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8화 (39/527)

제9장. 확인해 (2)

칼리안이 걸어나오자 남자가 시선을 돌렸다.

칼리안은 그런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유란을 향해 물었다.

"저 자가 누굴 찾는다고요."

"물건을 훔쳐 달아난 아이를 찾는다고 합니다."

칼리안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유란을 보며 다시 말했다.

"그냥 찾으러 왔다기에는 꼬리가 많이 긴데."

유란의 시선이 잠시 칼리안을 훑었다. 그가 눈치챈 것이 칼리안의 입을 통해 나온 까닭이다. 그것을 짐짓 못본 적, 칼리안이 남자에게 물었다.

"찾는 이가 어떻게 생겼는데?"

"어린 엘프입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일행 쪽을, 정확히는 시아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확인해."

로브 안쪽에서 숨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갑작스레 길을 열자 남자가 잠시 칼리안을 보았다. 그리고 칼리안은 살짝 고개를 돌려 유란에게 시선을 주었다. 유란의 고개가 아주 조금 위 아래로 움직였다.

칼리안이 작은 웃음을 매단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찾던 이가 아니었다는 것처럼 돌아가. 살고 싶으면."

남자의 눈초리가 다소 사납게 변했다. 칼리안은 그 시선을 무시하며 다시 한번 주변의 기운에 집중했다.

남자가 일행에게 한 발 더 다가온 순간부터 미약한 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살기를 숨긴 이들도 있을테니 수풀 속에 몇 명이 숨었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해도 이 곳을 향해 몇 명이 화살을 겨누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데 그 방향이 이상했다. 살기가 남자와 시아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가 로브를 들춰 그 안에 든 것이 시아가 맞다고 확인되는 순간 둘 모두를 죽이려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하여 칼리안은 남자가 진작부터 동료들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시아라는 저 엘프가 훔쳤다고 하는 물건이 그리 좋은 일에 엮여있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눈 돌리지 말고 들어. 아까부터 숲 속에서 누가 널 겨누고 있어. 저 애한테도. 확인하는 순간 화살이 날아올 거야. 그러니 그냥 가. 그 자들이랑 더 친하게 지내지 말고."

당연하게도 남자는 칼리안의 말을 믿지 않았다. 때문에 저도 모르게 숲을 쳐다보았고, 칼리안은 쯧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지 말라니까."

그 말이 신호가 되었다.

유란과 기사들의 검이 뽑혀나옴과 동시에 여섯 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그 중 네 발이 시아를 향하고 있었다.

긴장하고 있던 키리에와 기사들이 검을 휘둘러 화살을 막아냈다. 그 직후, 화살이 다시 한번 날아왔다. 이번엔 칼리안도 움직였다.

- 화악!

칼리안은 남자를 잡아당겨 몸을 숙이게 한 뒤 날아오던 화살들을 쳐냈다. 그 뒤를 이어 다시 쏘아진 화살이 넓게 펼쳐진 실드에 막혀 튕겨나왔다.

아르센이다.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씩 웃으며 아르센을 쳐다봤다. 곧 유란이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확인하고 와. 멀리까지 쫓지는 말도록."

화살을 쏜 이들을 굳이 잡을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에서 내린 지시였다. 저들의 공격이 칼리안을 향한 것이 아니기도 했고 칼리안의 호위가 우선이었으니까.

유란의 말에 다섯 명의 기사가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그 직후 다시 한 번 화살이 날아왔으나 마찬가지로 해를 입히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그 뒤로는 더 이상 화살이 날아오지 않았다.

도망가는 것을 택했으리라.

시아의 곁에 있던 키리에와 두 명의 기사가 칼리안에게 다가왔다. 칼리안이 붙들고 있는 남자를 인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남자의 손이 슬며시 검 손잡이로 향했다. 그것을 본 키리에가 깜짝 놀라 소리를 높였다.

"왕자님!"

자신을 구한 것이 칼리안이라는 것도 잊은 것인지 남자가 재빨리 검을 뽑아 그대로 올려그었다.

다행히 칼리안의 반응이 조금 더 빨랐다.

검이 뽑히는 것을 안 순간, 칼리안이 남자를 붙든 손을 놓았다. 그 뒤 옆으로 몸을 틀며 나이프를 들어 검의 방향을 반대로 흘려보냈다. 동시에 칼리안의 입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윈드 애로우]

주문 없는 시동어에 순식간에 바람의 화살이 발현됐다. 그것은 곧 검을 쥐고 있던 남자의 어깨를 관통한 뒤 사라졌다.

"아악!"

날듯이 뻗어나온 키리에의 검이 남자의 검을 쳐냈다.

- 카앙!

남자의 검이 힘 없이 날아가 떨어졌다.

남자는 그것에는 관심도 두지 못했다. 예리하게 집약된 바람이 뚫고 지나가 너덜거리는 어깨를 붙들고 머릿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남자를 뺀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기사들의 눈이 칼리안에게 고정되었다.

칼리안은 조용히 소매 속으로 나이프를 집어넣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그런 칼리안에게 걸어 온 유란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호위기사가 스물이나 되면서 정작 몸싸움은 칼리안이 혼자 했으니 하는 말이다. 물론 칼리안이 앞으로 나서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저 자나 데려가 확인해보세요."

"네, 왕자님."

곧 유란의 지시에 따라 두 기사가 남자를 제압하고 지혈했다. 심문은 해야 했으니 남자가 혹여 죽거나 기절하면 곤란했던 탓이다.

남자의 상처를 보던 기사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지금 그들의 머릿속에는 같은 것이 떠올라 있었다. 방금 전 칼리안의 움직임과 마법이 계속하여 눈에 아른거렸던 것이다.

얀이 그러지 않았던가. 앨런 마나실이 마법 재능이 없다고 공언한데다 검이라고는 호신술 조금 배운 것이 다라고.

꽃 같은 왕자님이라고!

"······ 어딜 봐서?"

평온하기만 한 얼굴의 칼리안을 쳐다본 기사들은, 남자를 칼리안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끌고 갔다.

다시 시아를 쳐다보려던 칼리안의 고개가 중간에 멈췄다. 이번에는 얀이 칼리안을 보고 있었다. 마법을 쓰는 것이야 당연히 알았고 그간 키리에에게 검을 배운 것으로도 알고는 있었던 탓에 놀라움보다는 조금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저 문제가 있다면 보는 눈이 좀 부족하다는 것 뿐이다. 정확히는 칼리안의 실력을 전혀 눈에 담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왕자님, 또 일이 날 뻔하지 않았습니까!"

폭풍같은 잔소리가 시작됐다.

기사들 두고 뭘 믿고 앞으로 갔냐는 둥, 그러다 다치면 어쩔 것이냐는 둥, 운이 좋았다는 둥, 뭐 그런 이야기들이 한참을 이어졌다. 칼리안에게 칼 한번 휘둘러보려다 어깨가 꿰뚫린 채 실려간 남자는 얀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한동안 잔소리를 들어 넘기던 칼리안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어쩐 일인지 유란은 칼리안의 눈을 피했다. 얀의 둔함을 알고 웃음을 참는 것이 분명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잔소리가 비로소 끝나갈 즈음, 숲으로 들어갔던 기사들이 돌아왔다. 다친 곳은 없는 듯 보였으나 소득도 없는 얼굴이었다. 어차피 잡아오라 한 것도 아니었던 유란이 질책하지 않고 기사들에게 물었다.

"몇 명이 있었지?"

다섯 기사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와 답했다.

"총 일곱 명입니다. 따로이 흔적을 남기지 않고 곧바로 흩어졌습니다."

"그래. 알겠다."

밥을 먹고 엘프를 만났을 뿐인데 생각지도 못한 일에 휘말린데다 잔소리까지 얻어 들은 칼리안이 저벅저벅 시아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귀를 감췄던 로브를 휙 벗겼다.

남자와의 싸움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웃는 얼굴로 시아를 대했던 칼리안의 눈매가 제법 매섭게 변해있었다. 시아의 눈에 겁이 잔뜩 쌓였다. 그리고 시아와 칼리안의 말이 거의 동시에 튀어나왔다.

"루카가 그랬어. 난 몰라."

"네가 훔쳤다는 게 뭐야."

말이 겹치자 칼리안이 시아를 쳐다봤다. 시아가 다시 말했다.

"응. 몰랐어."

"몰랐다고?"

"나 아니야."

"놈들이 네가······."

거기까지 말을 하다 말고 중간에 말을 끊은 칼리안이 머리를 감싸쥐었다. 이제야 무슨 문제가 있는지 이해했다.

칼리안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그나마 이 상황에 가장 잘 대처할 만한 이를 불렀다.

"헤르츠 경."

"네, 왕자님."

이 곳에서 가장 똑똑할만한 마법사 아르센이 곧장 칼리안에게 왔다. 칼리안이 찌푸린 얼굴로 시아를 가리키며 물었다.

"질문보다 대답을 먼저 하는데."

그제야 시아의 말을 되돌려보며 칼리안이 말한 것을 깨달은 아르센이 아, 하는 짧은 소리를 내며 놀라워 했다. 이상한 말솜씨를 가진 엘프와의 대화에 더 이상 머리를 쓰고 싶지 않았던 칼리안이 아르센을 보고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하는지는 나중에 알아내고 저 남자는 라우첼 경이 취조할 것 같으니 헤르츠 경은 그 엘프가 하는 말부터 정리해서 줘요. 이게 무슨 일인지. 그리고 걔 떼놓을 때까지 걔랑 대화는 경이 맡아요."

아르센의 가시밭길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맞아."

"그러니까. 자네의 말은, 자네는 아는 것이 없고······."

"몰라."

"게다가 자네의 경우에는 물건이 무엇인지······."

"아니야."

"더욱이 자네는······."

옆에서 들려오는 대화 아닌 대화 소리 때문에 기사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깨들이 떨렸다. 마음껏 웃을 수가 없으니, 차라리 울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유일하게 이 곳에서 마음대로 행동해도 괜찮은 칼리안만이 작은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 불쌍해. 마법사.

히나의 수어를 본 키리에가 살짝 웃었다.

한참 뒤, 노트 하나에 시아의 말을 받아 적은 아르센이 얀을 향해 눈짓했다. 칼리안에게 이야기를 전해도 괜찮을지 묻는 것이었다. 칼리안의 허락을 구한 얀이 말의 속도를 줄여 키리에 쪽으로 갔다. 곧 아르센이 칼리안의 옆으로 와 내용을 전했다.

"웅크린 말의 정령이라는 뜻이야. 어머니 나무가 지어 주셨어."

"아이의 이름은 시아루스 티안 유레하, 엘프이며, 12세라 합니다."

아르센의 말에 함께 타고 있던 시아가 잠시 '끼어들었다'. 잠깐 침묵하던 아르센이 어색하게 말했다.

"······ 그렇다고 합니다."

"계속하세요."

칼리안이 짧게 대답했다. 아르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질문보다 대답이 빠른 것은, 본인도······."

"헤르츠 경."

말을 막은 칼리안은 잠시 눈을 돌려 아르센을 쳐다봤다. 아르센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왕자님."

칼리안이 손가락을 들어 시아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순서대로."

아르센이 잠시 긴장하여 말을 멈췄다.

순서대로 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했고 시아에 대해 알아보라고 말한 순서대로 보고하라는 말이었음을 깨달았다. 어쩐지 칼리안이 자신에게만 굉장히 엄격하게 군다는 생각을 떨쳐내려 애쓰며, 아르센이 답했다.

"죄송합니다. 우선 어떤 물건을 훔친 것인지는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저 아이는 루카라는 이름의 엘프와 함께 돌아다니면서 나무 조각품을 팔았다고 합니다. 루카라는 엘프는 저 사내를 공격한 무리가 특이한 것을 가지고 있다며 쫓아가게 되었고, 그 물건을 슬쩍······ 한 것 같습니다."

루카라는 엘프가 어떤 물건을 훔쳤고 그것이 무엇인지는 시아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엘프가 정말로 도둑질을 했다는 것이 의외였으나 칼리안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러다 쫓기게 되었고 루카라는 엘프와는 중간에 헤어졌답니다. 그 뒤로 왕자님과 만난 것 같습니다."

칼리안의 고개가 다시 한번 위 아래로 움직였다.

"그리고 대답을 먼저 하는 이유는 본인도 자세히 모른다고 합니다. 저절로 입이 열린다고 하는데 아이의 설명만으로는 정확한 파악이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르센의 말을 모두 들은 칼리안이 시아를 쳐다봤다. 칼리안의 입이 열리자 시아가 대답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예지력을 가진 것인지를 묻고자 했던 칼리안이 한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유란과 다른 기사 사이에 묶인 말에 올려진 남자를 잠시 쳐다봤다. 남자가 결국 기절해서 깨어나지 못하는 바람에 아직 물은 것이 없었다.

"더 전할 것은?"

"없습니다."

결국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칼리안에게 다시 인사를 올린 아르센이 뒤로 가고 제자리로 돌아온 얀이 물었다.

"직접 알아보실 생각이십니까?"

가야 할 길이 멀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굳이 얽혀들어서 이 곳에 발이 묶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자세한 조사는 라트란 영주에게 맡기도록 해."

"네, 왕자님. 그럼 저 꼬마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까 들어보니 히리스카 숲에 산다는데요."

칼리안이 다소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히리스카 숲이라면 영지의 병사들이 보호하며 데려다 주기에는 조금 먼 거리였다. 대신, 하필이면 지그프리드 영지로 가는 방향의 인근에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옷자락을 잡힌 것을.

"숲 입구까지는 아니더라도 근처까지는 데리고 가도 돼."

"네. 이제 위험하지 않으니 안심하라고 전하겠습니다."

길이 바빠도 엘프 꼬마 한 명 쯤은 데리고 다닐 수 있었으니.

칼리안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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