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확인해 (1)
칼리안은 그저 여느때와 다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방 밖으로 나왔다. 다만 평소 달리 식당이 아닌 궁 밖으로 곧장 나와 르메인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조찬을 마친 후에는 간단한 예식을 치렀다. 그리고 르메인에게 인사를 올린 뒤 레이븐의 등에 올랐다.
칼리안의 앞에는 아르센이, 좌 우로 키리에와 얀이, 뒤로는 치유술을 쓸 수 있는 히나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런 일행의 앞 뒤로 검은 옷의 기사들이 도열했다.
왕실 마차를 탔다면 왕실 문양이라도 있었을텐데 칼리안은 딱히 왕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표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안그래도 눈에 띄는 외양인데다 아직은 같은 편보다 적이 더 많은 칼리안이었으니 굳이 나서서 왕족임을 알려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시스파니안을 닮은 왕자가 로젤리타를 떠난다 하니 광장부터 카이리시스 외성에 이르는 왕도 주변에 환송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런 그들의 앞에, 칼리안이 나섰다.
화려한 마차는 없었으나 지그프리드의 기사가 있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칼리안이 있었다. 때문에 이전의 왕자들에 비해 그 위용이 결코 부족하지 않았으므로 칼리안이 지나가는 걸음 걸음마다 환호성이 울리고 무탈을 기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왕자의 성인식.
지그문트 칸 시스파니안의 의지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
로젤리타가 시작되었다.
* * *
출발 후 며칠 동안은 별 문제가 없었다.
칼리안이 가게 될 도시들에 왕궁의 연락이 미리 전해진 것도 있었고 누가 섣불리 접근할 만한 기사의 수도 아니었던 까닭이다. 싸움이 나면 피해야 하나 나서야 하나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이 허탈했을 만큼 칼리안은 레이븐의 위에서 편히 앉아 구경이나 하고 얀과 대화를 나누며 보냈다.
그리고 가끔씩 앨런의 목소리를 들었다.
- 네, 스승님. 별다른 일은 없으십니까?
- 갑자기 텐실에서 사신들이 왔다더군요. 르메인이 바쁘니 늙은이 혼자 적적합니다.
레이븐의 위에 앉아 한가롭게 앨런과 대화나 해볼까 했던 칼리안은 조금 실망한 기색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둘러둘러 말하지만 르메인이 바빠서 앨런도 정신 없다는 소리임을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 바쁘신가보군요.
- 아무래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신난 얼굴로 반지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반지에 든 마나를 금세 회수하는 모습을 본 얀이 물었다.
"마나실 경이 상대 못해드리겠다 합니까?"
"응. 바쁘시대."
"매일 그렇게 대화를 보내시는데 매번 받아주는 것이 더 신기하네요. 제가 상대해드릴테니 그만 무료해하세요."
꼭 아무 일이 없다며 투정을 부린 것 같아서, 칼리안이 어색하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지금 칼리안 일행은 라트리아 숲을 지나 라트란이라는 도시로 향하는 중이었다. 낮은 숲을 끼고 도는 왕도 아래로 열 개 남짓의 둥근 호수가 보였다. 특이하게도 호수들이 서로 굉장히 비슷한 형태였고 하나하나의 크기가 상당히 컸다.
사실 호수라고는 해도 물이 거의 말라 있었다.
당연한 것이, 자연히 물이 차올라 만들어진 호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래가 확실히 전해져 내려오는 그것은 시스파니안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호였다. 물론 그 고룡이 할 일 없이 이런 곳에 호수나 만들어보자 했던 것은 아니었고 악신을 쫓으며 운석을 끌어와 떨어뜨린 자리에 물이 고여 만들어진 곳이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칼리안이 어색하게 웃었다.
"500년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계곡에 남긴 이를 지금 보러 가는 거네."
"그렇다고는 해도 현신을 만나는 것은 아니니 너무 부담가지지는 마세요."
"그래. 그래야지."
"호수를 한번 둘러보실 겸 이 곳에서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라트란까지 두 세 시간 정도 더 가야 하는데, 더 가면 쉴 만한 마땅한 곳이 없기도 하고요."
특별히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얀은 이미 이 곳을 몇 번이나 지나다닌 사람이었고 칼리안은 아니었으니까. 때문에 칼리안은 선선히 동의했고 일행은 왕도에서 조금 벗어난 평평한 풀숲으로 이동했다.
풀을 뜯는 것에 열중인 레이븐의 다리에 기대 앉은 칼리안이 이전 도시에서 가져온 샌드위치를 건네받았다. 곧 히나가 다가와 칼리안과 얀에게 물 잔을 내밀었다.
"고마워."
히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키리에의 옆으로 가 앉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본 얀이 말했다.
"키리에가 히나를 엄청 챙기던데요."
"여동생이니까."
그 말에 얀이 웃으며 대꾸했다.
"제 동생도 저러면 참 챙겨주고 싶을텐데요."
얀이 먼저 가족 얘기를 꺼내는 것이 처음이었다.
왕궁에서 벗어날수록 얀은 조금씩 시종이 아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지금만 보아도 그렇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옆에 나란히 앉아 밥을 먹고 있는 것이다.
얀이 꺼내두는 가족 이야기에 칼리안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생일 선물 안 줬다고 자고 있는 오빠한테 칼 내리꽂는 애가 하나 있는데, 왕자님께서도 이제 곧 만나보시게 될 겁니다. 조심하세요."
칼리안이 마지막 남은 빵을 입에 넣다 말고 웃었다. 그 모습이 상상됐기 때문이다. 얀은 분명 엉엉 울었을 것이다.
얼마 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칼리안이 다시 레이븐의 등에 오르려 했다.
그런데 그 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 사삭!
덤불을 헤치고 다가오는 작은 소리.
그와 함께 숲으로 이어진 무성한 덤불이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칼리안이 그 곳을 쳐다봄과 동시에 어느새 다가온 키리에가 칼리안의 앞을 막고 섰다.
기사들 역시 칼리안과 얀을 가운데 두고 방어 태세를 갖췄다.
"아니, 잠깐······."
칼리안이 이렇게까지 경계해야 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는 말을 하려는데 히나보다도 훨씬 작은 인영이 덤불 밖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겨누고 있는 기사들과 마법사를 보더니 깜짝 놀란 눈을 했다. 그러더니 양 손을 들어보이며 외쳤다.
"맞아! 살려줘!"
이게 무슨 소리인가?
말을 이해하지 못한 기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칼리안은 조금 다른 이유로 표정이 굳었다.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에게야 더러 익숙했을지 몰라도 칼리안에게는 그렇지 않은 외양이었기 때문이다.
작은 인영은 단발머리를 한 남자 아이였는데, 얼굴 옆에는 인간의 것보다 조금 더 길고 뾰족한 귀가 붙어 있었다.
항상 말이 없는 키리에가 아이를 보곤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엘프?"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엘프 소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칼리안의 평화로운 여행에 일어난 큰 파문은 이렇게 갑작스레 튀어나온 한 명의 엘프 소년으로부터 시작됐다.
생전 처음 본 엘프의 온전한 귀를 보며 신기해 할 틈도 없이, 그 엘프가 말했다.
"나, 시아."
이제 모두의 얼굴에 같은 표정이 드러났다. 아까부터 저 엘프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사 유란의 눈이 칼리안을 향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엉뚱한 침입자에게 겨눈 검을 집어넣어야 할지 아니면 그냥 계속 경계해야 할지를 물어오는 것이다.
엘프들은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거짓말도 잘 하지 못한다.
때문에 경계심을 조금쯤 풀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칼리안은 칼을 치우라는 제스처를 하며 그 엘프에게 한발 가까이 갔다. 그와 함께 기사들의 검이 거두어졌다.
살짝 허리를 숙인 채 엘프의 얼굴을 살피던 칼리안이 물었다.
"시아? 네 이름이야?"
"응. 배고파."
"먹을 것 달라고 온 거야?"
"숨어 있었어."
대화가 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얘가 지금 뭔 소리를 하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그런 얼굴을 한 칼리안이 볼을 긁적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칼리안은 고개를 돌려 키리에를 쳐다봤다. 엘프들은 다 이렇냐고 묻고 싶었는데 키리에가 똑같은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그 옆에 선 히나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그 표정을 본 칼리안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너희가 알 수가 없구나."
칼리안이 다시 한번 볼을 긁적이더니 입을 열었다.
"이런 데서 뭘 하고 있어?"
"맞아. 미안."
음.
칼리안은 이 대화를 집어 치우고 밥이나 먹여 보낼지 조금 더 인내심을 가져볼지 고민했다.
그러다 돌연 칼리안의 눈빛이 바뀌었다.
천천히 허리를 편 칼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 쫓아오는 이가 있었으면 그걸 먼저 말해줬어야지."
말 발굽 소리가 들렸다.
그것만으로는 그리 큰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다만 칼리안 일행을 향해 곧장 다가오고 있다는 것, 그 손에 검이 들려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채 갈무리하지도 못한 투기가 새어나오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기사들이 다시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고마워."
그렇게 말한 시아라는 이름의 엘프가 울상을 지으며 칼리안의 옷자락을 꼭 붙들었다. 아까부터 꺼내놓는 말은 이해가 안됐지만 그 행동은 알아볼 수 있었다. 도와달라는 뜻이었다.
차라리 입을 안 여는 편이 대화가 편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에,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칼리안은 도와달라는 그 손짓에 대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단 좀 보고."
우선 칼리안은 레이븐의 안장에 매어 놓았던 로브를 꺼내 시아의 머리를 덮었다. 그리고는 시아를 뒤쪽으로 보내며 키리에를 향해 말했다.
"데리고 있어."
고개를 끄덕인 키리에가 시아를 데리고 가 제 옆에 세웠다.
그 사이 칼리안의 앞을 막은 기사들이 언제든지 검을 뽑아들 태세를 했고 아르센은 언제든지 실드를 펼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칼리안은 소매 속의 나이프를 잠시 확인했다.
하지만 그것을 꺼내들 일이 있기는 할까 싶었다. 다가오는 말은 한 마리였으니까.
- 다각, 다각.
곧 그가 일행의 근처까지 다가와 멈추었다.
스무 명의 기사가 함께하는 검은 머리 소년의 일행이 무엇인지도 신경쓰지 않은 채 계속 다가오는 이를 향해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장발의 남자였다. 어디에 속한 사병인지는 몰라도 병사의 복장을 한 채였다.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일행을 스윽 살펴보았다.
칼리안을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마도 생김새만으로 칼리안을 알아보지는 못하는 듯 했다. 그래서 칼리안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귀족이나 상단 소속일텐데. 그 정도면 내가 움직이는 경로를 모르는 것도 아닐 테고.'
그때 유란이 앞으로 나섰다.
다행히 저렇게 의심스러운 기색의 상대에게 칼리안이 누구인지를 굳이 먼저 알려주는 눈치 없는 일을 하지는 않았다.
"누구냐."
"도둑 한 명이 물건을 훔쳐 도망치는 바람에 쫓는 중인데. 혹시 이상한 아이 보지 못하셨습니까?"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유란이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도둑을 쫓는 기색이 아니구나."
"도둑 쫓는 얼굴이 따로 있습니까."
"그런 아이는 이 곳에 없으니 물러가거라."
남자는 다시 한번 일행을 훑어보았다.
그러다 한 구석에 서 있는 로브 쓴 아이를 발견했다. 누가 보아도 의심스러운 모습이었으므로, 남자가 빙글 웃었다.
"있는 것 같은데 잠깐 좀 보고 가겠습니다. 기사님들께 싸움이나 걸어보자고 온 것은 아니니 길 좀 터 주십시오."
곧 남자가 말에서 내려 일행을 향해 한 발 다가왔다.
스무 명의 기사가 있는 곳에 저렇게 서슴없이 들어오는 것이 영 꺼림칙했다. 투기도 갈무리 못하는 병사였으니 분명 뭔가 믿는 구석이 있겠구나 싶은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던 칼리안에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같은 것을 눈치챈 것인지 유란이 조금 더 경계하는 표정을 했다. 그리고 검을 들어 남자의 앞을 막으며 다시 말했다.
"멈춰라."
칼리안이 잠시 유란을 쳐다본 뒤 앞으로 나섰다.
남자의 믿는 구석. 즉, 반대편 수풀 속에 숨어 이 쪽을 향하고 있는 몇 개의 활이 있음을 파악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