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0화 (41/527)

제9장. 확인해 (4)

시끄럽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아니, 자네는 어떻게 그런 명예롭지 못한 행동을 한단 말인가!'

그랬더니 그 천인공노할 인사가 하는 말이 뭐였는지 아십니까?"

술 취한 놈은 딱 싫다. 취해서 시끄러운 놈은 더 싫다.

칼리안이 불편한 기색을 굳이 감추지 않으며 앞에 앉은 헤일을 쳐다봤다.

저녁을 먹은 뒤, 칼리안을 공격했던 남자가 저지른 짓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을 꼬치꼬치 물어오기에 그 입을 좀 막을 겸 꼬투리 잡을 거리를 좀 만들어 볼 겸 술이나 한잔 하라 권했더니 저 지경이 됐다.

팔을 뻗어 와인잔을 집어들려던 그가 헛손질을 했다. 덕분에 와인잔이 옆으로 넘어져 붉은 술이 하얀 테이블보를 적셨다.

"아, 왕자님! 제가 좀 취했나 봅니다."

알고는 있으니 다행이다.

그래. 누굴 탓하겠는가. 칼리안이 잘못했다.

테이블에 흘러 넘친 와인이 바닥으로 한 방울씩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보고 있으려니 괜스레 다른 모습이 연상됐다.

'그러고 보니 그 자의 이름도 묻지 않았네.'

유란의 검에 결국 한쪽 팔이 잘려나간 남자를 잠시 떠올리던 칼리안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헤일의 말은 끝없이 이어졌다.

"아무튼 그 뒤로 세 달이 넘도록 이렇게 연락을 한 번 안합니다. 그러니 왕자님께서는 결코 그런 자와 상종을 하시면 안 될 것입니다."

시끄러운 것으로도 모자라 이 근처 어딘가의 영주를 침이 마르도록 험담하는 헤일을 보던 칼리안이 혀를 쯧 찼다. 그리고는 헤일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이곳이나 인근에 텐실의 신관이 방문할 예정이 있습니까."

굳이 궁금해서 묻기보다는 저러다 행여 저 입에서 르메인 험담이 나오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꺼낸 말이었다.

그 말에, 비로소 말을 멈춘 백작이 얼큰해진 눈으로 기억을 뒤져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있던가······. 없던가······."

대답 한번 가관이다.

칼리안이 실소했다. 헤일의 곁에 선 집사가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보였다. 이 곳에 오는 길에 칼리안이 공격을 당한 것도 모자라 칼리안의 앞에서 술에 취하질 않나, 왕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 내어 놓는 것이 '있던가 없던가' 라니.

"텐실 신관들 콧대가 하늘을 찔러대는데 이런 시골 구석에 올 리가······ 있었던가······. 없었던가······."

쐐기를 박아 넣듯, 헤일이 다시 이렇게 말했다. 집사는 아예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고 칼리안은 드러나지 않게 웃었다.

'이 정도면 내일 내가 방에서 안나와도 의심하지 않겠네.'

칼리안이 헤일의 꼬투리를 잡으려던 이유는, 곧 이 성에서 몰래 나갈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일 아침까지 들어오지 않는다면 헤일이 의심할 것이 분명했으니 헤일의 저런 무례한 태도에 화가 나서 만나주지 않은 것으로 꾸미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성에서 몰래 나가야 할 이유는 바로, 조금 전 만나고 왔던 남자의 입에서 튀어 나온 이름 때문이었다.

- 푸른 솔새.

세크리티아 국왕인 데블란의 세작.

칼리안이 기억하는 푸른 솔새의 임무는 카이리스와 텐실의 관계를 감시하는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감시였지 직접 텐실 신관을 만나야 하는 정도의 임무가 주어졌던 적도 없었고 그런 일을 했다고 보고 받은 적도 없었다.

뿐만인가?

푸른 솔새가 담당한 지역은 이런 시골이 아니라 카이리시스였다. 텐실 신관의 그림자도 찾기 어려운 이런 곳에서 카이리스와 텐실의 관계를 어떻게 감시하겠는가.

물론 베른도 아닌 칼리안이 지금 세크리티아 세작이 자신의 활동 범위에서 벗어난 이유 따위가 궁금해서 이 일을 알아보려 한 것은 아니었다.

푸른 솔새는 베른과 약간의 친분이 있던 이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푸른 솔새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 한번도 임무에 실패한 적이 없었지.'

그런 솜씨 좋은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카이리스의 왕자를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으니 그것을 감수하고 칼리안의 일행에게 활을 쏠 만큼 중요한 일이 대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왕자님."

잠시 푸른 솔새에 대해 생각하던 칼리안을 얀이 작게 불렀다.

얀이 보고 있는 방향을 쳐다보니, 어깨가 조금 젖어 있는 아르센이 식당으로 찾아온 것이 보였다. 그가 다른 말 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나갈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는 제스처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알 리 없을 헤일이 앞에서 또 주절거렸다.

"텐실 신관들은 아주 속이 시커먼 놈들입니다. 제가 만나보지 않았습니까? 텐실 왕국 사람들도 그렇고 신관들도 그렇고. 다들 뒤집어 보면 먼지 없는 것들이 없습니다."

칼리안이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헤일을 대신해 집사의 허리가 숙여졌다.

칼리안은 마치 불쾌하다는 것처럼 머리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곧 칼리안의 입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슬립]

그와 함께 계속 중얼거리던 헤일에게서 코 고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든 칼리안이 천연덕스럽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주······."

집사의 머리는 이제 아예 바닥에 닿을 기세였다.

"가지가지 하시는군."

칼리안이 무릎 위에 펼쳐둔 냅킨을 들어 테이블에 탁 올려놨다. 얀이 얼른 다가와 의자를 빼주며 집사를 향해 질책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칼리안은 고개를 조아리는 집사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뒤돌아 나왔다.

방으로 돌아가는 칼리안의 걸음이 매우 빨랐다. 아르센이 그의 뒤로 얼른 따라 붙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새, 잡았습니다."

지금 아르센이 잡았다 하는 것은 전서구였다.

다행스럽게도 칼리안이 처음 이 도시에 들어올 때 시아에게 로브를 씌우지 않았었다. 그 뿐인가? 칼리안의 눈에 들고 싶어하던 헤일이 꽤나 떠들썩하게 칼리안을 맞이했었다.

그러니 푸른 솔새 본인은 아니더라도 추격자 무리 중의 일부는 시아를 보았을 것이고, 이 도시 안에 머무르면서 푸른 솔새에게 상황을 전달하리라고. 칼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칼리안은 마법사 길드에 아르센을 보냈다.

이런 비와 어둠을 뚫고 날아가는 이상한 새가 있다면 전부 다 잡아달라고 전했다. 그리고 아르센은 그 새를 잡았다고 알려주고 있는 중이었다.

생각보다 빠른 결과에 칼리안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디입니까."

전서구가 출발한 지점을 묻는 질문이었다. 아르센이 곧바로 답했다.

"레드위크 거리입니다. 그리 멀지 않습니다. 라우첼 경에게 위치를 전해두었습니다. 그리고, 내성 밖으로 나가시면 기사들이 말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새를 찾으라고만 했지 그 밖의 것은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아르센의 일처리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수고했어요."

그 후 칼리안은 방문을 열었다.

방에 들어가 문을 닫기 전, 칼리안이 밖에 선 아르센을 향해 말했다.

"헤르츠 경. 밤에 또 놈들이 찾아올지 모릅니다. 그러니 부탁할게요."

"걱정 마십시오, 왕자님."

아르센이 매우 진지한 얼굴로, 아주 정중하게 대답했다.

아르센이 돌아간 뒤, 방 문을 닫은 칼리안은 곧바로 반지를 들어 마력을 불어넣었다.

남자를 만난 뒤부터 틈틈이 시도했으나 계속 연결이 되지 않았었다. 이번에도 자리에 없을까 하고 살펴보는데 반지가 잠시 빛나며 앨런의 말이 머릿속에 들렸다.

- 라트란에는 잘 도착하셨습니까.

- 스승님!

칼리안의 얼굴에 모처럼 빛이 돌았다.

- 가는 걸음이 편치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앨런은 앨런이다.

목소리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을 이런 대화에서도 칼리안의 낯빛을 읽는다. 칼리안은 재빨리 시아를 만난 뒤부터 푸른 솔새를 알게 된 경위까지를 모두 전했다.

그러다 카이리시스의 새 판매점에 갔던 일을 이제야 알리게 되는 바람에 잠시 혼이 났다.

- 계속 그렇게 칠락팔락 돌아다녀 보시지요. 늙은이는 그만 따뜻한 남쪽나라로 요양이나 가버릴 터이니.

- 듣던 중 무서운 소리네요.

칼리안이 거추장스러운 재킷을 벗으며 웃었다. 앨런의 말이 이어졌다.

- 그러니까 지금 하신 말씀이,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찾는 물건과 얽혀들어서 이제는 왕자님 목도 간당간당하다. 이런 뜻이 맞으십니까?

- 아. 제 목은 괜찮습니다만.

칼리안의 대답에 앨런이 웃는 것 같은 느낌이 전달되어 왔다.

- 쫓기는 자의 목이 과연 아직 붙어있을까 하는 걱정은 됩니다. 제가 곧바로 따라 나설 처지가 되지 못했습니다.

칼리안이 창 밖을 쳐다봤다.

비는, 여전히 사납게 내리고 있었다.

- 그래서 지금 나가시려는 겁니까?

- 네. 그보다 스승님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 말씀하시지요.

- 라트란 인근에 텐실 신관이 있는지. 그것을 좀 알아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세작이 신관을 만나 확인할 것이 있다고 했다네요.

얀이 건네주는 로브를 입으며 꺼낸 칼리안의 말에, 앨런은 다른 의문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 그리하지요. 내일 아침까지는 확인을 해두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나니 키리에와 유란이 방으로 들어왔다. 키리에는 칼리안이 바르샤 거리에서 구매했던 두 자루의 검을 모두 들고 온 상태였는데 칼리안은 그 중 처음으로 샀던 가벼운 검을 받아 들었다. 앨런과의 대화를 마무리 지은 뒤 반지에서 마력을 뺀 칼리안이 얀에게 말했다.

"쉬고 있어. 아마 찾지 않겠지만 혹시 라트란 백작이 나 어디 갔는지 물어보면 적당히 잘 말해줘."

얀에게도 역시 상황을 알려두었다. 얀이 걱정 말라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주사나 부리는 라트란 백작의 무례함에 화가 나셔서 바람쐬러 나가셨다 하겠습니다. 내일도 알아서 잘 거절할게요."

이보다 더 좋은 핑계가 또 있을까. 칼리안이 씩 웃었다.

"딱 좋네."

얀은 그래도 예전 만큼 걱정하지는 않는 표정이었다. 유란도 있고 키리에도 있고. 시아를 만났을 때의 일을 보고 잔소리는 했지만 칼리안 스스로도 어느정도 제 몸을 챙길 만큼은 된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돌아서는 칼리안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창 밖으로 몸을 날렸다.

펄럭, 하고 검은 로브 자락이 창문 아래를 스쳐지나가 곧 사라졌다. 그러더니 키리에와 유란이 칼리안의 뒤를 따라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칼리안의 방은 3층에 있었다. 얀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아무리 그래도 문으로는 나갈 줄 알았지!'

* * *

비와 어둠에 숨어 내성 밖으로 나간 뒤 유란이 어느 한 지점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저기, 기다리고 있군요."

유란의 말에 고개를 돌린 칼리안의 눈에 미리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지그프리드 기사들이 보였다. 기사들이 말에서 내려 다가오더니 각자 타고 있던 말의 고삐를 셋에게 건넸다.

종일 행군에 지쳐있을 본인들의 말이 아닌 영주성의 말이었다.

"수고했어요."

칼리안의 말에 씩 웃은 기사들이 몸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성 안으로 몰래 들어가 사라졌다. 돌아올 때는 또 다른 기사들이 말을 가지고 들어가기로 약속을 해두었다. 몇몇 기사들만 계속 안보이면 의심을 살지 모른다며 유란이 의견을 준 것이었다.

"이제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칼리안이 말에 오르자 전서구가 날아올랐던 위치를 아르센으로부터 미리 전해들은 유란이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나섰다.

어둠에 잠긴 거리는 매우 한산했다. 비가 와서 더 그럴 것이었다. 그런 거리를 몇 개쯤 지나친 뒤, 꽤 평범한 외관의 술집 앞에서 유란이 멈춰섰다.

도착했음을 알고 말에서 내린 칼리안이 로브를 깊이 눌러쓰며 말했다.

"5분만 있다가 들어와요."

일단은 먼저 들어가서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한 말이었다.

유란은 걱정하는 얼굴로, 키리에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칼리안은 망설일 것 없이 술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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