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너무 멀리 왔으니 (1)
첫 시작은 시아였다.
쫓기고 있던 것을 도왔다.
그 후에는 시아를 잡으려다 칼리안을 공격한 남자를 체포했다. 그랬더니 남자의 입에서 푸른 솔새의 이름이 나왔다. 그리고 푸른 솔새는 또 다른 이름을 내어 놓았다.
헤일 라트란.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의 귀결점이 된 남자를 떠올린 칼리안이 빗속을 질주했다.
찬 비를 맞으니 생각이 조금씩 정리가 됐다. 그러다보니 신물을 사 모으는 이유를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여전히 마력이 흘러나오는 반지를 슬쩍 쳐다본 칼리안이 말을 전했다.
- 란델이예요. 텐실에 신물을 가져다 바치면서 란델과의 끈을 이어 둔 겁니다. 플란츠의 편에 서 있었으니 당연히 신물을 사 모으는 것은 비밀리에 진행해야 했겠죠. 그러니 굳이 그렇게 비싼 값을 주고 세크리티아의 세작을 통해서 신물을 구매한 겁니다.
칼리안의 말에 앨런이 허허 웃는 것이 느껴졌다.
- 란델과의 끈을 이어둔 채로 플란츠 편에 발을 올려놓고 뒤로는 저에게 선물을 보내고. 카이리스 정보까지 세크리티아 세작에게 팔고 있었어요.
- 그것 참 대단한 작자로군요.
- 일단은 성으로 빨리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란델의 편에 서 있는 자라면 칼리안에게는 적일 수 있다. 때문에 불안감이 들었다.
- 석찬 자리에서 제가 재웠을 때, 취해 있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워낙 숨기는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던가?
혹시라도 칼리안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 떠보려고 혹은 다른 꿍꿍이로 술에 취한 척을 했었다면.
- 멀쩡한 사람을 재워버리고 나오셨습니까.
- 취해있지 않았다면 그렇게 한 셈이 되네요.
칼리안은 이미 달리고 있는 말을 채근했다.
- 말이 왜 이렇게 발이 느린지 모르겠습니다. 레이븐이었다면 이미 도착했을 텐데!
- 천천히 달리십시오. 그러다 목 부러집니다.
태평하게 걱정해주는 앨런의 말을 들은 척 만 척, 칼리안은 계속하여 말의 속도를 올려갈 뿐이었다.
그 사이 앨런은 자신의 저택에 도착하여 노래하는 조각상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주방에서 커피 한 잔을 내리기 시작했다.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검은 커피의 향을 여유롭게 음미하고 있으려니 칼리안의 말이 다시 전해져왔다.
- 그런데, 여기 있다는 그 신관 이름이 무엇입니까?
- 말콤 체티쉬. 집사장일 것이라고 르메인이 그러더군요.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대충 훔쳐낸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집사장이라면 신관에 대해 물었을 때 옆에서 어쩔 줄을 몰라하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 라트란 백작이 무례해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라트란 백작이 거짓말을 하고 있어서 그랬나 봅니다.
그에 대해서는 따로 해줄 말이 없던 앨런은 다른 질문을 건네왔다.
- 그 솔새인가 하는 세작 입단속은 잘 해두신 겁니까?
칼리안은 앨런에게는 보이지도 않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 네. 라트란까지 와서 카이리스 왕자를 몰래 만났다는 것이 세작들 사이에 알려지면 결코 좋을 것이 없으니 입은 알아서 잘 닫을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칼리안이 달리는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 영주성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비를 뚫고 달려온 말의 몸에서 더운 김이 풀풀 났다.
말을 데려갈 기사들이 나오기를 기다리자니 마음이 급했다. 때문에 칼리안은 뒤따라온 키리에와 유란에게 말 고삐를 넘겼다. 그리고 주변의 시선이 없는지 더더욱 주의하며 방으로 돌아왔다.
* * *
"왕자님께서는 지금 산책 중이시라 얘기했는데. 너무 끈질긴 것이 아닌가?"
방에 돌아온 뒤 클린 마법으로 비와 흙을 뒤집어 쓴 몰골, 그리고 창틀과 외벽의 진흙자국을 해결하고 나니 방문 밖에서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소리가 들렸다.
있는대로 날카로워진 얀의 목소리였다.
"백작께서 석찬에서 있었던 불손한 모습에 대해 꼭 좀 사과를 드리고 싶으니 밤이 가기 전에 왕자님을 뵙고 싶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언제 도착하시는지 만이라도······."
그리고 이런 말이 뒤를 이었다. 집사 말콤이었다.
'저 자가 신관이었단 말이지.'
칼리안이 산책을 나갔다 둘러대는 얀에게 말콤이 끈질기게 들러붙고 있었다. 아마도 헤일 라트란이 칼리안에게 사과를 하고 싶다며 이 시간에 말콤을 보낸 모양이었다.
"불손함을 덮겠다는 태도가 아니지 않나. 백작의 집사가 언제부터 왕자님의 걸음을 추궁하게 되었지?"
집사를 질책하는 얀의 목소리가 아주 냉랭하게 바뀌어 있었다.
일단은 저 집사를 먼저 돌려보내야 했던 칼리안은 재빨리 로브를 벗어 문 뒤로 숨겼다. 그리고 셔츠 단추 하나를 풀고 머리도 적당히 흐트러뜨렸다.
그 후에는 잔뜩 화가 난 표정을 만들어낸 뒤 문을 벌컥 열며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 도저히."
없다던 이가 불쑥 나오니 말콤이 매우 놀란 얼굴을 했고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쉴 수가 없는데."
어쩐지 지금 자신이 플란츠를 따라하고 있다는 듯한 불쾌한 느낌이 들었으나, 불청객을 쫓는 것에는 이만한 것이 없을 터였다.
"왕자님. 그것이 아니라······."
말콤이 안절부절 못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것을 듣지 못한 척. 칼리안이 얀을 질타하듯 말했다.
"넌. 적당한 핑계를 대어 물리라 했더니 그것 하나를 못하고."
"죄송합니다, 왕자님."
눈치 빠르게 사과하는 얀을 본체만체한 칼리안이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
- 쾅!
말콤이 사과하며 잰 걸음으로 물러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뒤 얀이 안으로 들어왔다.
"저 집사 외에 찾아온 사람이나 수상한 것은?"
"방금 왕자님께서 쫓아내주신 집사가 다입니다. 그 외에 수상한 것은, 창문 타고 나갔다가 창문 타고 들어온 어떤 왕자님이 있었는데요."
문 뒤에 둔 로브를 주워 든 얀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창문을 뛰어넘는 모습 때문에 꽤 놀랐었는지, 그 목소리에 가시가 가득했다. 칼리안이 얀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그렇게 됐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넌 왜 그렇게 화를 내고 있었어. 궁에서는 안 그랬잖아."
"왕궁에는 저 정도로 선을 넘는 이가 없으니까요."
이렇게 대답한 얀이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일러바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왕자님께서 나가시기 전에 말씀드렸던 대로 얘기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아 잠시 산책가셨다고요. 그런데 그 집사 정말 무례하더군요. 언제 어디로 나가셨는지 언제 오시는지 계속 묻던데요. 그러다 왕자님께서 쑥 나오신 거고요."
한 가지가 의심 되니 백 가지 행동에 다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보니 얀이 전한 말이 또 이상한 것이다. 칼리안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내가 언제 오는지를 계속 물었다고?"
"네. 언제 오시는지를 더 알고 싶어 했습니다. 석찬의 일에 대한 사과를 드리고 싶다면서요."
"내 뒤를 캐려던 심산이었다면 언제 어디로 나가는지를 물어보는 것 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언제 오는지를 더 궁금해한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되네."
칼리안은 더 이상의 말 없이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전할 말을 마친 얀은 칼리안이 비에 푹 젖어 들어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말했다.
"저는 그럼 목욕물을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곧 칼리안은 자리에 앉아 버릇처럼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여전히 연결을 끊지 않고 있던 앨런은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텐데도 말 없이 기다려주었다.
한동안 그렇게 오도카니 앉아있던 칼리안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앨런을 불렀다.
- 스승님.
- 네. 말씀하시지요.
앨런의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 라트란 백작이 일단 취하지 않았던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취한 상태에서 마법으로 재웠다면 벌써 일어날 리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 집사가 찾아와서는 제가 언제 오는지를 계속 물었다 합니다. 그러니까 라트란 백작은 제 뒤를 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가 뒤를 캘까 경계한 것 같습니다.
백작이 취한 척을 해 가며 자리를 피하고 싶을 이유는 딱 하나였다.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 푸른 솔새가 술집에 있던 것은 제가 아니라 라트란 백작을 기다리기 위해서였을 것 같습니다. 신물 거래 날짜가 오늘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백작은 취한 척 자리를 피하려했고요. 그런데 일어났을 땐 제가 이미 밖으로 나갔다 하니 혹시 제가 뭔가 눈치챈 것이 있을까봐 그렇게 꼬치꼬치 물은 것이고요.
칼리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둥, 모시게 되어 영광이라는 둥, 입에 꿀을 그렇게 발라대더니. 그 시간부터 이미 석찬에서 어떻게 빠져나갈지를 궁리하고 있었을 것이 아닌가.
어찌됐건 그냥 넘어갈 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푸른 솔새의 말이 맞다면 세작에게 카이리스의 정보를 팔아가며 돈을 벌고 그렇게 번 돈으로 텐실에 좋은 일을 하고 있는 놈이니까.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칼리안이 앨런에게 말을 전했다.
- 내일도 비가 올테고 저는 발이 묶였으니. 세작에게 카이리스 정보를 팔고 있는 박쥐 좀 잡고 가야겠습니다.
그 말에 앨런이 곧바로 물었다.
- 도울 일이 있겠습니까?
- 내일 일정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칼리안 역시 이렇게 곧바로 되물었다.
항상 그랬지만 칼리안의 말이라면 일정이 있어도 모두 취소할 앨런이었다. 때문에 앨런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 르메인을 만나기로 했습니다만 미루면 됩니다.
지금 누가 누구때문에 누구와의 약속을 미루겠다는 건지. 칼리안이 아연한 표정으로 우려 섞인 말을 했다.
- 스승님 그러다 정말로 리베른으로 추방되실지도 몰라요.
이번에는 앨런이 웃었다.
칼리안이 못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 오래 걸릴 일 아니니 전하 먼저 뵙고 어디 좀 다녀와주세요.
- 알겠습니다. 무엇을 하면 될는지요?
- 라트란 백작의 집에 사람을 보내주세요.
카이리시스에 있을 헤일의 집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성에 헤일 외에는 없었으므로 나머지 가족들은 분명 카이리시스에 머물고 있을 터였다. 그 집에 사람을 보내 증거가 있는지를 살펴봐 달라는 의미였다.
- 그리고 브리센 상단에 가주세요.
그 말에 앨런이 굉장히 재밌어하며 말했다.
- 라트란 백작이 구리 광산을 소유하고 있었으니 브리센 상단에 가서 구리 시세나 물어보는 척 하고 돌아오면 되겠습니까?
앨런이 수도에서 무언가 조사를 하는 듯한 낌새가 있으면 헤일 측에서도 움직임이 있을테니 그것을 노리자는 말이었다.
말의 의미를 잘 알아들은 앨런에게 칼리안이 대답했다.
- 네. 맞습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그리고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으로 전서구 한마리 보내주시면 됩니다. 라트란 성으로요.
- 네. 말씀하시지요.
곧 칼리안이 앨런에게 편지 내용을 일러주었다. 편지에 들어간 어떤 이름을 들은 앨런이 매우 크게 웃었다.
* * *
그날 밤은 참으로 길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앨런과의 대화를 마친 칼리안은 목욕을 잠시 미루고 다시 한번 감옥에 붙들린 남자를 찾았다. 그리고 비로소 남자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노튼. 노튼 라미레즈다."
그렇게 말하는 노튼은, 비록 한쪽 팔은 사라졌지만 오후보다는 많이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빠르게 괴사가 진행된 팔을 살려낼 수 없었다는 것을 그래도 잘 받아들인 듯 보였다.
하루 걸러 중상자가 나오는 광산의 경비병으로 일을 해왔기 때문일지, 사형수의 몸이 되었기 때문일지는 칼리안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노튼은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냐는 듯한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다 칼리안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어떤 불안한 생각을 떠올렸는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내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겼······ 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꼬박꼬박 반 말을 하더니 아내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이번에는 이렇게 물어오는 노튼이었다.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튼에게 그런 되먹지 않은 협박을 했을 만한 이들은 이미 머리가 사라졌으니까. 푸른 솔새는 아마 노튼의 아내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를 수도 있었다. 노튼의 아내는 푸른 솔새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였으니 말이다.
"그 쪽은 걱정 안해도 돼."
"그럼 무슨 일로······."
칼리안이 노튼을 보며 말했다.
"이대로 있으면 넌 며칠 뒤에 사형이야."
처음 보았을 때는 어깨를 망가뜨리고 두 번째에는 팔을 가져간 칼리안이 세 번째로 찾아와서는 넌 이제 곧 죽을 것이라는 말 따위를 꺼내놓고 있었다.
그러니 노튼의 표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화가 난 노튼이 뭐라 입을 열기 전, 칼리안이 말을 가로챘다.
"날 도와."
노튼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칼리안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하면 치료받을 수 있게 해 줄 테니."
그것은 칼리안이 오후에 하고 갔던 말과 비슷했다.
다만 이번에 칼리안이 말한 것은 팔을 낫게 해 준다는 뜻이 아니었다. 치료 받을 필요가 없는 사형수라는 꼬리표를 떼어 주겠다는 소리였다.
노튼은 곧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자신의 팔을 쳐다보았다. 칼리안은 답답해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나한테 칼 뽑아든 대가로 그 팔 가져왔으니, 풀어주겠다는 소리야. 다른 영지에서 살 수 있게 조치도 해 주고 적당한 집과 농사지을 땅도 마련해 줄 수 있어."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후한 조건이 걸리는 거요?"
"위험할 수 있어서."
노튼이 실소하며 대답했다.
"시키시오. 뭘 하면 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