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6화 (37/527)

제8장. 아주, 반갑습니다 (3)

요즘 뭐가 그리 바쁜지 몰라도 란델은 조찬에도 가끔 나오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도 늦게 올 모양이었는지 란델은 없었다.

왕자들을 위해 마련된 동그란 테이블에 반갑지 않은 놈 한 명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칼리안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저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지려는 것을 참아낸 칼리안이 플란츠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칼리안과 플란츠가 한 자리에 앉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주변이 조용해졌다. 이유를 궁금해 할 필요도 없었다. 칼리안에게 '참 독한 감기'를 안겨준 실리케를 말 한마디로 몰아넣은 플란츠가 아닌가.

게다가 그 일이 있은 뒤 처음으로 둘이 함께 앉는 자리였다. 그러니 적도 아니고 아군도 아닌 둘의 사이가 어떨지 심히 궁금할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칼리안은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차피 플란츠와 가야 할 길이 다르니, 억지로 친한 척을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귀족들의 시선도 조금씩 떨어져 나갔다.

"야."

그런데 놈이 말을 걸어왔다.

여전히 자신을 보는 귀족들을 한 명씩 빠짐없이 쳐다보며 시선을 돌리게 한 플란츠가 테이블에 상체를 누이듯이 기대며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덕분에 오래 전에 있던 일과 같은 상황이 또 한번 벌어졌다.

"야. 피눈깔."

"칼리안."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은 호칭에 곧바로 대꾸한 칼리안이 플란츠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다소 딱딱한 어조로 덧붙였다.

"넘겨 듣는 것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형님."

플란츠의 연두색 눈이 잠시 빛났다.

한참동안 칼리안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플란츠가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곧 그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잖아."

아니잖아.

칼리안의 눈이 조금씩 가늘게 변했다.

플란츠의 눈에는 날이 섰다.

"대들고, 칼도 쓰고, 말도 타고."

그렇게 말한 플란츠가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나른한 한숨 같은 목소리가 칼리안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너. 누구냐고."

칼리안은 말 없이 그 눈을 쳐다보았다.

그래. 플란츠 정도면 눈치 챌 만도 하다. 제 손에 올려놓고 그리 괴롭혀오던 동생이 하루 아침에 바뀌었으니, 모르면 얀이다.

칼리안은 아주 잠시 고민을 했다.

상관없다. 그렇게 결정했다.

긍정하지도,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는 것으로.

오래지 않아 칼리안의 입에 여유로운 미소가 걸렸다.

"이상한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앨런처럼 마음을 얻어내야 할 상대도 아니니 사실을 이야기 해 줄 필요가 없었다. 만약 플란츠가 칼리안에 대해 아무리 확신한다 한들, 밝혀질 수 있을 비밀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그냥 잡아 떼면 그만이다.

그렇게 결론지은 칼리안의 얼굴은 평온했다. 속은 시끄러웠으나 아무튼 겉보기로는 그랬다.

그런 칼리안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플란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른 말 없이 연회장에서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문득 옛 칼리안이 떠나면서 전해주고 간 기억 속의 플란츠가, 그가 칼리안에게 저질렀던 일들이 생각났다. 그 뒤에는 세크리티아를 망국으로 이끌었던 플란츠가 생각났다.

칼리안의 시선이 플란츠의 빈자리에서 떼어지질 않았다.

멀리서 그런 칼리안을 본 앨런의 얼굴에 걱정이 들어앉았다. 둘의 대화를 엿들은 것은 아니었으나 플란츠가 떠난 이후부터 칼리안의 표정이 굳어있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곧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앨런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칼리안이 작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앨런은 칼리안에게 다가가는 대신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이는 것으로 걱정하는 마음만 전했다.

* * *

다음 날.

연회장에서의 일로 마음이 뒤숭숭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 칼리안에게 아침부터 앨런이 찾아왔다. 앨런은 칼리안을 보자마자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마음은 다 털어내셨는지요."

칼리안이 정말 신통방통하다는 눈으로 앨런을 쳐다봤다. 이 현명한 마법사는 그깟 말 한마디를 안해도 칼리안의 속을 다 알아보는 것이다.

앨런이 조용히 웃으며 덧붙였다.

"아직 못 털어내셨으면 그냥 그러려니 하시면 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건네온 말을 듣고서야 칼리안이 웃었다. 가끔씩 이렇게 아무 도움 안되는 말을 슥 꺼내놓는데, 그것이 어찌나 좋던지.

다만 정말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맞았으므로 곧 웃음을 멈춘 칼리안이 전날 플란츠와 있던 일을 이야기했다. 플란츠가 칼리안이 바뀌었다는 것을 거의 확신하고 있다는 말에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플란츠라면 눈치챘을 법 하지요. 망나니처럼 굴고 있어도 생각까지 짧은 아이는 아니니."

앨런의 후한 평가에 칼리안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칼리안은 그냥 다음 말을 꺼냈다.

"우선은 모르는 척 했지만 당연히 믿지 않겠죠."

"무엇을 믿게 해야 합니까?"

칼리안이 대답을 하려다 다시 입을 닫았다. 그것을 본 앨런이 칼리안을 대신해 말했다.

"이전 칼리안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왕자님께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알아도 밝혀지지 않을 일입니다. 그러니 그 일을 굳이 걱정하지는 마시지요."

그렇게 말한 앨런은 흠, 하는 소리를 잠시 냈다. 그리고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정체를 들킨 것은 둘째치고 베른으로 살지 않겠다 하였음에도 또 플란츠에게서 과거의 모습을 찾아내어 가라앉아 있으니, 그 말을 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앨런이 손을 댈 것이 아니라 생각되어 다시 입을 닫았다.

대신 앨런은 칼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받으십시오."

주석으로 만들어진 작은 상자였는데, 그것을 여니 은색의 반지가 하나 들어 있었다. 아무 무늬도 없는 그냥 두꺼운 모양의 반지를 꺼내든 칼리안이 물었다.

"무엇입니까?"

"끼워 보시지요. 꽤 마음에 드실 터이니."

좀 큰 크기의 반지였기 때문에 어디에 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칼리안은 그것을 둘째 손가락에 끼웠다. 그러니 신기하게도 반지가 알아서 줄어들며 손에 꼭 맞게 바뀌었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음을 안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는 앨런을 쳐다봤다.

"가끔 늙은이 생각이 궁금하실 때 부르시면 같이 고민을 해드리겠습니다."

"통신용 마법이 걸린 반지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칼리안은 정말 깜짝 놀랐다. 사실 지금 칼리안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칼리안의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앨런이 아니라면 누구와도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으니까.

"왕궁에는 시스파니안의 힘이 닿아 있어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가 왕궁에 있을 때에는 대화가 어렵겠으나 왕궁 밖에 있을 때는 언제든지 응답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든든하네요."

앨런이 지금 왕궁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고 있음은 알았지만, 그래도 가끔씩 앨런에게 기댈 수 있으리라는 것이 반가웠다.

학회의 보물창고가 또 털렸다며 에우리아가 울상을 짓고 있는 것을 모르는 채로 그저 좋아하는 칼리안을 보며 앨런은 또 현명한 마법사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다 이 곳에 온 다른 이유가 생각난 앨런은 자세를 다잡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제 마차가 갔던 곳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멜피르 폴룬으로부터의 연락을 말하는 것이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혹시 만나 보셨습니까?"

"네. 어제 찾아왔기에 만났습니다. 인재를 또 찾으셨더군요. 어찌나 셈이 밝던지."

그리고 앨런은 품에서 또 다른 무언가를 꺼내 칼리안에게 건넸다. 학원 부지 선정을 포함한 건설 비용과 초기 운영비, 교사 선임비 등이 적혀 있었다. 즉, 돈 달라는 내용이었다. 칼리안이 그것을 꼼꼼히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만치 않은 금액을 본 앨런이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첫 비용을 전부 왕자님께서 부담하겠다 하셨다던데 무리가 가지는 않겠는지요?"

"돈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왕실 재정으로 부담하지 않고 폴룬 남작 개인이 운영하는 학원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그래야 제가 직접 참견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스승님 만큼은 아니더라도 저도 뭐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한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는 뜻을 보였다. 곧 칼리안이 몸을 일으켜 금고에서 수표 뭉치를 꺼내와 앨런에게 건넸다.

"저 대신 좀 전해주세요."

"큰 돈인데 제대로 사용하는지에 대해 감시할 필요 없이 주어도 되겠습니까?"

칼리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맡겨두시면 됩니다. 아무리 큰 돈이라 하더라도, 폴룬 남작에게까지 큰 돈은 아닐 겁니다. 게다가 저 정도 돈에 신임을 버리는 사람도 아니고요."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폴룬 남작은 상인이라서 마법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스승님이나 협회장에게 간혹 자문을 구할 테니 제가 없는 동안 잘 대해주시고요."

"그것은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그 뒤 칼리안은 마법 수업 대신 마법 학원에 대한 이런 저런 질문을 앨런에게 건넸다. 멜피르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따로 말을 전해달라고도 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으려니,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얀이었다.

"왕자님, 죄송합니다만 이제 다음 일정이 있습니다."

"그럼 저는 오후 마법 수업 시간에 다시 오겠습니다."

이만 대화를 마칠 시간임을 안 앨런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아닙니다, 스승님.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이 잠시 인사를 하고 갈 겁니다. 오래 걸리지 않으니 다른 일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오늘은 저와 얘기나 나눠주세요."

"수업은 치우고 수다나 떨자는 말씀이십니까."

칼리안이 생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차피 내일이면 시스파니안을 만나러 가야 하고, 그렇게되면 한동안 스승님을 뵙지 못할 텐데 오늘까지 수업을 하면 아쉽잖아요."

수업 하기 싫은 핑계가 참 그럴싸했다. 때문에 앨런은 웃으며 그리하자 대답했다.

* * *

체르밀 궁의 정문 앞에 검은 갑옷을 갖춰입은 스무 명의 기사가 도열하여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슬레이만이 보낸 지그프리드의 정예 기사들이었고, 출발 전날 칼리안에게 인사를 올리기 위해 체르밀에 방문한 참이었다.

칼리안보다 먼저 나와있던 키리에가 상당히 호승심 강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키리에 역시 검을 다루는 이였으니, 서로간의 차이를 가늠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던 탓이다. 물론 지그프리드의 기사들 역시 그런 키리에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공작의 기사와 왕자의 호위가 알게 모르게 기싸움을 벌이는 사이, 궁 밖으로 칼리안과 앨런, 그리고 얀이 나왔다.

칼리안과 앨런이 나란히 걷고 시종인 얀은 당연히 조금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고 있었다. 그것을 본 기사들이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얀은 그런 것도 모른 채 그저 반가운 얼굴로 기사들을 보며 눈인사를 보냈다.

전날 오찬때는 이들을 이끄는 유란이라는 기사만 참석했기 때문에, 칼리안은 나머지 기사들은 처음 만난 터였다. 때문에 그들의 앞에 선 뒤 하나하나의 얼굴을 잠시 살폈다.

'호오.'

곧 칼리안의 입에 묘한 웃음이 걸렸다.

'말로만 듣던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인데. 실로 대단한 위용이군.'

슬레이만이 얼마나 고르고 골라 보냈는지 알 만 했다. 덩치며 기백이며 그 앞에 선 키리에가 한낱 어린애처럼 보일 정도였다.

물론 그것 때문에 칼리안이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눈빛들이 어째······ 이상한데.'

칼리안을 호위하겠다며 찾아온 기사들의 눈빛이 지켜줘야 할 왕자를 보는 그것과는 너무나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것을 굳이 말로 써본다면,

- 우리 공자님을 시종으로 부리고 있는 새끼가 너였냐?

딱 이런 느낌이라 하면 될 것이다.

옆에 서 있던 앨런이 이런 모습을 보며 매우 흥미로운 것을 본다는 얼굴을 했다. 로젤리타 여정 중에 무슨 일이 있을지는 몰라도 저들이 칼리안의 칼 솜씨를 볼 일이 한 번쯤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것을 보았을 때의 표정이 정말 궁금했다.

그것을 볼 수 있을 키리에는 매우 기대되는 표정을 살짝 드러냈고 이런 상황을 알 리 없는 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불편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왕자님?"

칼리안이 조금 더 노골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카이리시스에서 나가자마자 땅에 묻힐 것 같아서 불편하다는 말을 하는 대신, 칼리안은 기사들과 눈을 마주한 채로 힘주어 말했다.

"얀. 마실 것 좀 가져와."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엄청난 투기가 기사들 사이에서 뿜어져 나왔다. 얀이 체르밀 궁의 건물로 다시 들어간 뒤 칼리안이 기사들을 보며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저렇게나 반겨주니, 가는 길에 다른 생각을 할 일은 없겠는데."

저런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플란츠에 대한 생각같이 불필요한 고민에 빠질 틈이 있겠나 싶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 기싸움을 보던 앨런이 말했다.

"같이 못간다는 것이 이렇게 아쉬울 때가 있나."

한동안 기사들을 하나하나 쳐다보며 선전포고를 마친 칼리안이, 비로소 입을 열어 말을 건넸다.

"가는 곳까지, 잘, 부탁합니다."

어느새 버릇이 된 것 같은 진한 웃음이 다시 한번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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