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5화 (36/527)

제8장. 아주, 반갑습니다 (2)

르메인의 고개가 문 밖에 서 있던 카에라의 기사를 향해 돌아갔다. 칼리안을 따라가도록 지시하기 위해서였다. 앨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냥 두시지요. 왕자님이 곤란할 겁니다."

"위험한 것보다는 곤란한 것이 낫지."

르메인이 굳은 얼굴로 이 사달을 낸 원흉을 향해 말했고 앨런의 입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감히 앨런 마나실의 마차를 습격할 이는 이 카이리스에 없을 것이니, 안심하시지요."

안전하기로는 이 아르피아 궁에 버금갈 곳이 바로 앨런 마나실의 마차인 것은 맞았다.

다만 그 마차의 안전함이 칼리안에게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못할 앨런은 그저 이렇게만 말했다.

"게다가 숨겨둔 검도 따르는 중이니 위험할 것이 없습니다."

르메인의 눈썹이 움직였다. 호위 시종을 두고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에 대해 보다 자세히 묻는다면 왕자가 법을 어기고 있다는 것에 대한 질책이 따라야 하므로 르메인은 그 말을 듣지 못한 척 대답했다.

"그래. 일단 기다려보도록 하지."

그렇게 일단락을 내고 난 뒤에야 르메인의 팔이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지금껏 앨런을 문가에 세워 두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굳이 권하지 않았어도 앉을 참이었던 앨런이 그 앞으로 가 앉았다.

앨런을 잠시 쳐다보던 르메인이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이미 한번 큰 일을 치른 아이라 걱정이 앞서는군."

이렇게 걱정 많은 양반이 그 동안 어떻게 그리 무심했는지.

아몬드 쿠키 하나를 집어든 앨런은 문득 떠오른 이런 생각과 함께 쿠키를 씹어 삼켰다. 우물거리는 앨런의 입을 잠시 보던 르메인이 물었다.

"무엇때문에 나간 것인지는 알고 있나?"

앨런이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알 것 같아서였다.

"리베른의 마법 학원에 대해 묻던 중 팔랑팔랑 나가셨습니다."

"마법 학원이라? 그 아이가 학원까지 만들 결심을 한 것인가?"

"결심을 한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요."

애매한 대답을 한 앨런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러더니 굳이 가시를 숨기지 않은 질문을 꺼내놓았다.

"만약 마법 학원이 세워진다 하더라도 전하께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인재라는 것은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으니. 혹여 그것이 전하의 걱정거리가 되겠는지요?"

르메인이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칼리안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겠느냐는 말인 듯 한데. 섣불리 내 자리를 욕심 낼 아이가 아닌 것은 이미 알고 있으니 그런 이유로 내가 칼리안을 견제할 일은 없을 것이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날을 세울 이가 넘쳐나는 것이 걱정 될 뿐이지. 칼리안의 옆에 경이 있어 다행이라 생각 중이니 그리 쳐다보지 말게."

앨런이 왜 자신의 편에 서있는지 모르는 르메인이 아니었다. 처음 오던 날부터 못을 박지 않았던가. 칼리안이 무탈히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집안 정리를 해줄 뿐이라고.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이번 로젤리타에 경이 함께 가는 것이 어떠한가?"

실리케가 얌전히 있는 중이라지만 지그프리드의 영지까지 가는 그 먼 길에 행여라도 무슨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하는 말이었다. 물론 앨런도 이런 르메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앨런은 부드럽게 웃으며 르메인을 안심시켰다.

"밖에 있을 왕자님보다 안에 계실 전하의 목이 더 간당간당하니 쓰잘데기 없는 걱정은 내려두시지요."

르메인이 조용히 이마를 감싸쥐었다.

그리고 칼리안이 빨리 와서 이 인사를 좀 치워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 *

칼리안이 기다릴 것만 생각하고 무작정 달려가던 멜피르가 잠시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왕자님께서만 오셨는가?"

"네. 시종 둘만 대동하고 오셨습니다."

혼자서, 그것도 앨런 마나실의 마차에 탄 채로 왔다.

분명한 비밀 방문이다.

멜피르가 긴장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하인들 중 왕자님을 뵌 이가 있나?"

"안그래도 먼저 주변을 물려달라 하시어 따로이 보는 눈 없이 뫼셨습니다."

"그래. 잘했네."

멜피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후다닥 뛰어갔다. 지쳐버린 집사가 더 따라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서서 숨을 고르다 다시 멜피르가 간 곳을 향해 달렸다.

저택으로 들어선 멜피르는 서둘러 손을 씻고 옷의 먼지를 털어낸 뒤 응접실로 향했다. 생각 같아서는 편히 입고 있던 의복도 정갈한 것으로 갈아입고 싶었지만 왕자를 오래 기다리게 할 수가 없었다.

응접실 밖에 서 있는 얀과 키리에가 보였다.

미리부터 주변을 물려둔 그 모습에 멜피르도 집사를 밖에 두고 홀로 응접실에 들어갔다. 그러자 창을 등지고 앉아 찻잔을 들고 있던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칼리안과 시선이 마주친 멜피르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남작 멜피르 폴룬, 3왕자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찻잔을 내려놓은 칼리안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그저 속삭이듯 말하고 스쳐 지나간 것이 첫 만남의 전부였기 때문에 칼리안의 제대로 된 목소리를 대면한 멜피르가 허리를 조금 더 숙였다. 지나치게 정중한 인사를 하는 이유를 눈치 챈 칼리안이 소리 없이 웃었다.

하필 얼마 전부터 본격적으로 텐실과의 다이아몬드 거래를 시작한 폴룬 상단이었다. 그러니 목숨값으로 대체 뭘 달라고 할지 걱정이 태산일 터였다.

"연락 없이 찾아와 미안합니다. 드러내기가 어려워서요."

사실 칼리안이야 대놓고 멜피르를 찾아오든 궁으로 부르든 상관이 없었다. 왕자가 남작을 만나겠다는데 누가 참견을 하겠는가.

"저를 배려해주신 것임을 아는데 어찌 사과를 하십니까. 찾아주시니 그저 무한한 영광입니다."

이렇게 눈에 띄지 않는 방법으로 멜피르를 찾은 것은 칼리안이 아니라 멜피르를 위해서였다. 마법사 협회 외에는 그 어떤 귀족과도 손을 잡지 않은 칼리안이다. 때문에 멜피르와 따로 만난 것이 알려지면 그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고개를 끄덕여 화답한 칼리안이 테이블 맞은편의 의자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앉으세요. 잠시 이야기 할 것이 있으니."

조금 더 긴장한 얼굴이 된 멜피르가 주섬주섬 걸어와 조용한 몸짓으로 자리에 앉은 뒤, 칼리안의 입이 열렸다.

"그간 생각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레이븐의 목걸이를 선물해서 의중을 떠보려 했더니 완전히 간파했다는 것처럼 목걸이 값을 보내온 칼리안이었다. 그 이후로 아무 말이 없어서 혹시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더 큰 것을 요구하려 하는지를 알지 못해 속이 편칠 않았다.

칼리안의 말에 멜피르는 특별히 부정하지 않고 답했다.

"네, 왕자님. 천성이 장사꾼인지라 받기만 했던 적이 없다보니 내심 걱정을 하였습니다."

"솔직한 대답이 참 마음에 듭니다."

칼리안이 웃음을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잠시동안 멜피르를 쳐다봤다. 그 시선을 마주한 멜피르가 마른 침을 삼킬 때 쯤,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폴룬은 무엇을 거래합니까?"

멜피르의 어깨가 잠시 경직됐다.

말과 다이아몬드요, 라는 대답을 하는 순간 저 어린 왕자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왕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성격에 지금 마시는 차 값도 치르고 갈 것이 뻔했다. 그래야 훗날에 또 얽힐 일이 없을 테니까.

이렇게 생각한 멜피르의 머리가 팽글팽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칼리안은 다시 여유롭게 차 향을 즐겼다. 한 모금의 차를 더 넘겼을 때, 멜피르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거래하는 것이 없습니다, 왕자님."

칼리안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폴룬 상단은 말과 다이아몬드 거래를 하고 있지만 멜피르 폴룬은 아직 누구와도 손을 잡지 않았다는 말이었으니까.

칼리안이 기대했던 대답, 그리고 기대했던 모습이었다.

"아직이라 하니."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칼리안이 멜피르를 응시했다.

"내가 폴룬 남작과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을까요?"

수완 좋은 상단주 멜피르 폴룬 말고, 능력있는 남작 멜피르 폴룬을 상대하고 싶다고.

칼리안이 멜피르 폴룬을 찾아온 것은 재화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기사였던 베른은 어차피 상단의 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자질구레하게 미래의 일들을 예견해서 돈을 벌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 상단주 멜피르와는 대화할 필요가 없었다.

멜피르가 다시 한번 마른침을 삼켰다.

"허어······."

저도 모르게 버릇 같은 숨을 내쉰 멜피르가 대답 없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다시 한번 차를 마셨다.

달칵.

찻잔이 한번 더 작은 소리를 냈고, 멜피르의 입이 열렸다.

"처음부터 여기 있었습니다, 왕자님."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 잘 되었군요."

칼리안의 눈에 흡족한 빛이 들었다.

살려놓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칼리안이 천천히 말했다.

멜피르가 자세를 다잡아 앉았고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다만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라 조금 두루뭉술한 질문이었다.

"남작은 상단이 아닌 다른 것도 운영할 수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여 왔습니다."

앨런이야 칼리안의 사람이니 무슨 일을 시키려는 것인지부터 숨김 없이 말하고 부리겠으나 멜피르는 아직 아니었으니 그 의중부터 판단해보려는 것이다.

멜피르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사람이 있고, 돈이 있으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사람도 있고, 돈도 있습니다."

칼리안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브리센도 있을 것이라서."

앨런이 추측한 것과 같이 칼리안은 지금 마법 학원을 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일이 마법사단을 만드는 것만큼 위험하지는 않을 테지만 브리센과 얽혀 귀찮은 일들이 생길지도 몰랐다.

멜피르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떼며 물었다.

"브리센이 있다면 왕자님도 계신 것이 아닙니까?"

칼리안이 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내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네요. 맞습니다. 나도 있습니다."

"사람과 돈이 있고 브리센 앞에 왕자님이 계신다면 그 역시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온 이유에 대한 수수께끼를 더 이어나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칼리안은 더 숨기지 않고 본론을 꺼내들었다.

"카이리스에 마법 학원을 세워볼까 합니다. 학원 하나 쯤 세울 돈은 이미 충분하고 교육을 담당할 이들이야 협회의 마법사든 앨런이든 써먹을 사람이 많은데. 운영이 문제입니다."

태평하기 그지 없는 마법사들이 학원을 제대로 운영할 리가 없었으니까.

그것을 고민하다 이 수완 좋은 상단주가 생각났고, 아직 받지 않은 목숨값이 떠올랐다. 그 길로 이렇게 멜피르를 찾아온 칼리안이었다.

멜피르가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고민을 시작했다. 생각해야 할 것이 많으리라는 것을 아는 칼리안은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렸다. 단순히 학원을 운영하는 것을 떠나 멜피르 폴룬 남작이 3왕자 칼리안의 편에 서게 되는 일이었으니까.

결정을 내린 듯 멜피르가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칼리안의 제안에 대한 대답이 아닌 다른 말이 먼저 나왔다.

"그것이 저의 목숨값입니까, 왕자님?"

자신을 살려준 대가로 시키는 일인지. 그래서 의지와 상관 없이 꼭 해야 하는 일인 것인지. 그리 물어왔다.

칼리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미 받았습니다, 목숨값."

달칵.

마지막 모금을 비운 차를 내려놓은 칼리안이 답했다.

멜피르의 시선이 한동안 빈 찻잔에 머물렀다.

곧 시원한 웃음소리가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석달 동안 멜피르의 마음 한 구석에 얹혀있던 짐을 털어낸 것에 대한 후련함이었다.

"하겠습니다."

멜피르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 * *

이틀이 지난 아침.

체르밀 궁의 식당에서는 빨갛게 물을 들여 구운 빵, 체리가 가득 들어간 파이, 붉은 색을 가진 온갖 과일과 채소가 준비되고 있었다.

체르밀 궁을 둘러싼 회랑은 붉은 실로 장식됐고 인공 호수 주변에는 빨간 라프라니아 꽃이 한가득 놓였다. 바람결에 흩어진 꽃잎이 호수 위를 맴돌았다.

카이리스 사람들은 탄생을 축하하고 죽음을 슬퍼하는 것에 구분을 두지 않았다. 죽은 이들의 앞에 붉은 꽃을 놓았던 것처럼 생일을 맞은 이들에게도 붉은 꽃을 건넸다.

그들에게 붉은색은 죽음과 탄생을 아우르는 색이었다.

그러니 그 얼마나 개성 없는 풍속인가, 칼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산 자에게도 죽은 자에게도 같은 색을 건네다니.

아무튼 칼리안 혼자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전통을 바꿔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칼리안은 잠에서 깨자마자 석류 주스를 마신 뒤 메를린이 건네주는 열 다섯 송이의 라프라니아 꽃을 받으며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칼리안의 생일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카이리스의 3왕자가 드디어 성년이 되는 감격스러운 날인 것이다.

"열 다섯 번째 탄생일을 맞이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래서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을 이 말을 오전 내내 들었다. 세뉴 관에 모인 귀족들로부터 축하 인사와 생일 선물을 받는 것에만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로젤리타 여정에 함께 할 이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간단한 감사 인사가 포함된 건배사를 하고 긴 시간에 걸쳐 밥을 먹고 차를 함께 했다.

쉴 틈 없이 저녁 만찬을 위한 예복으로 갈아입고 지그프리드관을 향해 갔다.

붉은 실로 매우 화려하게 장식된 검은 색의 망토가 어쩐지 칼리안의 외양을 떠올리게 했다. 메를린이 일부러 그런 색으로 고른 것이 분명했다. 검은 색 재킷과 바지에는 별다른 장식을 넣지 않았으나 어디서나 눈에 띄는 망토 덕에 어차피 재킷이나 바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나마 한가지 흠이었던 마른 몸에도 살이 붙었으니 귀족들의 시선이 칼리안에게 다시 머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게다가 오늘의 주인공이기도 했고.

"반갑습니다."

칼리안은 또 이렇게 인사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반갑다는 말을 하는 바람에 귀족들이 심한 고민을 했더라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뒤 별 뜻 없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계속 그렇게 인사를 해왔다. 그러다보니 버릇이 되었다.

귀족들의 찬탄 가득한 눈길을 한 몸에 안은 칼리안이 언제나와 같은 기품있는 걸음으로 자신의 자리에 갔다.

- 우뚝.

그리고, 정말로 아주 잠시 동안 발을 멈칫했다.

석 달 동안 얼굴을 비추지 않았던 플란츠가 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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