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1화 (42/527)

제9장. 확인해 (5)

밤. 비. 술집.

썩 어울리는 조합이 아닌가. 칼리안은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어울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이 밤에 빗속을 뚫고 술집을 찾은 열 다섯의 소년이려나. 아니면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이려나.

분명 푸른 솔새의 일행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들어선 곳에서 아주 의외의 것을 발견한 탓에 로브 아래로 보여지는 입술이 언젠가와 같이 호선을 그렸다.

"내가 너무 마음이 급했나보네."

칼리안은 바 안쪽에 선 채로 유리컵을 닦고 있던 바다 색 머리의 여자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누가 보아도 그 외모를 칭송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이다. 여자는 이런 술집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어찌 보면 실리케보다도 훨씬, 아름다웠다.

그러니 이상하지 않은가.

저런 아름다운 여자가 운영하는 술집에, 비 내리는 밤에.

손님은 아무도 없고 피 비린내가 진동을 하니.

긴 속눈썹의 여자가 컵을 내려놓고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칼리안이 그녀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밖에 있는 이들은 그저 나를 따라온 것 뿐이니."

"관계 없는 이들에게 칼을 보낼 만큼 매정하지는 않으니 걱정 마세요. 뒷처리하기 귀찮은 분들이기도 하고요."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모습이었으므로 밖에 남겨진 유란과 키리에를 걱정하여 꺼낸 말에 여자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칼리안의 입매가 씰룩였다.

"돈 궁한 남자와 어린 엘프에게 활을 보낼 정도로는 매정한 것 같았는데. 다행이네."

"관계 있는 이들이 되었으니까요."

여자가 다시 웃으며 칼리안의 말을 받았다.

칼리안이 여자의 뒤에 널려있는 일곱 구의 시체를 슬쩍 쳐다봤다. 낮에 칼리안의 일행을 향해 활을 쏘았던 이들과 수가 같았다. 칼리안의 시선을 따라 같은 곳을 보던 여자가 말했다.

"그들도 마찬가지였고요."

푸른 바다색 머리의 여자, 푸른 솔새가 그렇게 말했다.

* * *

오밤중에 자신을 찾아온 앨런을 보며, 르메인은 자연스럽게 안경을 꺼내 썼다. 또 서류뭉치를 꺼내놓겠거니 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을 본 앨런이 웃으며 말했다.

"그저 궁금한 것이 있어 온 것이니 편히 계시지요."

"그럴 리가 없는데."

이제 조금씩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기 시작한 르메인을 향해 앨런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신임을 많이 잃었군요."

그제야 르메인이 안경을 벗고 소파로 갔다.

이제는 권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맞은편에 앉는 마법사를 보며 르메인이 말했다.

"궁금한 것이나 묻자고 이 시간에 찾아온다니. 왕관 맡아주는 사람 취급에서 이제는 정보원 취급이 되었군."

늦은 시간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대한 불만이 숨김 없이 들어간 말이었음에도 앨런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일전에 전하께서 제가 궁금한 것에 대한 답을 들여다보고 계셨던 것이 생각났지요. 그러니 잘 아는 분을 코 앞에 두고 굳이 어렵게 확인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과거 앨런이 마법사단을 만들자며 르메인을 찾았을 때 르메인이 보고 있던 서류가 바로 신관들의 거주지와 관련된 것이었다. 리베른의 국왕은 그런 것은 직접 보지 않는다고 핀잔을 주었던 기억이 난 덕분에 그 길로 왕궁으로 온 앨런이었다.

"텐실의 신관이 카이리스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여 왔습니다."

르메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필 지금 시점에 텐실의 신관에 대해서 묻는 것에 대한 반응이었다.

"경이 뭘 알고 묻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우연히 궁금해진 것인지 모르겠군."

이번에는 앨런의 미간이 움직였다.

"텐실의 신관과 관련된 다른 일이라도 있습니까?"

"안 그래도 텐실의 사신들이 그 일로 왔었네."

텐실에서 갑작스럽게 사신이 왔다는 것은 앨런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 방문 이유는 모르고 있었지만.

르메인이 책상 쪽을 잠깐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카이리스에 열 네 명의 신관이 있는데 이곳 왕궁에 있는 한 명을 제외하고 전부 찾아서 데려가겠으니 더는 신관을 요구하지 말라 하더군."

물론 그 작고 힘 없는 텐실의 사신들이 카이리스 씩이나 되는 나라에 와서 저렇게 공격적인 말을 했을 리는 없었다. 돌려돌려 저리 말했다는 소리겠지만 아무튼 카이리스 입장에서 기분 좋을 상황은 아니었다.

"애초에 카이리스에서 텐실에 신관을 요청했던 적이 없었는데 그런 식으로 나오니 불쾌한 일이지."

심지어 왕궁에 있는 치유사도, 텐실의 공주 아이샤와 르메인의 혼인 기념으로 알아서 보내주었던 이였다.

신관들이 부리는 치유력이 매우 효과가 좋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신관 좀 보내달라며 카이리스에서 텐실에 약한 소리를 해야 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런 것을 내어 놓으라며 윽박지를 르메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런 저런 것을 기념한답시고 제 멋대로 신관들을 보내놓고 그간 카이리스에서 강제로 신관을 뺏어다 쓰고 있던 것처럼 말을 하니 뭐라 할 말이 없더군."

르메인의 말을 듣던 앨런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텐실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는 르메인의 모습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며 구구절절 일러바치는 아이같았기 때문이다.

"신물이 어느 정도로 부족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퍽 어려워졌나 봅니다. 상황은 드러내기 싫고 신관은 데려가야 되겠고."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았네."

"그래서 어찌 하셨습니까?"

"신관들을 찾아다 전부 목을 매달까 했지만."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앨런도 잘 알았다. 그 순간 텐실과의 전쟁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르메인이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 전쟁을 치뤄봐야 브리센만 이득이니 그럴 수는 없고. 란델을 보아 한 번은 참겠다 했네. 따로이 관리하고 있지 않으니 알아서 찾아 데려가라 하였지."

"잘 하셨습니다. 아무튼 저에게는 알려주시지요. 제가 아니라 칼리안 왕자님께서 궁금해하시는 부분이니."

르메인의 미간에 또 주름이 졌다. 지금 칼리안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르메인도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짓는 표정이었다.

"이미 신관이 있는 곳에 도착을 했으면서 굳이 그것을 왜 묻지?"

"어느 곳을 말씀하십니까?"

앨런은 갑자기 어딘가 찝찝한 기분을 느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칼리안은 분명 주변에 신관이 없는 것처럼 물어왔었다.

"라트란. 텐실이 사막과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텐실에서 라트란 백작에게 신관을 선물했네. 지금이야 사이가 틀어졌다지만 그땐 란델과 라트란 백작 사이가 꽤 좋았으니까. 굳이 한번 보낸 신관까지 돌려받지는 않은 듯 하던데."

그 대답을 들은 앨런이 한동안 말이 없었다. 르메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찌푸려졌던 표정을 금세 되돌려놓은 앨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만들어낸 핑계를 꺼내들었다.

"아닙니다. 왕자님의 시녀 아이가 치유사이니 신관에게 한번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지요."

"아닌 것 같은데."

앨런을 쳐다보는 르메인의 얼굴이 그리 좋지 않았다. 앨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정말 신임을 잃었나 봅니다. 이렇게 믿질 않으시니."

"고작 그런 것을 묻자고 이 시간에 국왕의 집무실을 찾아왔다는데 그 말을 어느 누가 믿겠나."

하긴, 맞는 말이다. 앨런이 핑계를 거두고 솔직히 말했다.

"자세한 것은 사실 저도 잘 알지 못하는지라 내일 다시 와서 말씀드려도 될는지요? 일단 이 이야기를 왕자님께 전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아무튼 라트란 백작이든 누구든 카이리스의 왕자에게 해를 입힐 만큼 삶이 무료한 인사는 없을 것이니 걱정은 거두시지요."

왕궁에서 나가야 칼리안에게 내용을 전달할 수가 있었으니 시간을 끌어야 좋을 것이 없었다. 적당히 타협하기로 한 르메인이 마뜩치 않다는 얼굴로 그리하라 답했다.

* * *

평소 즐겨하던 남장을 그만 두고 서 있는 푸른 솔새를 보던 칼리안이 서두르지 않는 움직임으로 로브를 벗어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낮에 누가 내 일행을 공격하기에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공격을 한 줄 알았는데."

"알고 있었죠. 말을 해 두고 갔었는데. 경솔했어요."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같은 것을 본 푸른 솔새가 대답했다.

푸른 솔새는 칼리안 일행을 공격하지 말도록 이른 뒤 루카라는 엘프를 따라간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일행이 칼리안 쪽으로 활을 쏘도록 했고 덕분에 저렇게 시체 일곱 구가 되었다는 소리였다.

상황을 파악한 칼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그럼 이제 나도 관계 있는 사람이 된 건가?"

푸른 솔새가 칼리안을 공격할 생각인지를 묻는 말이었다.

"그렇다 하려고 했는데······."

푸른 솔새가 한동안 칼리안을 쳐다보았다. 곧, 푸른 솔새가 숨겨두었던 검에서 손을 뗐다. 그와 함께 푸른 솔새를 향하던 칼리안의 날카로운 살기가 사라졌다. 푸른 솔새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칼리안을 보며 말했다.

"쉽지 않으려나."

칼리안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네가 따라갔다던 엘프는 이미 죽었나?"

"숲의 길로 도망치는 엘프는 쫓기 힘들더군요. 다시 쫓아갈지 포기할지 머리가 아프네요. 그래서 돌아와보니 더 머리 아픈 일이 생겨 있고."

칼리안이 목을 잃고 죽어 있는 이들을 다시 쳐다봤다. 똑같이 고개를 돌려 같은 것을 한번 더 쳐다본 푸른 솔새가 말했다.

"살기 보내는 왕자님이나 기사들이 쫓아다니는 것은 별로 달갑지가 않은데. 서로 별달리 해를 입은 것도 아니니 돌아가 주시겠어요? 그럼 저도 꼬마에게서 손을 뗄게요."

"기껏 찾아와서 만났는데, 그냥 돌아가 달라니."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몇 가지만 묻고 말해주면 돌아갈게."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던 푸른 솔새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궁금한 것까지는, 적당히 대답해 드릴게요."

"신관도 아니면서, 신물을 왜 찾은 거지?"

칼리안의 질문이 곧바로 튀어나왔다.

"요즘 제법 비싸니까요."

"그 말은 네가 신물을 팔고 있었다는 소리같은데."

푸른 솔새가 유리컵에 술을 한잔 따라 마셨다.

짙은 알콜 냄새에 인상을 살짝 찌푸리던 푸른 솔새가 대답했다.

"저도 본업만 가지고는 조금 아쉬울 때가 많으니까요."

카이리시스에서 세작 노릇을 하다가 손에 넣은 신물을 팔기 위해 이 곳까지 왔다는 소리였다.

그때, 칼리안의 손가락에서 미약한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앨런이 찾는 것을 안 칼리안이 반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곧바로 앨런의 음성이 들려왔다.

- 왕자님, 라트란 백작에게 신관이 있다더군요.

- 이미 신관을 데리고 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신관에 대해 물었을 때 있던가 없던가, 라며 되도 않는 말을 지껄이더니.

- 일단 알겠습니다. 그런데 스승님. 신관들이 신물을 많이 씁니까? 몇 번이고 계속 사야 할 만큼요.

- 아닙니다. 한 두 개면 십 년은 쓸 겁니다.

푸른 솔새는 계속해서 신물을 팔아온 것처럼 말했다.

신관이 직접 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고개를 든 칼리안이 푸른 솔새를 향해 다시 물었다.

"신물을 사주는 사람이 지금 라트란에 있나? 굳이 이런 시골에서 팔아야 할 이유가 없는데. 카이리시스라면 신관들을 찾기가 더 수월할테고."

"그 구매자만큼 값을 많이 쳐주는 이가 없거든요. 본래부터 연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고."

'본래부터 세크리티아의 세작과 연이 있는 사람이라?'

"본래는 다른 일로 세크리티아의 세작과 연결이 있었고, 그러다 신물을 사고 파는 관계가 되었다는 말 같은데."

그것이 칼리안에게는 누군가 푸른 솔새에게 카이리스의 정보를 팔아오다가 이제는 정보를 사는 대신 신물을 구매하고 있다는 말로 들렸다.

칼리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곧 칼리안이 마지막 질문을 건넸다.

"그 구매자. 헤일 라트란 백작이 맞나?"

"적당한 질문이 아닌 것 같네요."

푸른 솔새가 생긋 웃었다.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긍정을 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 헤일 라트란. 데리고 있는 신관을 숨기고, 쓰지도 않는 신물들을 비싼 값에 사 모으면서 세크리티아 세작과도 연이 있는 자입니다.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요.

- 그렇군요. 행보가 범상치 않은 듯 하니.

- 네. 제가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칼리안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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