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4화 (35/527)

제8장. 아주, 반갑습니다 (1)

아르센 헤르츠.

가끔 생각이 났다.

당연히 언젠가 만날 날이 있을 것이라고도 각오를 했다. 사사로운 원한 같은 것도 없었다. 상대가 베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적국의 기사였기 때문에 죽인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심지어 죽어가는 베른에게 꽤나 예의를 갖춰주었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괜한 원망이 치미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르센의 말에, 칼리안이 진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아주, 반갑습니다."

그 웃음이 묘하게 플란츠와 닮아 있었다. 유일하게 그것을 눈치 챈 앨런이 칼리안과 아르센을 한 번씩 번갈아가며 쳐다보다 작게 혀를 찼다. 인사 채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저 마법사 가는 길이 순탄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게 된 탓이다.

"마법사단에 속하게 될 유능한 인재라 하니 가는 길에 많이 배우면서 서로 친해져 보거라."

다른 이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르메인이 때마침 이런 말을 했다.

칼리안의 무릎 위에 올려진 손가락이 소리 없이 움직여 긴 곡선을 그려냈다. 손 끝의 잔상을 따라가듯 칼리안의 얼굴에도 같은 곡선을 가진 미소가 그려졌다.

"네, 전하.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려다 붙인 그 웃음을 본 앨런의 팔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고 르메인은 그저 기꺼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은 아직 기억하지 못했지만 사실 아르센은 칼리안을 두 번째 보는 것이었다. 물론 그 처음은 아르센에게 마법을 가르쳐 준 스승의 영결식 날, 다리를 건너려는 칼리안을 막아섰을 때였다. 그 때 가졌던 칼리안에 대한 첫인상이 매우 좋았기 때문에 앨런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았을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왕궁을 찾은 그였다.

때문에 아르센은 그날 보였던 칼리안의 미소와 오늘의 미소가 가지는 의미가 꽤 많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칼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로젤리타 준비는 다 되었느냐?"

문득 르메인이 칼리안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익숙해지기 힘든 자상한 목소리 때문에 칼리안이 조금 어색해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네. 모두 마쳤습니다."

"헌데 마차를 타지 않겠다 했더구나. 불편하지는 않겠느냐?"

십수 가지의 편의 마법이 적용된 것은 물론이고, 천하의 앨런 마나실이 걸어 놓은 각종 방어 마법에, 그 지고한 고룡 시스파니안이 이공간을 활용해 만들었다는 마차용 침실과 샤워실과 화장실까지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는 화려하고 고급스럽고 넓고 쾌적한 대륙 최고의 마차를 두고 말이나 타는데 어떻게 안불편하겠느냐는 얼굴로, 칼리안이 조신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다 레이븐 때문이었다.

칼리안이 마차 안에 들어가면 옆에 서서 걷지를 않았다. 말과 유난히 친하다던 엘프의 피를 가진 키리에 남매도 레이븐을 다루지 못했다.

그리하여 칼리안은 레이븐을 두고 가느냐 마차를 두고 가느냐를 놓고 정말 심각하게 고민했고 이참에 운동이나 실컷 하라는 앨런의 조언에 따라 그의 사랑스러운 말과 함께 로젤리타를 다녀오기로 한 터였다.

"말이 워낙 영특하니 별 탈은 없을 겁니다."

르메인을 안심시키겠다는 것인지 칼리안을 놀리겠다는 것인지 앨런이 이렇게 말했다. 그 소리를 들은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칼리안의 결정을 지지해주었다.

"그래. 말에 올라 카이리스 이곳 저곳을 살펴 볼 기회도 없을 테니. 좋은 생각을 한 것이라 믿으마. 왕자의 신분으로 그리 자유롭게 왕궁 밖을 다닐 기회도 또 없을 것이니."

칼리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칼리안과의 대화가 마무리 되자 르메인의 고개가 이번엔 앨런을 향해 돌아갔다. 다만 대화의 주제는 여전히 칼리안이었다.

"근래 왕자의 마법은 어떠한가?"

"시스파니안이 울고 갈 정도입니다."

아르센이 함께 있는 자리였으나 칼리안의 마법 수준이야 어차피 아르센도 알게 될 일이었으니 르메인이 편하게 물었고, 같은 이유로 앨런 역시 편하게 대답했다.

르메인이 조금 놀란 얼굴로 앨런을 쳐다봤다. 그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는 말인지 하는 표정이었다. 앨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축복을 준 것이 아까워서."

덜컥!

지레 놀란 아르센의 손에서 큰 소리가 났다.

떨굴 뻔한 나이프를 간신히 붙든 아르센이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이 자리를 함께하는 높은 분들의 눈치를 보았다.

칼리안은 나이프 소리는 물론 앨런의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여유로운 식사를 이어나가고 있었고 르메인은 앨런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앨런은 꼴딱꼴딱 물을 마셨다.

르메인이 그런 앨런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경은 참 한결같군."

"여부가 있겠습니까."

결국 르메인의 깊고 푸른 눈이 다시 칼리안을 향했다.

"실로 오랜만에 왕가에서 마법사가 나는 것이니라. 마나실 경이 이리 엉망으로 굴어도 그 능력은 출중하니 로젤리타를 다녀오거든 마나실 경에게 더 많이 배우고 노력하거라."

르메인의 입에서 엉망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면 평소 르메인을 대하는 앨런의 행실을 알 만 했다. 칼리안이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는 살짝 고개 숙여보이며 얌전히 대답했다.

"네, 전하. 더 노력하겠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고작 14세의 나이에 3서클을 마스터했음을, 그것이 앨런 마나실보다 1년 빠른 성취임을 알 리 없을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높은 스승님 때문에 괜한 소리를 들은 칼리안은 억울할 것도 없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식사에 열중했다. 물론 앨런은 본래부터 한결같은 모습으로 식사중이었다. 오로지 아르센만이 셋의 기에 짓눌려 마른 입을 적셔낼 뿐이었다.

그렇게 몇몇 대화가 오가며 오찬이 마무리되었다.

항상 바쁜 르메인과 속이 바쁜 아르센이 먼저 돌아간 뒤, 칼리안과 앨런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함께 밖으로 걸어나갔다. 얀과 키리에가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칼리안과 앨런은 둥글게 다듬은 가로수가 회랑처럼 길게 이어진 녹빛의 길을 나란히 걸었다. 그 곳은 세뉴관의 주변을 담처럼 감싸고 있는 멋진 산책로였다. 8월의 더운 햇빛이 나뭇잎 사이사이로 스며들어 고운 자갈길 위에 구슬같은 무늬를 올려놓고 있었다.

앨런이 자연스러운 순서인 것처럼 사일런트를 발현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이 대단한 마법사가 카이리스에 와서 가장 많이 쓴 마법이라는 것이 고작 사일런트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것에 그다지 큰 신경을 쓰지 않을 앨런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칼리안에게 물었다.

"인사를 물릴까요, 왕자님?"

아르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를 떠올린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가슴 한 켠을 쓸어내렸고 앨런은 베른과 아르센이 어떤 관계인지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가만히 들려오는 매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칼리안이 물었다.

"그 자,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이제 스물 여덟입니다. 능력이 있으면서도 왕자님과 함께 지내기 좋을 만큼 젊은 마법사를 고르다보니 그리 되었습니다."

베른을 공격했을 때 서른 여덟의 나이로 군단장 직을 수행했다는 소리다. 그 나이에 마법사단을 이끌 정도라면 인재였다. 칼리안만이 홀로 기억하는 응어리 때문에 그런 인재를 놓쳐야 할 이유가 없었다.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로 두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얀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말이 '알아서 하겠다'라는 칼리안의 호언장담이라는 것을 앨런은 아직 몰랐다. 그래서 앨런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벌써부터 마법사들을 모으고 있는 겁니까?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마법사단 창설을 준비한지 고작 세 달이다.

"하다못해 그들을 훈련시키고 머물게 할 건물도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을 먼저 모으고 있는 것 같아서요."

앨런이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왕자님의 호위를 위해 그 자만 미리 부른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지요. 그리고 아직 카이리스에 인재라 할 만한 마법사가 많지 않아서 머릿수를 채우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하기사, 어련히 알아서 하겠나. 이런 생각이 든 칼리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칼리안을 보던 앨런이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법사단의 이름을 정했습니다."

칼리안의 고개가 앨런에게 돌아갔다.

르메인이 만들었던 군대이니 칼리안이 미리 만들어 쓰더라도 그 이름만은 르메인이 직접 정하도록 했으면 했다. 때문에 칼리안은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그 이름을 앞서 알려주지 않았었다.

"무엇으로 정했습니까?"

그러자 앨런이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맞춰보라는 것이다. 칼리안이 실소하며 입을 열었다.

"발칸."

"역시."

앨런이 미소를 지었다.

"맞습니다. 르메인이 그리 부르자 하여 그리하겠다 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이름까지 정해지니 조금 실감이 나네요."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곧 리베른에 머무는 제 며느리와 손녀를 부를 생각입니다. 아마 로젤리타에서 다녀오실 즈음이면 만나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손녀······가 있으셨군요."

칼리안의 발이 순간 멈칫하다 앞으로 나갔다. 매우 어색한 웃음이 칼리안의 얼굴에 드러났다. 아르센보다 더 젊어보이는 앨런이 할아버지 미소를 지었다.

"당차고 예쁜 아이입니다. 다만 손녀가 아니라 며느리 때문에 부르는 것이지요. 지금 리베른에서 마법을 가르치고 있으니, 아무래도 발칸의 마법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에 도움이 될 듯하여."

칼리안은 리베른에 대해 그리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저 마법사들에 대한 대우가 좋고 사람들의 성정이 굉장히 자유로운 나라라는 정도만 알았다. 때문에 리베른의 마법 교육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칼리안이 앨런에게 물었다.

"리베른에 마법 학원이라는 시설이 궁금합니다. 그 곳에서 가르침을 받아도 마법사로서 활동을 할 만큼 충분히 배울 수 있습니까?"

일대 다수의 마법 교육이 과연 얼마나 효율적일지 알 수가 없어서 묻는 말이었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브리센의 기사 양성소와 비슷합니다. 재능과 노력에 결과가 따르는 것이니 서로 다를 바가 없지요."

그에 대한 칼리안의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생각에 빠진 것임을 느낀 앨런이 말 없이 칼리안의 옆에서 느긋한 걸음을 옮겼다.

칼리안의 입은 세뉴 관을 거의 한바퀴 돌았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열렸다.

"스승님, 혹시 오늘 오후에 다른 일정이 있습니까?"

"특별한 일정은 없습니다."

앨런은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칼리안이 찾는다면 일정이 있어도 없앨 앨런이었으니까.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이번에 칼리안이 찾는 것은 앨런이 아니었다. 칼리안은 기대감 가득한 앨런을 향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마차 좀 빌려주세요."

뜬금 없이 마차라니.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앨런이 의문 어린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보며 물었다.

"제가 아니라 제 마차에게 볼 일이 있으신지요?"

꽤 이상한 소리였기 때문에 칼리안이 잠깐 웃다 대답했다.

"스승님 이름만 잠시 쓰면 되는 일이라서요. 함께 가셔도 상관은 없지만 오늘은 별로 재미 없으실겁니다."

누가 보아도 앨런 마나실의 것임이 분명한 그 호사스러운 마차를 타고 앨런 마나실의 이름을 팔겠다는 소리였다. 먼저 가자 청하는 것이 아닌 자리에 굳이 따라갈 미련퉁이는 아니었던 앨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재미 없는 곳은 싫습니다. 아무튼 왕자님께서 제 마차를 쓰시는데 제가 왕궁 밖에서 뭉그적거리고 있으면 이상할 테니 르메인과 잠시 이야기나 나누고 있겠습니다. 다녀오시지요."

"네. 감사합니다."

그 길로 칼리안은 얀과 키리에를 데리고 앨런의 마차에 올라 왕궁 밖으로 나갔다.

시종장으로부터 칼리안이 앨런의 마차를 타고 왕궁을 나갔다는 말을 들은 르메인은 앨런이 함께 나가는 경우에는 더 이상 보고를 올리지 말라는 말을 했다. 앨런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종장의 뒤로 앨런이 불쑥 나타났다. 그것을 본 르메인의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

이 망할 마법사가 애를 혼자 내보낸 것이다.

* * *

폴룬 상단의 상단주 멜피르 폴룬은 지금 저택 후원의 작은 연못가에 서서 물고기 밥을 주고 있던 참이었다. 즉, 매우 평화롭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그랬다는 말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을 즐기던 그에게 하인이 달려오더니 검은색의 자개 장식 마차가 저택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동글동글한 멜피르의 눈이 물고기의 것만큼 크게 벌어졌다.

"앨런 마나실 경이 이 곳에 오셨다고?"

"네, 남작님. 방금 그 마차가 들어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후원까지 달려오느라 차오르는 숨을 소리 없이 삼키던 하인이 대답했다.

"허어······ 그분께서 대관절 무슨 일로 오셨는가."

물고기 밥이 담긴 그릇을 뒤에 서 있던 하인에게 넘겨준 멜피르가 손을 탁탁 쳐서 묻어있던 것을 털어냈다. 그 뒤 서두르는 걸음으로 들어가던 중 또 한 사람이 멜피르에게로 달려왔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그는 하인이 아닌 집사였다. 멜피르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나이 많은 그의 집사가 저렇게 직접 뛰어온다면, 뭔가 중요한 일이 있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곧 멜피르의 곁으로 다가온 집사가 귓가에 대고 말을 전했다. 멜피르의 눈이 조금 전보다 더 커졌다.

'마나실 경의 마차에, 다른 분이 계셨습니다.'

그 말을 끝까지 전해들은 멜피르는 하마터면 연못에 빠질 뻔한 다리를 간신히 들어올렸다. 어느새 그의 얼굴이 희게 질려 있었다. 국왕 탄신 기념일 축제에서 벌어질 뻔한 사고를 막게 했던 목소리가 귓가를 윙윙 울렸다.

'머리 위가 불안하군요.'

그 짧은 말로 그의 목숨을 살려냈던 칼리안이 왔다. 3개월 동안 미뤄 두었던 목숨값을 받으러 온 것이다.

그것도 이런 대낮에 직접!

멜피르는 지금까지 살아온 많은 날 중 오늘의 멜피르가 가장 똑똑하기만을 바라며 서둘러 칼리안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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