다가온 얀과 기사들의 소리가 들렸다.

다수의 싸움을 할 만큼 방이 크지 않았고 폭발 범위는 상당히 넓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문에 다시 한번 락을 걸며 말했다.

"들어오지 마."

먼지가 걷히자 그녀의 손에 또 하나의 마력탄이 들려 있는 것이 보였다. 칼리안이 아연하여 실드를 둘렀고 마력탄이 마치 암기와 같은 속도로 날아왔다.

- 쌔애액!

검을 뽑아 든 칼리안은 이번에 날아오는 마력탄을 피하지 않았다. 이 성은 카이리스 왕궁과 달랐다. 그러니 마력탄이 또 벽을 두드리면 정말로 건물이 무너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리안은 실드를 두른 채 검을 휘둘러 마력탄을 쳐냈다. 뚫린 벽 밖으로 날아간 마력탄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

푸른 솔새가 칼리안에게 한발 더 다가섰다.

칼리안이 짜증 섞인 소리를 냈다.

"또 있어?"

푸른 솔새가 검을 뽑아들며 말했다.

"없어요."

그와 동시에 푸른 솔새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의 검이 날듯이 뻗어나오며 칼리안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칼리안이 검을 들어올려 공격을 막았다.

- 카앙!

두 개의 검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불안했다.

키리에와 연습을 하느라 여러 차례 무리가 가해졌던 평범한 철검이었다. 제대로 된 오러를 버텨내기는 힘들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칼리안은 검 대신 몸에 오러를 둘렀다. 그리고 검을 비틀어 푸른 솔새의 공격을 흘려보낸 뒤 곧바로 내리그었다. 푸른 솔새가 다시 검을 휘둘러 칼리안의 검을 튕겨냈다.

그리고 그 순간.

푸른 솔새의 시야에서 칼리안이 사라졌다.

푸른 솔새는 다급히 검을 회수하며 몸을 돌렸다. 어느새 그녀의 뒤로 돌아간 칼리안의 검이 날아오고 있었다. 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빨랐다. 위험을 느낀 푸른 솔새가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으나, 팔이 길게 베이는 것을 막지 못했다.

칼리안이 다시 검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푸른 솔새는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다시 날렸다.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없다더니."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쳐낼 만한 충분한 공간이 없었다.

찰나와 같은 시간에 결정을 내린 칼리안의 검이 짙게 빛났다.

- 우웅!

미세한 떨림과 함께 청명한 소리가 들렸다. 푸른 오러가 검에 씌워져 차갑게 빛났다.

칼리안은 오러의 힘이 담긴 검을 들어 이미 지척까지 날아온 마력탄을 내리그었다.

- 서걱!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던 마력탄이 오러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반으로 잘라져 땅에 떨어졌다. 푸른 잔상이 허공에 한참을 남았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폭발은 없었다.

대신,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리며 칼리안의 검이 산산조각났다. 버텨내지 못한 것이다.

칼리안이 눈을 내리깔았다.

"어찌해야 하나. 내가, 너를."

잠시 베른의 눈이 되어 푸른 솔새를 보던 칼리안이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에일라."

푸른 솔새는 지금 칼리안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칼리안의 부서진 검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경악한 빛이 가득했다.

여섯 번째 소드마스터가 지금 그녀의 눈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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