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너무 멀리 왔으니 (3)
헤일의 표정을 본 칼리안이 마찬가지로 눈썹을 찌푸렸다.
"백작의 표정이 좋지 않군요."
푸른 솔새에게 정보를 팔았다는 게 알려지지는 않을까 걱정하던 헤일이 얼른 인상을 폈다. 그리고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니야. 만에 하나 잡히더라도 독하기로 소문난 세크리티아인이 아닌가? 잡히는 순간 목숨을 끊을테지.'
안심할 구석을 찾은 헤일이 다시 입에 꿀을 발랐다.
"아닙니다. 왕자님을 습격한 자에 대한 제 분노가 깊어 그렇습니다. 그러니 오늘부터는 이 헤일도 범인 잡기에 앞장을 서겠습니다. 제 영지에서 발생된 일이 아닙니까?"
칼리안이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을 잠시 보였다. 그 표정을 통해 칼리안이 뭔가 숨기는 것이 있음을 확신한 헤일이 잠시 칼리안을 비웃었다.
'나를 떠보려 한 것이군. 하여튼 건방지기는.'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칼리안은 그 뒤로 다른 말 없이 식사를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식당으로 조용히 찾아온 유란이 얀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돌아갔다. 그리고 얀이 칼리안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여 방금 유란이 해준 말을 전했다. 이야기를 들은 칼리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곧 칼리안의 눈이 헤일을 향했다. 헤일은 유란이 들어온 순간부터 이미 칼리안에게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칼리안은 굳이 헤일을 부를 필요 없이 곧바로 말했다.
"노튼이라는 그 자. 나에게 직접 해야 할 말이 있다는군요."
전해들은 이야기를 말한 칼리안은 곧바로 냅킨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문에 아직 제대로 뭘 먹지도 못한 헤일도 일어서야 했다. 헤일이 몸을 세우자마자 칼리안이 물었다.
"가볼까 하는데. 같이 갈 생각인지?"
"왕자님께서 직접 감옥으로 가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 말에 칼리안이 한동안 헤일을 쳐다봤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죄수들이 있는 곳이 아닙니까."
"당연한 것을 묻습니까. 감옥이니, 죄수가 있겠지."
"아니, 제 말씀은 그것이 아니라······."
어떻게 죄수들이 있는 그 더러운 곳에 자신을 데리고 가겠다는 말을 한단 말인가? 가려면 혼자 갈 것이지!
헤일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이런 말들을 꾹 눌러담았다.
"노튼이라는 자를 데리고 와서 만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데리고 와서 만나도 되고, 내가 가서 만나도 되고. 내 뜻대로 하지 못할 것이 있습니까."
"······ 아닙니다, 왕자님."
결국 감옥에 수감되러 가는 죄수와 비슷한 얼굴이 되어 칼리안의 뒤를 따라갔다.
지하 감옥은 어린 시절의 헤일이 호기심에 한번 가 본 적이 있었다. 그러다 피고름 가득한 죄수들의 몰골과 바닥에 깔린 짚풀 아래에 우글거리는 지네 떼를 보고 기함을 한 뒤로 두 번 다시 걸음하지 않았었다.
그런 곳을 오랜만에 다시 찾은 헤일이 코를 감싸쥐었다. 비가 유난스럽게도 내리고 있는 탓에 한껏 짙어진 불쾌한 냄새 때문이었다. 헤일은 아침을 얼마 먹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노튼의 앞으로 걸어갔다.
노튼은 전날 칼리안에게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그가 칼리안과 헤일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집사 말콤이 앞으로 나섰다.
"일어나 예를 보이지 않고 무얼 하는 것이냐."
그 말에 노튼이 말콤을 노려보며 말했다.
"망할 신분 때문에 하루 아침에 죽을 날 세는 신세가 됐는데 내가 지금 예까지 갖춰야 하나?"
그와 칼을 맞댄 것이 왕자가 아니라 같은 평민이었다면 이런 상황이 되지는 않았을테니 하는 말이다. 헤일은 당장 이 무례한 놈의 목을 내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더 큰 잘못을 저지른 범인을 잡기 위해 살려두어야 할 놈이었다. 노튼 역시 그것을 알고 저렇게 배짱을 부리는 것이리라.
화가 잔뜩 난 헤일이 잠시 칼리안의 기색을 살폈으나 칼리안은 특별히 불쾌해하는 낯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 앞에서 헤일이 어떻게 더 화를 내겠는가? 그저 일이 모두 끝나면 절대 곱게 죽지 못하게 하리라 다짐하며 열이 오르는 것을 꾹 참을 밖에.
그런 사소한 일이 잠시 있은 뒤, 노튼이 칼리안을 향해 말했다.
"생각나는 것이 있어 오시라 했소."
칼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말해."
노튼이 잠깐 헤일과 말콤을 쳐다봤다. 그 뒤에는 기사들을, 그리고 감옥 벽과 주먹만한 창문들을 잠시 보았다. 그렇게 주변을 한번 둘러본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푸른 솔새라 불리는 그 자. 세크리티아의 세작이오."
밖에서 천둥 소리가 났다.
헤일의 머릿속에는 번개가 쳤다.
많고 많은 새 중에 하필이면 그 새가 왜 저 입에서 나오는지!
노튼이 칼리안과 헤일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그러더니 아주 큰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곳에 있는 누군가에게 물건을 팔 예정이라 했소. 아주 오래전부터 연이 있던 자라고 했지."
노튼은 빙글빙글 웃었다.
헤일의 낯짝을 보아하니 아주 가관이었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백작 씩이나 되는 이를 구석으로 몰아보겠나 싶은 마음에 노튼이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좀 이상하지 않소? 세작과 오랫동안 연을 맺었다니. 세작과 연을 맺고 할 만한 것이 뭐가 있겠소?"
여기까지.
노튼은 전날 밤 칼리안이 시킨 일을 능청스럽게 수행했다.
- 몇가지만 더 자백해. 내가 말해주는대로.
- 거짓말을 하라는 소리요?
- 거짓 아니야. 그냥 내가 네 입을 빌리는 것 뿐이야.
- 팔도 뺏어간 사람에게 입이라고 못 뺏기겠나. 알겠소.
전날 밤 노튼과 했던 대화를 떠올리던 칼리안이 노골적인 눈빛으로 헤일을 보며 말했다.
"세작질 밖에. 없겠지."
그리고는 헤일의 반응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안 그렇습니까, 라트란 백작."
헤일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닐까 싶은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노튼을 향해 물었다.
"그 자의 이름은 들은 적 없어?"
"들었던 것 같은데. 영 기억이 나질 않소."
"곧 카이리시스로 호송될 거야.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 이름 꼭 생각해내도록 해. 도움이 되면 네게도 나쁠 것 없을 테니까."
"알겠소."
칼리안이 단순히 자신을 떠보려는 자리가 아니었음을 깨달은 헤일은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냄새, 저 불쾌한 냄새가 머릿속을 멋대로 휘저었다. 짚풀 아래 있던 지네 떼가 온 몸을 기어다니는 것 같다. 팔다리에 피고름이 매달려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 감옥에 자신이 갇혀있는 모습이 끝없이 상상됐다.
아무리 평민의 증언이라지만 재수 없으면 저 증언을 곧이곧대로 믿은 르메인이 헤일의 목을 댕강 잘라버릴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헤일은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며 서둘러 방으로 돌아갔다. 브리센 후작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당장!
그런 헤일의 뒷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서 바쁘게 움직여봐."
그래서 제대로 된 증거 좀 만들어 달라고.
* * *
감옥에서 나와 잠시 다른 곳에 들렀다 온 칼리안이 자신의 방에 들어서니 아무도 없어야 할 곳에 두 명의 손님이 있었다. 바로 시아와 히나였다.
시아는 멀뚱멀뚱 칼리안을 쳐다봤고 히나가 깜짝 놀라 허리를 숙였다.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보아하니 청소를 하다 말고 새 구경을 하고 있던 것 같았다.
"히나는 청소하러 왔어. 내가 따라왔어. 새가 여기 있어서. 히나는 오면 안된다고 했어."
칼리안이 이상하다는 표정이 되어 말했다. 물론 시아의 답이 먼저 나왔다.
"알아. 히나 혼내지 말라고 말한 거야."
"왜 왔는지 물을 생각 없었어."
대화 담당자 아르센이 필요했지만, 없었다.
새 잡으러 돌아다닌 것도 모자라 밤새 시아 곁을 지키느라 잠이 든지 얼마 되지 않았을 터였다.
푸른 솔새가 시아에게서 손을 떼겠다 말했으나 칼리안은 그 길로 시아를 내쫓지 못했다. 때문에 히리스카 숲 앞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근까지는 동행하는 것으로 암묵적인 결론이 난 상태였다.
시아와 헤어질 때 쯤이면 이 대화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칼리안이 실소했다. 아마도 안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러다 푸른 솔새가 이야기했던 말 중에 '숲의 길'이라는 것이 생각난 칼리안이 시아를 쳐다봤다. 분명 숲의 길로 도망치는 엘프를 따라갈 수가 없다고 했었다.
'숲' 까지만 운을 떼니 시아는 알아서 대답했다.
"맞아. 숲의 길, 나도 조금 알아. 인간들이 다니는 길보다 빨라."
칼리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 길을 이용해 지그프리드 영지까지 빠르게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시아가 먼저 말했다.
"어머니 나무는 인간에게 숲을 열어주시지 않아. 그래서 인간들은 못 가는 길이야."
치사하다.
칼리안은 엘프들이 왕도를 쓰지 못하게 하자고 르메인에게 건의해보고 싶은 마음을 애써 지웠다.
그때 옆에서 히나가 시아를 쳐다봤다. 매우 이상하고 신기한 그 능력 덕분에 시아는 굳이 수어를 보지 않고도 히나의 말에 대답했다.
"알았어."
그러더니 칼리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미안하대. 나가보겠대. 청소는 이따 대장 없을때 다시 와서 하겠대."
히나의 말을 통역해 준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칼리안의 방에서 흥미를 느끼지 못한 시아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히나는 서둘러 청소 도구를 챙겼다. 그 와중에도 새장에 자꾸 눈이 가고 있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조금 전까지 성의 지하에 있느라 잔뜩 눅눅해진 기분이 싹 마르는 느낌이 든다.
물론 히나는 칼리안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저런 여동생이 있으면 잘해줄 것이라는 얀의 말에 백번이고 공감하는 순간이었다.
곧 칼리안이 히나에게 말했다.
"새, 오늘 저녁에 보내줘야 해."
히나는 실망한 표정을 짓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궁으로 돌아가면 다른 새를 사줄게."
히나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더니 곧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었다. 시녀의 방에 새장이라니. 함께 지내는 메를린이 불편할 것이다.
칼리안이 잠시 창 밖을 쳐다봤다.
하도 비가 많이 와서 하늘 색 만으로는 지금이 몇 시쯤 되었는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한동안 말 없이 서 있던 칼리안이 그 창문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내가 석찬에 들어가면 새장 문 좀 열어줘. 창문도."
알겠다는 듯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르메인이 처음으로 자신의 방문을 반기는 것 같다고, 앨런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난 밤 칼리안의 소식을 전하다 만 뒤로 오늘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해 주겠다 하였으니 그것 때문에 저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리라.
기다린 만큼 소식도 빨리 전해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때문에 앨런은 이번에도 본론부터 꺼내놓았다.
"카이리스 정보를 다른 나라에 파는 작자와 왕자님을 공격한 무리와 얽혀있는 작자 중에 어느 작자의 죄가 더 중합니까?"
르메인은 말 없이 고개만 짧게 끄덕였다.
그게 무슨 뜻의 대답인지를 가늠하기도 전에 르메인이 카에라의 기사 단장을 불렀다.
"라트란으로 기사단을, 그것도 카에라를 보내시려는 겁니까?"
"그렇네."
앨런은 어울리지도 않게 감정적인 행동을 하는 르메인을 서둘러 만류했다.
"국왕 친위대 발이 그렇게 가벼우면 왕자님께 좋지 않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카에라는 전하의 곁에 있어야 할 이들이니 다른 기사단을 부르시지요."
르메인의 눈초리가 꿈틀했다.
앨런이 설명한 것은 왕실에서 직접 나서서 단죄해야 하는 중죄 중의 중죄다. 그러니 왕실 기사단을 보내는 것이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카에라를 보내려 한 것에도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반역자들이 모인 곳에 있는 그 아이에게 아예 브리센의 칼까지 보내라는 말인가?"
브리센 소속의 기사단이 그 곳에 혼자 있을 칼리안을 제대로 도울 리가 없으리라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었다. 그런 르메인의 말을 들은 앨런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 반역자 중 한 명이 브리센도 배신했으니 이번 일에 대해서는 별 탈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앨런은 지금 잡아야 할 둘이 어떤 이들인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말해주었다. 그러자 르메인이 깊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라트란 백작이 입에 발린 말을 잘 하는 것은 알았어도 그 정도일 줄은 몰랐군. 게다가 세크리티아의 세작이라니. 그 아이가 대체 어쩌다 그런 험한 이들과 얽혔는가?"
"어쩌다보니 그리 되었다 합니다."
앨런이 별 것 없다는 얼굴로 답했다.
둘러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러했으니 설명할 것이 없었다. 르메인이 손깍지를 끼며 입을 열었다.
"기사단 카렌을 보내겠네."
"그리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라트란 백작의 저택에 사람을 좀 보내주실 수 있으신지요?"
가능성은 매우 적었지만 만에 하나 이번 일에 대한 증거가 카이리시스 저택에 있을 수도 있으니 하는 말이었다.
이미 그렇게 할 생각이던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 것이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한 앨런이 테이블에 놓인 레몬차를 쳐다봤다. 더운 여름에도 르메인은 뜨거운 차를 즐겼는데 차에서 김이 펄펄 나는 것을 본 앨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찻잔을 톡 쳤다.
피어오르던 김이 사그라들며 살얼음이 생겼다.
추위와 더위를 잊는 경지는 이미 진작에 넘었지만 그래도 여름에는 시원한 것을 마셔야 맞지 않겠는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차가운 레몬차를 마신 앨런이 말했다.
"한가지 더 부탁드리자면. 제가 오늘 가야 할 곳이 있는데."
르메인이 앨런을 쳐다봤다.
앨런의 표정이 매우 부드럽게 변했다.
"제 걸음이 다소 시끄럽더라도 그러려니 하시지요."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그 얼굴에 웃음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