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확인해 (3)
라트리아 숲을 지난 곳에 중소 도시 라트란이 있었다. 그 규모 면에서는 중소 도시에 속하겠지만 알고 보면 인근의 구리 광산을 소유하고 있는 부유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크고 깨끗한 건물들이 즐비한 것이 멀리서부터 잘 보였다.
마치 아스트리샤 거리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 칼리안이 조금 감탄한 눈으로 도시 전경을 보고 있자 혹시라도 칼리안이 영주에게 호감을 가질까 우려한 얀이 입을 열었다.
"헤일 라트란 백작. 혹시 생각 안나십니까?"
"아, 그······."
이름과 작위가 붙으니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칼리안이 살짝 눈썹을 올리며 기억을 떠올렸다. 플란츠의 말실수로 상처 입은 막내 왕자에게 선물상자를 보냈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박쥐."
칼리안의 짧은 평가를 들은 얀이 씩 웃었다.
"그 전에는 란델 왕자의 편에 있었습니다만 6년 전 대사막의 전사들과 텐실의 전쟁이 있었을 때 곧바로 플란츠 왕자 쪽으로 전향한 자입니다."
대륙에 위치한 왕국이 넷임에도 카이리스가 바다를 가지지 못한 이유는 북쪽과 서쪽이 끝을 알 수 없는 사막으로 막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사막이라 불리는 척박한 그 곳에는 아직 제대로 된 형태의 나라가 없었다. 그 곳에서 유랑 생활을 하는 이들은 주신 세렌티가 아닌 그들의 민속신앙을 믿었다. 그것을 빌미로 나라도 작고 신력의 근원인 신물의 힘도 서서히 떨어져가는 텐실에서 북쪽 사막으로의 영토 확장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제대로 된 군대가 없으니 해 볼 만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벌어지자 순식간에 모여든 전사들의 전력이 생각 외로 강력했다. 괜한 짓을 했다가 궁지에 몰린 텐실에서는 란델과의 관계를 앞세워 카이리스에 조력을 요청했다. 당연히 실리케는 반대했고 그 덕에 텐실은 큰 손해만 보고 물러나야 했다.
"그래도 때를 보고 빠질 줄은 아는 박쥐네."
그런 자가 자신에게 한 발을 올리려 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그런 생각을 한 칼리안이 잠깐 웃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도시 입구 근처에 다다랐다.
입구까지 나와서 왕자의 일행을 기다리던 헤일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반가운 얼굴을 하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곧 칼리안이 레이븐의 속도를 조금 높여 일행의 가장 앞으로 나섰다.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헤일이 앞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칼리안 왕자님을 뵙습니다. 헤일 라트란입니다."
"반갑습니다."
칼리안의 대답이야 항상 같았다. 인사도 나눴으니 안으로 들어갈까 하고 있는데 헤일의 입이 다시 열렸다. 이어지는 말이 참으로 길고 길었다.
"이렇게 왕자님을 직접 모시게 될 날이 오다니 이 헤일에게 무한한 영광입니다. 왕자님께서 도착하시는 날만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인근에 당도하셨다는 말을 듣고 어제는 제가 잠을 꼬박 설쳤습니다."
그 말에 칼리안이 잠깐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는 척 했다. 낯간지러운 말에 질색한 표정을 감추기가 영 어려워서였다.
이 길은 카이리시스에서 지그프리드로 가는 최단 경로다.
그러니 헤일은, 듣기만 해도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저 말을 작년의 플란츠에게도 똑같이 했을 것이 분명했다.
곧 다시 고개를 돌린 칼리안이 웃으며 대꾸했다. 피곤한 걸음을 세우고 건넨 말이라는 것이 저런 입에 발린 소리였던 탓에 썩 고운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앞마당부터 정리하고 기다렸다면 더 좋았을텐데요."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공격했던 남자를 잠시 쳐다봤다. 칼리안에 가려져 있던 피투성이 환자를 그제야 보았는지 저도 모르게 헉 하는 소리를 낸 헤일이 물었다.
"일행이십니까? 의술사를 준비시키겠습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치료가 필요하지 않게 된 자입니다."
헤일이 다시 한번 헉 소리를 냈다.
지금 칼리안이 꺼낸 말은 귀족들이 험한 말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 쓰는 일종의 은어로, 사형수를 뜻했기 때문이다.
카이리스에서 범죄자에 대한 치료를 해주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형수는 예외였다. 어차피 죽을테니 굳이 치료를 해 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남자는 칼리안에게 검을 겨눴다. 칼리안은 왕자였다.
그 결과로 남자는 상처를 치료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송구스럽습니다, 왕자님."
남자가 칼리안을 공격했다는 것을 안 헤일이 고개를 조아렸다. 앞마당이라고 했으니 라트란 영지 내에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자칫하면 헤일 역시 책임을 면치 못할 상황이 되었으니 하늘이 내려앉는 기분일 터였다.
무어라 대답을 해주려는데 하늘에서 물방울이 하나 뚝 떨어져 칼리안의 손등을 적셨다. 곧 또 한방울이 뚝. 그리고 또, 뚝.
레이븐이 작게 투레질을 했다. 콧잔등에 물을 맞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얀이 서둘러 다가와 우산을 씌워주려 했다. 그리 많이 내리는 비가 아니어서 괜찮다고 손짓한 칼리안이 헤일에게 말했다.
"사과보다는 지붕이 먼저 필요하겠네요."
내성을 지나 영주성에 도착할 즈음에는 빗줄기가 꽤 많이 굵어져 있었다. 8월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날에 내리는 비에 주변에는 금세 습한 기운이 돌았다. 비가 오는 모양새를 보던 칼리안이 유란을 향해 말했다.
"일단 성의 병사들에게 넘기고 다른 설명은 하지 마세요."
"네, 왕자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성으로 오는 사이 은근히 젖은 터라 헤일이 내어 준 방으로 간 칼리안은 우선 몸부터 씻었다. 그리고는 방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빗소리가 방안에 가득 들어찼다.
하늘을 살피니 아무래도 내일까지는 빗속에 갇혀있어야 할 꼴이었다.
안 그래도 먼 길이라 발이 묶이기 싫어 조금 전의 일에 손을 대지 않으려 했는데, 비 때문에 결국 발이 묶여버렸으니.
"그것 참."
-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얀이 들어왔다. 칼리안이 부탁한 차가운 얼음이 가득한 민트 차를 손에 든 채였다.
"고마워."
열린 문 틈으로 유란이 보였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얀이 대답을 전했다.
"오늘 잡힌 이에게서 찾은 것이 있다 하는데 라트란 백작에게 건네라 할까요?"
이곳에 오던 길에 나머지 조사를 헤일에게 맡기겠다 했던 말 때문에 물어오는 것이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어떤 건지 먼저 확인해볼게. 들어오라고 해."
그 말에 유란을 방으로 부른 얀이 잠시 나갔다 오더니 유란 몫의 민트차를 가져와 건넸다.
때문에 자리에서 튕겨지듯 일어나 허리를 숙이며 양 손으로 민트차를 받들어 든 유란이 정중히 다시 자리에 앉는 웃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당황하던 얀이 다시 밖으로 나간 후 유란은 손수건에 싸인 무언가를 꺼내 칼리안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 자의 신발에 숨겨져 있었다며 병사들이 전해준 것입니다. 아, 손수건은 제 것입니다. 지저분하지 않으니 걱정 마십시오."
혹시라도 더럽다 할까봐 설명해오는 말에 칼리안이 웃었다.
창 밖에서는 빗소리가 나고 방금 씻어 개운한 기분에 시원한 민트차까지 한 모금을 머금으니, 절로 미소가 생긴다. 그 작은 여유로움을 만끽한 칼리안은 잔을 내려놓고 손수건을 펼쳐 보았다.
그리고 칼리안의 얼굴에 만연했던 웃음이 서서히 지워졌다.
칼리안의 분위기가 극명하게 달라지는 바람에 유란은 그것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입을 다물고 앉아있었다. 한동안 손수건 안에 든 것을 쳐다보던 칼리안이 조용히 물었다.
"이걸 그 자가 가지고 있었다고요?"
그것은 유란이야 자세히 몰랐겠지만 칼리안에게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해 주었던 물건이었다.
미간을 찌푸리는 칼리안을 보며 유란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칼리안이 어떻게 단번에 알아봤는지를 궁금해하는 것이다.
칼리안이 설탕 조각처럼 생긴 그것을 보며 물었다.
"경은 이것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오래 전 치안대에 있을 때 리베른의 암상인을 검거하며 보았습니다. 잠시동안 죽은 것으로 위장해주는 독이라 하더군요. 그런데. 왕자님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아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모를 리가 있나.
자신을 일주일간 앓아 눕게 한, 대신 자유를 준 독을 쳐다보는 칼리안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먹어봤던 것이라서."
창밖의 빗소리가 거셌다.
하필 비가 와서 발이 묶였다. 거기에 더해, 빼낸 발도 도로 돌려놓게 할 만한 것이 나타났다. 그러니 더 이상 어떻게 관심을 끄고 가던 길이나 계속 가겠는가?
"투기도 갈무리 못하던 놈이 독을 가지고 있었네."
칼리안이 볼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투기'라는 말에 유란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검술이 뛰어나신 것 같았습니다만."
그 말에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남자."
매우 노골적인 말 돌리기였다. 사실 가장 궁금했던 부분인데 입도 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작은 나이프 하나로 장검을 흘려냈던 칼리안의 모습을 기억에서 잠시 접은 유란이 대답했다.
"네. 왕자님."
"지금 내가 한번 만나볼게요."
유란이 놀라서 물었다.
"직접 말씀이십니까?"
칼리안은 대답 대신 물방울이 맺힌 잔을 톡톡 건드렸다. 두 번 말하기 싫다는 뜻이리라. 대충 칼리안의 성격을 파악한 유란이 다시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 * *
불의 마법은 상처를 태운다. 얼음의 마법은 상처를 얼린다.
바람의 마법은, 상처를 헤집는다.
회오리치는 바람의 힘에 어깨가 관통됐다. 말이 좋아 관통이지 갈가리 찢겼을 것이다. 대충 붕대만 감아둔 채로 방치된 상처 때문에 제대로 혈액이 닿지 않은 손은 퉁퉁 부은 채 짙은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
칼리안은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어디에서 왔어?"
남자가 고개를 들어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픽 웃었다. 유란이 표정을 찡그렸지만 칼리안은 그냥 두라는 듯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귀한 집 도련님인 줄 알았더니."
"더 귀한 집 자식이라."
남자의 상처를 훑어보는 칼리안의 눈에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남자에 대한 미안함이나 걱정하는 기색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물론 유란 역시 칼리안이 그 남자에 대해 부채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유란은 열 다섯의 소년이 제 손으로 사람을 다치게 한 뒤 지어보이는 얼굴이 지나치게 담담하다고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구리 광산 경비대원이다. 놈들이 찾아와서는 사람 찾는 것 좀 도와주면 사례하겠다기에 잠시 도운 것 뿐이다."
"그 설탕같은 것, 어떻게 네가 가지고 있어?"
"놈들이 하나씩 나눠가졌다. 좋은 건 줄 알고 빼돌렸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는 사실이라 믿기로 했다.
"놈들이 찾는 건 뭐였어?"
"모른다."
"누군지는 알아?"
"서로 이름도 부르지 않았고 복면 때문에 얼굴도 못봤다."
"다른 기억나는 건?"
"없다."
칼리안이 깍지 낀 손을 테이블에 올리며 남자를 살폈다. 붕대 위로 배어나온 진물이 흥건했고, 열이 나는지 얼굴이 붉었다.
아무리 마법에 의한 상처라지만 이런 덥고 습한 곳에서는 벌써 곪아들어가기 시작했을 터였다.
"치료, 해줄게."
남자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이 도시를 통틀어 남자가 어느 정도로 고통스러울지 가장 정확히 알고 있을 칼리안은,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치료가 안될 것 같으면 자르기라도 해줄게. 대신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걸 줘. 없으면, 서로 아쉬운 거고."
남자는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칼리안은 채근하지 않았다.
한참 뒤, 남자가 입을 몇 번 달싹이더니 말했다.
"한슨 마을에 아내가 있다. 놈들도 알고 있다."
아마도 남자가 사실을 발설할 경우를 대비해 협박을 해둔 모양이었다. 칼리안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 잃어버린 것. 뭐야."
"······ 손톱만한, 투명한 구슬같은 것. 텐실의 신관에게 확인해봐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란 말을 들었다."
신물을 가지고 있던 모양이다. 신물을 닥치는대로 모으고 있는 텐실에서 비싼 값에 살 테니, 그것을 빼앗겼다면 그리 난리를 칠 만도 했다. 게다가 신물이라면 엘프가 기운을 느끼는 것도 말이 되었다. 칼리안이 다음 질문을 했다.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지?"
"이 곳에 머무는 이들이 아닌 것 같았다. 하얀 머리 엘프가 있었는데 놈을 쫓아갔을 것이다."
"놈들의 정체는?"
"아까도 말했지만 얼굴도 못봤고 이름도 모른다."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 실망하는 칼리안의 귀에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대신 그들의 대장인 듯한 놈을 부르는 호칭은 들었다."
계속 말하라는 듯 칼리안이 턱짓을 했다. 남자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기억을 되짚더니 말했다.
"푸른 솔새. 그렇게 불렀다."
"······ 푸른 솔새."
하.
아버지.
당신의 새가 왜 여기까지 날아왔을까요.
칼리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